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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천마-271화 (271/391)

271화

“적호채주는 어찌 되었습니까?”

“죽었죠.”

“남은 잔당들은 어떻게…….”

단순한 보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시시콜콜한 문답이 오고 갔다.

그렇게 약 이 각가량의 시간이 지나고.

탁.

설검이 손에 든 붓을 내려놓았다.

채 묵이 마르지 않은 종이를 바라보는 그가 작게 입꼬리를 올렸다.

만족감이 어린 은은한 미소였다.

“고생하셨습니다.”

나직이 말한 그는 빼곡하게 글씨가 적힌 종이를 한쪽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천휘를 응시했다.

맞은편에 앉은 천휘는 상당히 귀찮아하는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큰 의미 없는 형식적인 질문과 대답.

그것을 계속 반복하지 않았는가.

설검은 그런 천휘의 속내를 모른 척하며 그를 응시한 채 물었다.

“다음 출정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십니까?”

“한 사나흘 정도는 쉬고 다시 나갈 생각인데.”

천휘가 말과 함께 멸절대원들을 떠올렸다.

그들의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

많은 인원이 자상과 내상을 입은 상태. 거기에 첫 실전의 충격이 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치료도 치료지만, 일단 마음을 추슬러야겠지.’

마음을 다잡을 시간이 필요했다.

“흠, 사나흘이라…….”

설검이 섭선을 잡고, 꼼지락거렸다.

한시가 바쁜 전시 상황이었다.

그 와중 사나흘은 꽤 길었다.

특히나 옥기린의 별동대가 아직 정비되지도 않은 현 상황에서는 천휘와 멸절대의 힘이 더더욱 필요했다.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멸절대의 운용 권한은 자신이 아니라 바로 앞에 있는 천휘에게 있었으니까.

“알겠습니다.”

촤악!

설검이 섭선을 활짝 펼쳤다.

섭선에 그려진 한 폭의 묵화가 드러나고, 그 위로 눈초리가 휘어졌다.

“그보다 멸절대원들의 치료는 어찌하실 요량이신지요. 의방에 방문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의원을 따로 전각에 보내드릴까요?”

설검의 질문에 천휘는 뭔 당연한 걸 묻냐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야 오는 게 편하죠.”

“그러면 의방에 따로 언질을 전해 두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설검이 섭선을 탁하고, 접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 주십시오.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빠르게 준비하겠습니다.”

“오호, 그래요?”

천휘가 설검을 보며, 씩 웃었다.

어쭈. 욕심 그득한 것 봐라.

그의 속내가 훤히 보였다.

아니, 애초에 감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야…….’

천휘는 야망으로 눈을 반짝이는 설검을 보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상대가 자신을 이용하려고 하는데 그냥 넘어갈 수야 있겠나.

반대로 탈탈 털어먹을 생각이었다.

곧바로 천휘가 입을 움직였다.

“그럼 일단 내상약과 금창약이 필요하고 날씨가 꽤 추워졌으니 피풍의랑…….”

그는 준비할 물건들을 줄줄 쏟아 냈다.

꼭 필요한 것들은 물론이고 평상시 사용하지 않더라도 만일을 대비해 있었으면 하는 것들까지, 전부.

“그리고 소금도 있으면 좋겠어요. 직접 음식을 하는 것이 좋을 테니…….”

마치 폭포수처럼 끝이 없는 요구의 향연에 설검이 아연실색할 때.

“……면 되겠네요.”

드디어 천휘가 말을 끝마쳤다.

“하, 하하. 참 많군요.”

천휘가 준비해 달라는 물건을 뇌리에 새긴 설검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천휘는 그런 그의 반응에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에이, 목숨이 오고 가는데 이왕이면 철저하게 준비해야죠.”

말을 마친 천휘는 슬쩍 창밖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어차피 이 정도는 준비해 줄 수 있잖아요? 그거 다 해 봐야 저 짝에 다른 별동대보다 돈도 안 드는데.”

설검이 천휘가 바라본 창밖을 바라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해 달라는 물건이 많긴 했지만, 그렇다고 마련하는 게 어렵지도 않았다.

멸절대의 인원은 천휘를 합쳐도 봐야 고작 사십삼 명밖에 되지 않으니.

오백 명 정원을 채우려고 하는 옥기린의 별동대에 비교하면 수월할 터였다.

‘이 정도면 싸게 먹히는 거지. 하지만 그보다…….’

설검의 눈빛이 침중해졌다.

그가 부탁한 물건은 하나같이 이번의 습격 작전에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심지어 이러한 일을 직접 해 보지 않았으면 모를 물건도 있었다.

‘이런 일을 해 본 적이 있는 건가?’

그가 의문을 품고 생각에 빠져들려는 찰나.

“언제까지 준비할 수 있죠?”

천휘가 툭 말을 던졌다.

“이왕이면 빨랐으면 좋겠는데.”

이어지는 말에 설검은 생각의 방향을 바꿔 머리를 굴리며 대략적인 시간을 추측했다.

“이틀이면 될 것 같습니다.”

최대한 짜내고, 짜낸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틀이나 걸려요?”

천휘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그렇게 오래 걸려?’

전생의 천마신교에서는 이런 물건은 말하는 즉시 바로 눈앞에 대령해 오곤 했었다.

‘쯧쯧쯧, 태평하네. 태평해.’

속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은 그는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나.”

그 말을 끝으로 천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 보죠.”

“조심히 가십시오.”

이번에는 설검도 잡지 않고 인사를 건네는 그때 천휘가 슬쩍 지붕을 봤다.

그러고는 피식 웃었다.

“그 쥐새끼는 도망갔나 보네요.”

“…….”

그 말에 설검이 침묵에 잠기고.

“그럼 다음에 보죠.”

천휘는 답을 바란 게 아니라는 듯 그대로 방을 빠져나왔다.

이내 전각에서 완전히 벗어난 천휘는 호롱불이 일렁거리는 방을 바라봤다.

‘참 귀찮게 한단 말이지.’

주시하는 그의 눈동자가 겨울밤 공기보다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래도 군사란 건가. 세작과 끈이 있는 놈을 내 전담으로 맡기다니, 머리 좀 썼는걸.’

군사를 떠올리던 천휘는 호롱불이 꺼지며 어둠에 잠식되는 방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거두고 발길을 옮겼다.

* * *

이튿날 아침.

모처럼 숙면을 취한 천휘는 침상에서 일어나, 닫힌 창문을 열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스며 들어오고.

스으으―

반대되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완연한 겨울 날씨.

아직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바람은 지금 계절을 증명하듯, 매우 차가웠다.

그때였다.

“하압!”

“합!”

힘찬 기합 소리가 크게 울렸다.

천휘는 밑을 내려다봤다.

잡초가 자라난 정원에서 멸절대원들 모두가 열심히 수련하고 있었다.

이른 새벽부터 수련한 것일까.

그들이 걸친 무복과 머리카락은 이미 땀으로 범벅되어, 푹 젖어 있었다.

천휘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정신 좀 바짝 차렸나.’

잠시 그들을 보던 천휘는 창에서 눈을 떼고 자기 전 방의 한쪽에 걸어 둔 도복을 걸쳐 입었다.

그리고 두 자루의 검을 챙겼다.

이후 바로 방문을 빠져나왔다.

고요한 전각에 걸음을 내딛는 천휘의 발걸음 소리만이 크게 울렸다.

그리고 잠시 후 정원에 도착한 천휘가 그들을 보며, 입을 달싹였다.

“웬일로 아침부터 수련이죠?”

“대주님!”

“기침하셨습니까.”

몇몇 이들이 천휘에게 인사를 건넸고, 동시에 몇몇 이들은 목을 움츠렸다.

‘아직도 쫄아 있네.’

천휘는 두려움에 질린 그들을 힐끗 보다가 고개를 돌리며, 입을 뗐다.

“다들 불안한가 보네요.”

모두의 몸이 순간 덜컹거렸다.

정곡을 찔린 탓이었다.

‘몸이 편해지니, 떠올랐겠지.’

그들이 이렇게 새벽부터 밖으로 나온 이유는 간단했다.

몸이 피곤할 때는 첫 실전을 떠올릴 만한 여유가 없었지만, 돌아와 치료를 받으며 휴식을 취하고 나니 머리가 복잡했으리라.

“뭐,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무작정 휘두르는 것이 좋기는 한데…… 너무 비효율적이네요.”

천휘는 그들을 지그시 훑어봤다.

“제가 수련을 도와주죠.”

말과 함께 그가 검지를 까딱였다.

“와요.”

명백한 도발.

하지만 움직이는 자는 없었다.

이미 그들은 천휘의 무위를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모두 엉거주춤 서 있을 때.

타앗!

마음을 다잡고 달려드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단리관천과 호광개 그리고 무홍이었다.

‘이런 기회는 없어.’

‘매화신협과 손속을 나누다니, 이보다 더 좋은 건 없지!’

‘그의 무위를…….’

그들의 눈에 승부욕이 떠올랐다.

“좋네요.”

천휘가 마음에 든다는 듯 말했다.

호승심이 없다면 무인의 성장은 거기에서 멈추고 말 일.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달려드는 이 세 명과 같은 자세여야만 했다.

단리관천이 목도를 꽉 쥐었다.

‘일도, 단 일도에 모든 걸 건다.’

그의 생각이 하단전에 전해지며 대라신공의 내공이 불처럼 들끓었다.

한순간에 퍼지는 새하얀 증기.

그의 혈맥을 대주천하던 대라신공의 내공이 전신에 퍼져 갔다.

이윽고 그의 하체에 내공이 움직이며.

콰드득―

근육이 비명을 내질렀다.

과도한 대라신공의 내공은 허벅지와 종아리를 한껏 부풀게 했다.

그 때문일까.

적호채주에게 당했던 옆구리에 격통이 찾아옴과 동시에 그나마 안정되었던 내상이 도진 듯, 기혈이 불안정한 흐름을 보였다.

하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승부를 봐야 했다.

단 일도에.

부운약표를 펼치며 나아가던 단리관천은 천휘와 단 사 장의 거리를 앞두고, 왼발을 크게 내디뎠다.

쿵.

거친 진각에 먼지가 일었다.

그와 동시에 단리관천의 상체가 쓰러질 것처럼 앞으로 크게 기울어졌다.

그 순간 그의 우수가 사라졌다.

너무도 빠른 움직임에 마치 사라진 것 같은 환각을 부른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번쩍!

눈부신 빛살이 허공을 갈랐다.

능풍도법 제삼 식 풍뢰도(風雷刀).

바람을 가르는 우레처럼 나타난 도는 단숨에 천휘의 목을 노렸다.

대련이라기엔 위험하고, 강렬한 살기가 실린 도법이었다.

‘닿아라!’

단리관천이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그때.

스윽―

앞을 응시하고 있었던 천휘의 눈동자가 밑으로 뚝 떨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콰앙!

그의 시야가 암전되었다.

“좋은 공격이기는 했는데, 너무 뒤가 없는걸.”

단리관천의 머리를 잡아서 땅에 박아 넣은 천휘가 말과 함께 슬쩍 고개를 틀었다.

휙!

날카로운 목검이 스쳐 지나갔다.

천휘는 목검을 휘두른 무홍을 가만히 응시한 채 입을 움직였다.

“너무 늦은 거 아니에요? 휘두를 거면 동시에 해야 하는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에서 호광개가 불쑥 나타나, 손을 뻗었다.

백결신장.

개방의 장법은 빈틈이 훤히 드러난 천휘의 등을 정확하게 노렸다.

이윽고 장이 등에 닿는 순간.

‘성공…….’

호광개가 숨을 삼켰다.

손이 그대로 천휘를 통과한 탓이었다.

“이형환위?!”

그가 외치는 순간.

“방금 건 괜찮았어요.”

바로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호광개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천휘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왼 손바닥을 뻗고 있었다.

“하지만 기습을 하려면 이렇게 기척도 숨겼어야죠.”

퍼억!

호광개의 허리가 낫처럼 꺾였다.

“컥!”

허리춤을 손으로 감싼 호광개가 뒤로 물러날 때.

퍼억!

잇따른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무홍에게 섬전처럼 빠르게 달라붙은 천휘가 목검을 들고 있었다.

“……어, 언제?!”

무홍은 식겁했다.

자신의 손에 들렸었던 목검이 쥐도 새도 모르게 천휘의 손에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나 빠른지 만약 보지 못했다면 자신의 목검이 뺏긴 지도 모를 정도였다.

“전번에 봤던 검법이 이거였었나.”

말하던 천휘가 목검을 휘둘렀다.

“무슨!”

그걸 본 무홍은 넋을 놓았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그가 익힌 검법, 구상검법이었다.

“무공에서 중요한 것은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체득하는 것.”

천휘의 말이 그의 귀를 맴돌았다.

그리고 그 순간.

“무공에 휩쓸리지 말고, 자신의 방식대로 물들여요. 이런 식으로.”

말과 함께 그가 알던 구상검법이 아닌 새로운 검법이 나타났다.

‘이건…….’

무홍이 몽롱한 눈으로 천휘의 손에서 펼쳐지는 검법을 바라보고 있던 그 순간.

퍽!

그의 머리에 통증이 찾아왔다.

천휘는 그대로 기절한 무홍을 바라보며, 목검을 어깨에 걸쳤다.

그 뒤 굳어 있는 멸절대원들을 한 명씩 응시하며, 검지를 쭉 뻗어서는 여유롭게 다시 까딱였다.

“자, 그럼 다른 사람들도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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