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화월을 쥔 손의 소매가 펄럭였다.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진 쾌검.
압도적인 속도로 이루어진 검세에 순간적으로 세상이, 시간이 멈춰진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단 하나, 천휘뿐이었다.
스으윽―
매화신공의 내력을 품은 화월이 횡으로 그어지며, 붉은빛을 일으켰다.
햇빛마저 집어삼키는 강렬한 적빛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매향성류(梅香成流).’
초식을 생각하기 무섭게 의념이 담긴 화월이 그 뜻을 반영했다.
한쪽 끝에서부터 시작된 적빛이 곧 지평선을 따라 한 줄기의 선을, 궤적을 그렸다.
이내 궤적이 끝을 맺는 순간.
후우우웅―
횡으로 휘둘러진 궤적을 따라서, 뒤늦게 공기가 요란하게 요동쳤다.
이내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고.
파아아앙!
요동을 치던 공기가 폭발했다.
강렬한 충격파가 침묵에 휩싸인 혈우검가의 장원을 휩쓸며, 퍼져 갔다.
근처에 있던 이들은 세차게 불어닥쳐 온 강풍에 절로 뒷걸음질 쳤다.
“기의 폭풍이다!”
“흡! 내공을 일으켜!”
강렬한 돌풍에 담겨 있는 기세에 주변에 있던 이들은 전신이 저릿저릿함을 느꼈다.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난 그들은 전신을 휩쓰는 충격에 몸을 떨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저 한 줄기의 붉은 검광이 모습을 보인다 싶더니, 세상이 갈라졌다.
실로 고절한 검식의 발현이었다.
경외의 눈을 한 멸절대도.
공포만 담긴 눈을 한 혈우검가의 무인들도.
모두가 똑같이 넋을 놓은 채 숨을 죽이고 전황을 지켜보던 그때.
“흠, 너무 얕았나?”
가벼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충격파가 일어난 곳이었다.
가공할 검식을 보인 천휘는 고개를 까딱이며, 검을 밑으로 늘어트렸다.
“썩 손맛이 없는걸.”
그는 말과 함께 정면을 주시했다.
노파와 여인이 흑야차의 앞에 서서는 차가운 안광을 발하고 있었다.
둘의 모습은 성치 않아 보였다.
곱게 틀어 묶었던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어서 사방에 나부꼈고 입술 사이로 한 줄기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내상을 입은 흔적이었다.
그러나 천휘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저 노파가 가장 뛰어난 실력자인가.’
부지불식간에 펼쳐 보인 매화성류를 막아 낸 둘을 훑어보고 있을 때.
“하마터면 목이 달아날 뻔했어.”
먼지가 낀 것처럼 묘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흑야차가 손을 들어서는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가슴께까지 내려오던 잿빛의 머리카락이 더는 시야에 존재치 않았다.
목 근처에서 뚝 잘려 있었다.
조금 전 일검에 잘린 것이리라.
‘……이런 괴물이 있다니.’
애써 여유로운 척 말하고 있었지만, 야차의 형상을 띤 가면 속 눈동자는 사정없이 흔들리는 중이었다.
여유로움은 없어진 지 오래였다.
일렁거리는 푸른 광망은 당혹감과 경악이 섞여, 혼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 정도로 압도적인 고수였다.
흑야차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입안을 감돌자 흔들렸던 정신이 차차 안정되어 갔다.
이내 정신을 차린 그가 입을 뗐다.
“……여 호법, 취련(就聯).”
“부르셨는가, 소주.”
“부르셨습니까.”
그의 부름에 굳은 채로 있던 둘이 나직한 목소리를 흘리며, 대답했다.
등을 돌리지 않은 채였다.
평소라면 경을 칠 법한 일.
하지만 천휘를 경계하기 위해 그러한 것임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흑야차의 손이 천천히 들렸다.
소매가 흘러내리며, 새까만 삭으로 이루어진 기묘한 손이 나타난 순간.
“그를 죽인다.”
차가운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한 명령이 떨어질 것을 미리 알았는지 그들은 단숨에 땅을 박차기 시작했다.
둘은 각자 극성의 보법을 펼쳤다.
상대는 고수, 그것도 그저 그런 고수가 아닌 무정도객을 쓰러트린 절세의 고수이지 않은가.
괜히 어중간하게 힘을 아꼈다가는 자신의 목이 달아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초장부터 승부를 볼 생각으로 그들은 전심전력을 펼쳐 갔다.
‘힘을 아낄 여유가 없도다.’
어느새 검을 들어 올린 여운약이 달려들면서, 내공을 모두 발산했다.
그녀의 전신에서 빛이 폭사했다.
성휘(星輝)와도 같이 눈부신 빛을 전신에 휘감은 그녀가 검을 그었다.
기기기긱!
귀를 괴롭히는 불쾌한 소리와 함께 빛의 검격이 대기를 찢어발겼다.
매서운 검격에 지켜보던 이들은 눈을 부릅떴다.
“저, 저것은…….”
“광비검(光飛劍)?!”
누군가가 경악성을 터트렸다.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노파에게 꽂히며, 그들의 눈에 전율이 담겼다.
“그렇다면 저 노파가…….”
단리관천이 끝말을 흘렸다.
흑야차가 데려온 자니 평범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생각한 것보다 더한 거물이 온 것이었다.
“……성휘나찰사!”
지켜보던 이들이 성휘나찰사의 정체를 파악하고, 시끌벅적해져 갔다.
스윽―
그 와중에 천휘는 신경도 안 쓴다는 듯 차분히 옆으로 한 걸음 움직였다.
스쳐 지나간 검격이 담장에 부딪히며, 매서운 폭발음을 일으켰다.
후폭풍에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광비검? 검풍과 검격을 섞었나?’
천휘가 광비검을 파악하려던 그때.
팟!
뒤에서 날카로운 살기가 나타났다.
여인, 취련이 그 틈을 타서 천휘의 뒤를 점한 것이다.
완벽한 기습이었다.
기척을 죽이는 데 뛰어난 무공을 익히기라도 한 것인지, 완벽할 만큼 존재감을 없앤 그녀는 협검(狹劍)을 뾰족하게 세워서 찔렀다.
쐐애애액!
섬광이 번쩍였다.
매섭고 빠른 검초였다.
취련의 눈에 살기가 흘렀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호위 무사가 되기 위해서 키워진 사흑련의 고수.
소주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보다 뛰어난 고수를 상대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녀는 승리했다.
사사영결(邪死永訣).
사흑련주에게 직접 사사한 이 절고의 무공은 몇 단계 위의 고수를 상대로도 승리를 가져와 주었다.
그리고 이번 역시 그러할 터였다.
‘아무리 고수라도 이 거리라면 내 검을 피할 수 없다.’
혼란스러운 사기를 품은 협검이 천휘의 심장을 향해서 나아가던 찰나.
스윽―
그녀의 시선에 천휘의 좌수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반응은 빨랐지만, 그래봤자 이미 늦은 출수일 뿐.’
취련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지금 움직여 봐야 내뻗어진 협검을 막기에는 한참이나 늦었다.
저 손이 자신에게 닿을 때쯤이면 협검이 그의 심장을 뚫은 뒤일 것이다.
그런데 그때.
휙!
천휘의 손이 일순간 사라졌다.
찰나지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와 동시에 천휘의 좌수가 협검을 휘두르던 취련의 손목을 낚아챘다.
완벽한 매화수였다.
“……!”
취련의 눈이 커졌다.
‘이게 어떻게 된…….’
그녀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시뿐이었다.
오랜 시간 수련해 온 그녀는 잡힌 손목을 풀기 위해서, 반사적으로 내공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쓸데없는 짓이야.”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싶더니, 그녀의 신형이 쑥하고 뽑혔다.
천휘가 그녀를 잡아당긴 것이다.
한순간에 지근거리까지 당겨진 그녀의 시야를 천휘가 점령했다.
‘세상에 이런 자가…….’
그녀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끝부분이 살짝 치켜 올라간 눈썹 아래에 무심한 눈빛을 마주한 그녀는 오래전, 잊은 감정을 떠올렸다.
공포.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던 찰나.
후우웅!
매서운 기파가 덮쳐 왔다.
여운약의 손에 들린 검이 휘둘러져, 강렬한 삭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광비검이었다.
검격은 거침없이 돌진했다.
천휘의 손에 취련이 잡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같이 베어 버릴 요량 같았다.
“이야, 그냥 한꺼번에 베려고? 이것 참. 인정사정없는걸. 무섭네.”
말과 달리 천휘가 씩 웃었다.
그러고는 취련을 쏘아지는 검격 쪽으로 털어 내듯이 바로 내던졌다.
“하지만 실수야.”
“……!”
“……!”
검격을 휘둘렀던 여운약과 얼떨결에 그 검격을 맞이하게 된 취련이 당황했다.
그녀는 다급히 협검을 들었다.
그리고 다급하게 내공을 끌어올려, 검격을 향해서 검을 크게 휘둘렀다.
사사영결의 내공이 타올랐다.
영혼까지 불태울 것만 같은 혼란스럽고 뜨거운 공력이 협검을 감쌌고.
콰아아앙!
이내 검파와 직격으로 충돌했다.
협검의 얇은 검신이 충격에 파르르 떨리기를 잠시.
휙!
검파가 화탄처럼 경파의 흔적을 남기며, 하늘로 솟구쳤다.
“큭!”
간신히 쳐 낸 검파에 취련이 미간을 찌푸렸다.
손목이 욱신거렸기 때문이다.
“취련!”
그때 여운약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놀란 그녀가 고개를 돌린 순간, 불현듯 나타난 붉디붉은 매화가 그녀의 시야를 모조리 집어삼켰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그녀가 넋을 놓으며 눈앞의 모습을 보고 있을 때.
스으윽―
은은한 적빛의 광채가 매화들 사이로 드러났다.
그것은 바로 화월의 검신이었다.
푸화학!
핏물이 번지며, 팔이 솟구쳤다.
취련의 눈이 부릅떠졌다.
협검을 쥔 손이 하늘에 나부끼면서 붉은 피를 사방에 흩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으으…….”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마어마한 격통에 절로 입술이 경련했다.
하지만 그녀는 신음을 삼켰다.
‘소주를 지켜야 해!’
흑야차를 힐끗 보며, 정신을 차린 그녀가 우수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팔을 잃은 왼쪽 어깻죽지에 가져다 대더니.
치지직!
삼매진화를 일으켰다.
일시적인 조치였다.
“큭!”
지독한 고통에 그녀는 정신이 아득해졌으나, 참고 감내했다.
피가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불쾌한 악취였다.
“저런 짓을……!”
“저 고통을 참다니, 꿀꺽!”
지켜보던 이들이 아연실색했다.
설마 팔을 잃은 직후, 자신의 어깨를 지질 것이라고 어느 누가 생각했겠는가.
취련의 지독함에 모두가 치를 떨면서 바라볼 무렵.
“판단이 좋아.”
천휘는 칭찬을 입에 담았다.
전쟁에서 사람이 죽는 다양한 이유 중 과다출혈의 경우가 많았다.
그런 와중에 저런 대처는 당연히 훌륭한 것이었다.
“너도.”
천휘가 시선을 돌리며 몸을 회전했다. 암향표를 펼친 그의 몸은 깃털과도 같이 사뿐하게 움직였다.
쐐애애액!
날카로운 검신이 코끝을 스쳤다.
여운약의 기습이었다.
“멸절대에 원한 게 이런 거였어.”
천휘는 검을 휘두른 여운약을 보면서,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가벼운 미소.
하나 그것을 보는 여운약의 얼굴은 굳을 수밖에 없었다.
공간을 축지한 듯한 보법.
그리고 무정도객을 압도한 무위.
모든 것이 그녀의 경각심을 끌어올리는 데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다급히 보법을 멈췄다.
휘이이―
그러자 발을 중심으로 파동이 출렁거리며,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균형이!’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극성으로 펼치던 수연비(水煙飛)를 억지로 멈춘 탓에 그녀의 허벅지와 장딴지가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녀는 고통을 참고, 몸을 회전해서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성휘전륜인(星輝轉輪刃).
단 한 칼로 수십의 무림인들을 몰살시켰던 검이 수십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강호에 다시 강림했다.
눈부신 궤적을 그린 검이 일순간에 천휘의 허리를 향해 쏘아졌다.
새하얀 빛을 뿜어내는 검.
성휘전륜인의 사초식 광검린(光劍燐)은 하얀 도깨비불을 검신에 덧씌웠다.
‘재밌는 검법인데?’
천휘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광검린을 보다가, 화월을 종으로 휘둘렀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화월.
그 속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매화신공의 내력은 이내 매화로 화했다.
‘매화낙락.’
검끝이 아래를 가리키자.
공중에서 하늘거리던 붉은 매화가 여운약의 광검린에 툭 떨어졌다.
도깨비불과 붉은 매화의 만남.
곧 둘 사이의 공간이 깨졌다.
쩌어엉!
이어진 매화낙락을 막아 내던 여운약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모습은 좋지 않았다.
안색은 새하얗고 미간 사이에는 천(川) 모양의 주름이 짙게 잡혀 있었다.
무언가를 참는 모습이었다.
그러길 잠시.
“욱!”
결국 여운약이 한 사발의 피를 바닥에다 토했다.
거무죽죽한 피와 내장 조각.
치명적인 내상임이 분명했다.
크게 토혈을 한 여운약이 이를 악물며, 다시 검을 쥐려고 할 때.
“방심했어.”
흑야차가 쇄도해 갔다.
그는 순식간에 천휘의 품에 파고들었다. 놀랍도록 빠른 보법이었다.
그때 천휘가 미간을 찌푸렸다.
떨쳐 내려면 언제든 떨쳐 낼 수 있었지만, 천휘는 가만히 그를 방치했다.
보법을 펼치는 그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왜인지,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설마?’
뒤늦게 그가 펼치는 기운을 파악해낸 천휘의 눈이 살짝 커질 무렵.
툭.
흑야차의 기나긴 소매가 펄럭거리면서 새까만 삭으로 감싸여진 손바닥이 천휘의 명치에 정확히 닿았다.
처음으로 천휘에게 닿은 한 수.
곧 잿빛의 머리카락이 하늘로 솟구치며, 강렬한 기가 폭발했다.
파아앙!
그에 흑야차의 의복이 부풀었다.
동시에 천휘의 명치에 닿은 흑수에서 흐릿한 원형의 파동이 퍼져 갔다.
내가중수법의 묘리이자, 진체.
단숨에 상대의 속을 파괴하고 폭발시키는 무공이 펼쳐진 것이다.
“멸천화(滅天化).”
흑야차의 묘한 음성과 함께 천휘의 속에서부터 강렬한 폭발이 터졌다.
퍼엉!
흑야차의 눈이 안광을 토했다.
손에서 파동이 아주 명확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정확하게 꽂혔다.
즉사에 이를 완벽한 공격이었다.
그런데.
“……너 뭐야?”
의아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흑야차가 당혹감을 드러내면서 고개를 들었다.
천휘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멸천화에 당했음에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모습에 흑야차는 당황했다.
믿을 수 없었다.
멸천화는 사부님께 사사한 수법으로 그 위력이 천하 일절이거늘…….
‘……정통으로 맞았음에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다니.’
천휘를 확인한 눈빛이 경악에 휩쓸릴 무렵.
“네가 왜…….”
천휘가 입을 달싹이다, 멈췄다.
그리고 뒤이어서 더욱 경악스럽고, 충격적인 말이 흑야차의 귓가에, 아니 뇌리에 벼락처럼 내리쳤다.
『……멸문한 항(項) 가의 귀혼마경(鬼魂魔經)을 익히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