소설리스트

화산천마-278화 (278/391)

278화

흑야차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당혹감이 그를 휩쓴 탓이었다.

무정도객과 성휘나찰사 그리고 취련이 당했을 때도, 멸천화가 틀어막혔을 때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떨림은 손이 맞닿아 있는 천휘가 아주 잘 느끼고 있었다.

‘보아하니, 맞나 본데.’

천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데 이상하네. 분명히 모두 죽었을 텐데.’

그는 순간적으로 전생을 떠올렸다.

천마신교의 교주가 막 되었을 시절을 말이다.

그 당시 천휘는 천마신교 내에서 돌풍을 일으키는 존재였었다.

‘정확히는 적이 많았지.’

그때를 떠올리니, 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어느 날 뜬금없이 소교주에 임명되더니, 이후 오 년도 안 되어서 교주직에 취임했던 것이 전생의 천휘, 독고구연이었다.

기나긴 천마신교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을 만들어 냈기 때문일까.

천마신교 내에서는 그가 교주가 되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자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앞장서 불만을 드러낸 것이 바로 오대가문(五大家門) 중 하나.

천봉항가(天奉項家)였다.

그들은 당시 독고구연이 교주직에 오른 것을 두고 탐탁지 않다는 기색을 마구 풍겨 댔었다.

그리고 당시의 그는 그런 자들을 너그러이 봐줄 성격이 아니었다.

곧바로 천봉항가를 찾아갔었다.

그리고.

‘철저하게 박살 냈지.’

천봉항가는 그날 사라졌다.

사람도, 터도, 모든 것이.

자신이 교주가 되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자들에게 경고도 할 겸 본보기 삼아 아예 초토화를 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탁월했다.

그날 이후 독고구연이 교주직에 오른 것에 불만을 표하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어찌 그러랴.

홀로 오대가문인 천봉항가를 멸문시켜 버린 존재이거늘.

오히려 그날 이후 천마신교 내에서 그는 새로운 천마로서 경외시되며, 받들어졌다.

‘풀포기 하나 못 나도록 박살을 냈는데, 생존자가 있을 줄이야.’

천휘가 가라앉은 눈으로 흑야차를 응시했다.

야차의 가면 속 시퍼런 광망이 갈 길을 잃은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 눈빛에서 어지러이 뒤섞인 감정이 느껴졌다.

아마 머리가 복잡하리라.

그때.

탓!

흑야차가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천휘를 노려봤다.

『너는 누구지……?』

안개가 낀 듯한 전음이 전해졌다.

흑야차에게서였다.

『나?』

천휘는 의문이 가득 묻어나는 어투의 전음에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천휘.』

순간 흑야차의 피풍의가 부풀었다.

자신을 놀린다는 생각에 분노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의 주변으로 불투명한 기운이 줄기줄기 뻗어 나갔다.

이내 그 가공할 기운은 흑야차를 중심으로 다시 뭉치더니 대기를 일그러트리며, 그를 천천히 감쌌다.

순식간에 일어난 기묘한 조화.

이윽고 흑색의 피풍의 위에 덧씌워진 불투명한 공력이 너울졌다.

마치 장포를 걸친 것만 같은 모습.

귀혼마투갑(鬼魂魔鬪鉀)이었다.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천휘가 전음을 흘렸다.

『이제 숨길 생각이 없나 봐? 아니지, 그래도 마기는 안 일으켰으니 숨기려고는 하는 건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귀혼마투갑이 일렁거렸다.

그와 동시에 뿌리처럼 굳건해 보이는 그의 발에서부터 파동이 일어났다.

잔잔한 호수에 퍼지는 파문처럼 그를 중심으로 퍼지기 시작한 파동이 장원을 모두 휩쓸 무렵.

쿵!

흑야차가 오른발로 땅을 찍었다.

잔잔하던 파동이 일순간 거센 파도처럼 장원에 크게 몰아쳤다.

그리고.

파앗!

흑야차의 신형이 질주했다.

곧장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그의 검은 인영이 마치 봉처럼 길어졌다.

이윽고 그가 우수를 활짝 펼쳤다.

소맷자락이 펄럭이며, 새까만 삭으로 이루어진 흑수(黑手)가 화탄처럼 튀어나와, 섬뜩한 기세를 풍겼다.

‘……이건 모르는 수법인걸.’

천휘의 눈이 강렬한 빛을 발했다.

이어서 그가 좌수를 움직였다.

벼락과도 같은 손짓이었다.

마치 중간 과정이 사라진 듯 움직인 좌수가 흑야차의 주변을 감싼 귀혼마투갑을 뚫고, 손목을 낚아챘다.

인식보다도 빠른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런 거였나.”

흑야차에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나지막한 음성을 흘린 천휘는 그의 손목을 잡은 손을 그대로 잡아당겼다.

“……!”

흑야차가 두 눈을 부릅떴다.

다급히 만근추를 펼치며 끌려가지 않도록 버티려 했지만.

“쓸데없는 짓이야.”

속절없이 천휘의 손에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항거할 수 없는 힘이었다.

이어서 천휘는 오른발을 번쩍 들어 올리며, 그대로 흑야차를 걷어찼다.

퍼어억!

북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그와 동시에 흑야차의 몸이 화살처럼 뒤로 날아가며 부서진 담장을 통과했다.

마치 화탄이 날아간 것 같은 광경.

그러다 뒤늦게.

콰지직!

나무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얼핏 봐도 약 오십 장 정도 되는 거리.

한 번의 발길질로 흑야차가 저 멀리까지 날아간 것을 깨달은 주변 곳곳에서 경악 어린 헛숨이 내뱉어졌다.

그러던 중.

“소주!”

“소주!”

어깨를 감싸 쥔 취련과 내상을 입은 여운약이 다급하게 달려갔다.

그 행동에 멸절대가 움찔했다.

쫓아가야 하는 것인지 순간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제가 쫓아갈 테니까, 멸절대는 뒷정리나 하세요.”

때마침 천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멸절대에게는 시선도 두지 않은 천휘가 저 멀리 피어난 뿌연 먼지를 지그시 보더니, 가볍게 발을 굴렀다.

그 순간.

휙!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마치 허깨비와도 같았다.

“…….”

동시에 장원에는 이전보다 깊은 침묵이 흘렀다.

천휘와 흑야차 일행이 사라졌음에도 그들은 아직 꿈에서 깨지 못한 이들처럼 멍한 상태였다.

멸절대도, 혈우검가의 무인들도.

말로만 듣던 고수들의 싸움을 목격한 지금 정신을 차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누군가의 자그마한 속닥임이 그들의 마음을 대변하듯 정원을 울렸다.

탓!

한편 암향표를 펼치던 천휘는 앞서 달려가고 있던 여운약을 쫓아 목덜미를 잡아서 그대로 내던졌다.

“이놈……!”

여운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상을 입은 상태임에도, 무리해 가며 내공을 끌어올리려던 찰나.

“너희는 필요 없어.”

어느새 그녀의 위에 나타난 천휘가 발을 아래로 내리찍었다.

“컥!”

여운약의 몸이 그대로 바닥에 꽂혔다.

콰앙!

추락한 그녀의 몸을 중심으로 땅에 균열이 일어나며, 후폭풍이 몰아쳤다.

‘저런 존재가…….’

취련의 이마에 땀이 흘러내렸다.

사사영결을 극한으로 펼쳐 낸 그녀는 흑야차에게 달려가면서도, 뒤의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 공포가 일렁거렸다.

수많은 죽음과 고수들을 만나 온 그녀조차, 천휘는 규격 외의 존재였다.

그때.

“혼자 가는 건 아니지.”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취련이 다급하게 옆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천휘가 있었다.

‘언제!’

그녀가 다급히 외팔을 움직였다.

덩달아 소매가 나풀거렸고.

피잉!

날카로운 암기가 쏘아졌다.

천휘는 자신의 눈을 향해서 정확하게 쏘아진 암기를 보며, 좌수를 들었다.

탁.

두 손가락 사이에 잡힌 암기.

“……!”

간단히 처리된 암기에 취련이 경악에 휩싸일 무렵.

“암기를 던질 거라면 이렇게 던져야지.”

천휘는 손가락에 잡힌 암기에 내공을 실어서는 한순간에 쏘아 냈다.

비뢰도.

내공을 충돌시킨 암기가 마치 벼락처럼 쏘아지며, 그녀의 혈을 짚었다.

그 즉시 취련의 의식이 끊기며, 달리던 그대로 앞으로 쓰러진 그녀가 흙바닥에 뒹굴었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길 잠시.

“그럼.”

어딘가로 고개를 돌린 천휘는 곧바로 암향표를 극성으로 펼쳤다.

* * *

“큭…….”

거대한 바위에 부딪혀서 충격을 받은 흑야차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는 지금 정신이 없었다.

매화신협이 고수란 것은 알았지만, 직접 마주한 경지는 예상했던 것과 그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그뿐인가.

그는 귀혼마경을 알아봤다.

자신과 사부…… 아니.

조부님을 제외한다면 천하에 아는 자가 없는 그 절대의 마경을.

‘매화신협은 화산파의 도사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흑야차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입안에서 비릿한 혈향이 감도는 듯했다.

그때.

“정신 차렸어?”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큭.”

화들짝 놀란 흑야차가 몸을 일으키려다가, 엄습하는 고통에 신음을 흘리길 잠시.

“마교가 다시 나타날 줄이야.”

그는 자조적인 목소리로 나직이 속닥였다.

“뭐……?”

그에 천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천마신교를 마교라 불러?’

마교란 말은 중원에서 천마신교를 폄하해 부르는 단어였다.

그렇기에 대부분 마인들은 마교라는 말을 들으면 발작을 일으키기 마련이었는데, 오히려 마교라 부르다니.

‘그럼 신교와는 상관없다는 건데.’

천휘는 그를 지그시 보며, 답했다.

“아닌데.”

“……이미 죽은 목숨인데 마지막까지 거짓말을 할 필요가…….”

“거짓말은 무슨.”

천휘가 그의 말을 싹둑 끊었다.

“나에 대해서 잘 알잖아? 내가 상관이 있을 것 같아?”

천휘의 말처럼 흑야차는 매화신협의 정보라면 충분하고도 남을 만한 양으로 수집하고 인지한 상태였다.

침묵하는 흑야차를 본 천휘가 빙그레 웃으며, 입을 달싹였다.

“봐봐. 역시 잘 알고 있잖아.”

“…….”

“그런 것보다 아까 전 물음에 대한 답을 좀 듣고 싶은데 말이야.”

천휘가 눈을 천천히 반개했다.

새까만 동공에 은은한 내공이 실리며, 흑야차를 그 안에 빠트렸다.

무저갱의 감옥.

그 두 눈을 마주한 흑야차는 무간지옥에 갇힌 것만 같은 착각과 함께 순간 숨이 가빠 왔다.

그때 천휘의 입이 다시 달싹였다.

“너 천봉항가의 일원이지?”

“……!”

가면 속 눈동자가 동요했다.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

그러한 모습에 천휘는 확신하며 말했다.

“그 난리 와중에도 살아 있는 자가 있었나 보네.”

흑야차는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자신이 아는 과거를 그 역시 아는 듯한 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지. 내가 알기로는 마기 없이 귀혼마경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은 없을 텐데…….”

천휘는 턱을 매만지며 흑야차를 훑어보았다.

귀혼마경은 역천의 무공으로 자연의 섭리에 반(反)하는 마경이었다.

그렇기에 마기만이 그 무공을 감당할 수 있었다.

한데 앞의 흑야차는 달랐다.

마기를 철저하게 숨기고 사이한 기운, 즉 사기를 풍겨 내고 있었다.

“귀혼마경을 바꾼 건가?”

그 말에 흑야차의 눈이 흔들렸다.

아주 미세한 떨림.

하지만 천휘는 모두 보고 있었다.

“놀라운데. 누가 한 거지? 온몸을 가린 것을 보아하니 네가 방안을 마련했을 리는 없을 테고.”

천휘가 흑야차를 샅샅이 훑었다.

전신을 가린 행색을 통해 그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추측할 수 있었다.

‘아직 제대로 익히지 못했으니 저런 꼴이겠지.’

성취를 얻기 전, 극마(極魔)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채 귀혼마경을 익힌 자들은 하나같이 흔적이 남았다.

부풀어 오르는 혈도와 혈맥.

순리를 벗어난 역천의 마경은 자연의 섭리 아래 놓인 신체를 어긋나게 하고, 그 형태를 드러나게 했다.

그 때문에 한때 중원에서는 귀혼마경을 익힌 자들을 혈면귀(血面鬼)라 부르며, 두려워하던 때도 있었다.

“사흑련주가 뭔 짓을 했으려나? 아니면 긴 세월을 거듭해서…….”

이런저런 추측을 중얼대는 천휘의 눈동자에 일순 기대감이 어렸다.

‘아무래도 현재의 사흑련주가 하지 않았으려나,’

귀혼마경은 절세의 마공이었다.

한데 그것을 바꾸었다는 것은 무위가 대종사의 경지에 도달했단 뜻.

즉 절세의 고수라는 의미였다.

“뭐, 자세한 것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은…….”

천휘가 말을 천천히 늘였다.

“널 어떻게 할까.”

그의 시선이 흑야차를 꿰뚫었다.

흑야차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앞에 있는 것은 저승차사였다.

자신의 목숨을 쥐락펴락하는.

‘끝인가.’

그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받아들이려 할 때, 막상 천휘는 고민하는 중이었다.

원래라면 후환을 없애기 위해 죽이는 것이 좋았지만.

‘조금 미안하단 말이지.’

전생의 일을 떠올렸다.

아무리 본보기 삼아서 과감히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조금 과한 면이 존재했다.

‘쩝, 멸문은 좀 그랬긴 했어.’

천휘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리 천봉항가가 자신이 교주직에 오른 것을 싫어하는 티를 냈다지만, 따지고 보면 납득가기는 했다.

천봉항가는 오래전부터 천마를 받들어 온 가문으로, 그 역사가 길지 않은가.

뜬금없이 나타난 지 얼마 안 된 이가 교주로 임명되었으니, 탐탁지 않았을 터였다.

‘일단을 살려 둘까?’

천휘가 곧 흑야차를 보던 시선을 거뒀다.

‘천봉항가가 중원에서 사파로 명맥을 유지한 것도 궁금하니.’

천휘는 지금 이 상황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멸문했다고 알려진 천봉항가였다.

한데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니, 어찌 흥미가 안 일어나겠는가.

그는 이내 납검을 하며, 몸을 돌렸다.

“돌아가서 전해.”

이어서 천휘는 통보하듯이 말했다.

“나중에 내가 직접 찾아갈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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