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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천마-276화 (276/391)

276화

흑색으로 무장한 전신과 얼굴에 착 달라붙게 쓴 야차 가면.

괴이한 모습이었다.

어쩌면 우스꽝스러울 법도 했다.

하지만 장원에 있는 그 누구도 그의 행색을 비웃지 않았다.

어찌 비웃겠는가.

강호에, 천하에 야차의 가면을 착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자는 오직 한 명뿐이지 않나.

“……흑야차.”

무홍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만이 아니었다.

장원에 있는 멸절대원 모두 잇새 사이로 침음성을 흘리며, 움직임을 멈췄다.

흑야차란 이름은 가볍지 않았다.

천하 삼대 후기지수 중 한 명.

사흑련주가 지닌 재능만을 보고 직접 제자로 받아들였을 정도로 출중한 지고의 천재.

온갖 찬사가 그를 지칭했다.

“도착하려면 시간이 걸린다고 들었는데…… 벌써 도착이라니.”

“상정 외의 일이야.”

멸절대원들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천휘가 혈우검가주, 패혈검을 쓰러트리고 거의 승기를 잡아가던 중이었다.

하나 지금 흑야차와 그 일행의 등장으로 전장에는 새로운 국면이 펼쳐졌다.

한편 주변에 깊게 가라앉은 긴장감과 무관하게 천휘는 흑야차를 구경이라도 하듯이 여유로운 시선으로 훑어봤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날씨가 추워졌다지만, 너무 꽁꽁 싸맨 거 아냐? 안 덥나?’

흑야차를 본 첫 감상이었다.

체격보다 더 큰 피풍의.

거기에다가 그의 목과 소매 사이로 보였던 손마저 새까만 삭으로 세밀하게 꼬아진 천이 가리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답답하네.’

천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세히 보니 가면으로 채 가리지 못한 귀와 뺨 또한 완벽히 가려져 있지 않은가.

아마 전신을 가린 듯했다.

‘살갗을 보이기 싫은 건가?’

순간 천휘의 눈에 빛이 반짝였다.

대체 뭘 숨기고 싶어하기에 기이할 만큼 천으로 온몸을 가리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스윽―

야차가, 그의 가면이 움직였다.

그 가면이 향한 곳은 천휘가 있는 방향이었다.

곧 가면에 뚫린 두 개의 구멍에서 섬뜩한 시퍼런 광망이 흘러나오더니.

“감탄스러운 검이었어.”

불쾌한 음성이 장원에 내려앉았다.

듣는 것만으로도 섬뜩함이 느껴지는 괴이한 목소리에 장원에 있던 이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져 있었다.

사내일지, 여인일지.

무슨 무학을 익힌 것인지.

그 무엇도 파악할 수 없었다.

불가해의 영역에 있는 자처럼 모든 것이 안개가 낀 듯 불투명하게 느껴지는 자였다.

그런 불가사의함에 장원 내 시선이 한순간에 집중되었다.

하지만 흑야차는 그런 시선은 조금도 신경을 안 쓰는 듯했다.

오직 천휘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연배에 그러한 무공이라니.”

야차의 눈이 광망을 토했다.

섬뜩하고, 상대를 위축되게 만드는 기세였다.

곧 흑야차의 발밑에서부터 발생한 사이한 기운이 그를 중심으로 폭사했다.

한순간에 장원에 폭풍이 몰아쳤다.

사기의 폭풍에 장원에 있던 이들은 다급하게 내공을 끌어올렸지만.

“큭!”

“헙!”

충격을 모두 해소하기는 힘들었다.

게다가 현재 장원을 짓누르는 사기의 밀도 역시 엄청나, 반항조차 힘들었다.

화아악!

흑야차의 잿빛 머리칼이 솟구쳤다.

야차의 가면이 진짜 야차로 변하는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그때.

“바람이 너무 거친데?”

천휘가 태평하게 말했다.

그는 사기의 폭풍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화월을 들었다.

곧이어 화월이 흐릿해지고.

번쩍!

눈부신 검광이 터졌다.

흐릿했던 화월이 한순간에 빛살처럼 휘둘러지며, 가로로 선을 그렸다.

하늘과 땅을 가르는 하나의 검흔.

순간 장원의 대기가 범람하는 강처럼 격랑을 일으켰다.

곧게 쏘아진 검격은 흑야차의 허리춤을 향해서 나아갔다.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검격은 이내 그가 풍기는 사기와 부딪쳤고.

쩌저적!

사기는 처참하게 갈라졌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

오연하게 턱을 치켜든 채 주변을 내려다보던 흑야차의 눈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 눈빛에 당혹감은 없었다.

이미 예상하던 바인 것처럼.

그리고 그때.

휙!

검은 그림자가 중간에 난입했다.

콰아아앙!

폭발음이 터지며 자욱한 먼지가 일던 찰나.

훅!

먼지를 뚫고, 그림자가 달려들었다.

흑야차와 함께 장원에 도착했던 일행 중 패기를 풍기던 중년인이었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도가 한 자루 들려 있었다.

새까만 묵빛이 감도는 거도였다.

힘이 좋은걸.

천휘는 바로 진각을 밟았다.

가죽신 끝이 흙에 닿는다 느껴진 순간, 그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졌다.

곧이어 화월이 솟구쳤다.

‘매화낙섬(梅花落暹).’

생각은 곧장 검으로 화했다.

화월은 마치 용오름과 같은 움직임으로 단숨에 중년인의 도와 정면으로 부딪치며, 큰 충격파를 터트렸다.

쩌어어억!

도와 검이 부딪친 공간이 일그러지고, 그 충격이 파동처럼 퍼져 갔다.

털썩―

내공을 끌어올리며 흑야차의 사기를 막던 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파동에 휩쓸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패혈검과 천휘의 대련도 그들에게는 절대자들의 싸움으로 보였건만, 지금의 싸움은 그보다 더 위에 있었다.

‘이런 괴물이 존재하다니!’

중년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누구인가.

십 년 전 무극지경의 고수가 되어 무정도객(無情刀客)이라는 별호로 강호 곳곳에 이름을 떨쳐 왔다.

그로 인해 사흑련에서 직접 호법으로 초빙했었을 정도였다.

그만큼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거늘…….

이제 막 약관을 넘은 듯한 청년 도사에게 도가 틀어막혔으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매화신협, 매화신협하더니…….’

무정도객의 의복이 부풀어 올랐다.

어린 시절부터 익혀 온 무량공(無量功)이 전신을 휘감더니 이내 폭사했다.

화아아악!

그 강렬한 공력의 파동에 소매가 바스러지고 맨살이 드러났다.

한껏 부푼 근육에는 힘줄이 선명하게 돋아나 있었고, 손과 도에서는 흉흉한 패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흘러나온 패기가 와류처럼 도에 몰렸다.

그 속에서 그의 도는 더욱 강렬한 패기를 휘감으며, 힘을 보충했다.

말 그대로 패력(敗力)이…….

모든 것을 깨부술 힘이 실렸다.

극한의 무를 넘어 천무(天武)를 엿본 자들이 풍기는 기의 파동이었다.

‘공력이 상당해.’

이를 본 천휘는 싱긋 웃었다.

화월과 마주한 도에서 느껴진 도기는 아주 상당했다.

무극지경에서도 상위.

방금 전 부딪쳤던 패혈검보다 확실히 우위의 고수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천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검신을 흘렸다.

이화접목의 수였다.

도가 이화접목의 수에 이끌려 화월의 검신을 따라 흘러내리기를 잠시.

“어딜 감히!”

무정도객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공기를 진동시키며, 강렬한 바람을 일으켰다.

동시에 그의 근육이 크게 부풀었고.

우두둑―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화접목을 힘으로 받아내려다 보니, 근육이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하지만 무정도객은 멈추지 않았다.

“네 뜻대로 될 것 같으냐!”

버럭 소리친 무정도객이 거침없이 발을 놀렸다.

돌연 그의 신형이 흐릿해진다 싶더니, 단숨에 거리를 바짝 좁혀 왔다.

회류현현(回流顯現).

그가 익힌 독문 보법으로 회피와 공격의 묘리가 담긴 것이었다.

그로 인해 둘은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숨을 내쉬면 그 콧김이 닿을 정도로 아주 가까운 거리까지.

검법과 도법을 펼치기 애매할 만큼 짧은 거리에서 무정도객은…….

화악!

불현듯 허리를 뒤틀었다.

유연하고, 빠른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좌수를 뻗어 냈다.

허리의 움직임과 함께 휘둘러진 절묘한 수법이었다.

활짝 펼쳐진 손바닥에서 강렬한 패기가 줄기줄기 뻗어지고 있었다.

마치 암뇌(暗雷)와도 같이.

‘반응이 빨라.’

천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보통 도객이라 함은 수법을 사용하기보다, 도법에 모든 걸 기울였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수법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영악한걸. 거리를 좁혀 검을 휘두르는 걸 통제하고, 수법으로 승부를 보다니, 꽤 한단 말이지.’

천휘는 정확히 관자놀이를 향해 휘둘러진 손바닥을 보며, 허리를 슬쩍 뒤로 젖혀 아슬아슬하게 피해 냈다.

후우웅!

코끝에서 매서운 바람이 몰아쳤다.

뒤늦게 머리카락이 하늘을 향해 솟구칠 무렵, 천휘가 발을 뒤로 뺐다.

스윽―

그와 동시에 암향표를 펼친 천휘는 내디뎠던 발걸음을 비틀었다.

그러자 몸이 한 바퀴 회전했다.

검무라도 추는 것처럼 화려한 몸짓에 도복이 크게 펄럭였고 그 사이로 매끈한 검신의 화월이 선을 그렸다.

아름다운 회선(回旋).

휘둘러진 검신의 뒤를 붉은 적빛이 따르며, 화려한 궤적을 그렸다.

찰나지간에 이루어진 완벽한 반격.

천휘의 눈이 무정도객을 향했다.

화가 난 듯 일그러져 있던 그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고, 눈 또한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부릅떠져 있었다.

그리고.

스르륵―

다급하게 막는다고 들어 올린 좌수가 느릿하게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느려.’

화월이 완전히 들어 올리지 못한 무정도객의 왼팔 손등을 푹 찔렀다.

이윽고 살갗에 박힌 화월이 어깻죽지까지 시원하게 치솟으며 가르고.

촤아악―

피가 솟구쳤다.

“큭!”

무정도객이 신음을 흘렸다.

그는 재빠르게 왼팔을 바라봤다.

어깻죽지부터 쭉 이어진 검상은 어찌나 깊은지 새하얀 뼈가 보일 정도였다.

치명상이었다.

무정도객은 좌수에서부터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까득―

그가 이를 갈았다.

왼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손가락 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며 발아래에 피의 웅덩이를 만들 때 즈음.

“아직 안 끝났어.”

담담한 목소리가 귀를 두드리고.

“……!”

이어서 그의 시야에 검신이 들어왔다.

무정도객은 정신을 차리며 회류현현을 펼친 뒤, 온 공력을 실어서 도를 휘둘렀다.

파아앙!

두꺼운 근육에서 나오는 묵직한 힘으로 휘둘러진 도는 공기를 짓이기며, 아래로 내리쳐졌다.

중(重)의 묘리.

휘둘러진 도에서 지독한 강기가 흘러나오며, 경기의 돌풍을 일으켰다.

순간 횡으로 휘둘러진 검과 종으로 휘둘러진 도가 허공에서 충돌했다.

쩌저저적!

둘 사이의 공간이 일그러졌다.

압도적인 강기의 충돌에 대기가 버티지 못한 탓이었다.

그때.

주르륵―

무정도객의 악다문 입술에서 한 줄기의 가는 피가 흘러내렸다.

내상이었다.

그의 눈동자에 절망이 깃들었다.

얼핏 보기에는 잘 받아 낸 것 같았지만,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뒤쪽으로 향했다.

흑야차를 향해서였다.

‘도망쳐야…….’

그가 속으로 생각을 중얼거릴 때.

챙강!

화월이 도를 갈라 냄과 동시에.

스걱!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횡으로 휘둘러진 화월이 무정도객이 휘두른 도째로 베어 내며 그의 목까지 잘라 낸 것이다.

쿠구궁―

뒤늦은 충격파가 대지를 울렸다.

그리고 그 위 하늘에선 수급과 함께 시뻘건 핏물이 아로새겨졌다.

그리고 그사이.

천휘는 검을 늘어트리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 묘한 기파가 흘러나와, 사방을 천천히 잠식해 갔다.

매화신공의 발현.

천하 모든 기운의 뿌리인 자연지기를 휘감은 공력이 이 순간 세상에 적막을 강제하며, 그렇게 강림했다.

경외감을 부르는 모습.

모두가 넋을 잃고 천휘를 바라보았다.

이미 죽은 무정도객은 더 이상 그들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천휘만이 존재했다.

이 세상에 홀로 있다는 듯.

고고하면서, 압도적인 존재.

그때.

훅―

불현듯 천휘의 신형이 사라졌다.

촛불이 꺼지듯, 환상과도 같았다.

암향표를 펼친 천휘는 아직 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흑야차와 그 일행에게 달라붙으며, 검을 휘둘렀다.

“이제 너희 차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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