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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천마-269화 (269/391)

269화

혈우 속에서 자신들을 쳐다보는 천휘를 마주한 별동대원들은 석상처럼 굳었다.

섬뜩한 광경이었다.

하나 동시에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몽환적이고, 압도적이었다.

그들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

지금의 분위기에 압도된 탓이었다.

그렇게 그들이 숨을 죽인 채 천휘만 보고 있기를 잠시.

쿵.

반으로 잘린 시체들이 땅으로 떨어지며, 내리던 혈우가 차차 멎어 갔다.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별동대의 시선은 천휘에게 꽂힌 채 움직일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놀라운 모습이었다.

분명 혈우를 뒤집어썼건만, 그의 전신에는 피 묻은 흔적이 조금도 없었다.

아예 처음과 같았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호신강기(護身罡氣).

고절한 무위와 깊은 내공 없이는 펼칠 수 없는 놀라운 기예였다.

‘……괴물이군.’

호광개가 혀를 내둘렀다.

‘그래도 후기지수 중에는 꽤 뛰어난 편이라고 자신했는데, 설마 아무것도 보지 못할 줄이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조차 안 됐다.

그저 검광이 번쩍인다 싶더니 습격자들이 반으로 갈라지며 죽어 간 게 끝이었다.

신속(神速)에 다다른 쾌검(快劍).

‘실력 차이가 너무 커.’

호광개는 고개를 흔들었다.

매화신협은 자신이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괜히 방주님께서 눈여겨보시는 것이 아니었나.’

그의 눈이 실처럼 가늘어졌다.

실제로 본 매화신협의 무위는 소문으로 듣고 예상한 바를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하, 방주님께서 매화신협의 명령은 무조건 따르라고 하셨는데…….’

용주개가 신신당부했던 말을 떠올리던 그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일각 안에 처리하라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미 대원들은 반 시진 동안이나 녹림도들을 상대로 포위도 제대로 뚫지 못하고 지지부진했었다.

그런데 고작 일각 안에 처리라니.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내공을 끌어 올렸다.

어쨌든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는가.

탓!

곧바로 호광개가 땅을 박찼다.

평소라면 다른 별동대원들을 다독인 후, 함께 명령을 수행하도록 이끌었을 테지만…….

지금은 시간을 지체할 틈이 없었다.

서둘러 명령을 완수해야만 했다.

급한 마음으로 개방의 기초 보법, 연쌍비(燕雙飛)를 펼친 그는 천휘의 신위에 충격을 받은 녹림도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장을 내질렀다.

백결신장(百結神掌)은 넋 놓고 있던 녹림도의 가슴에 정확히 박혔다.

우두둑!

“컥!”

백결공(百結功)의 내력이 담긴 백결신장의 일격에 녹림도의 가슴뼈가 함몰되며, 입에서 꺼먼 피를 토했다.

‘빨리 처리해야 해!’

천휘가 지정한 시간으로 인해 압박감을 느끼며, 당장에 코끝을 자극하는 혈향과 분위기에 물든 그는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초삼!”

“이 거지 놈이!”

동료가 죽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녹림도들이 호광개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이 살기를 내풍겼다.

전이었으면, 당황했을 만큼 지독한 살기.

하지만 왜인지 호광개는 그들이 풍기는 살기가 약하다고 느꼈다.

‘방금 전 일 때문인가?’

호광개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들의 살기가 약해진 것이 아니었다.

천휘의 강렬한 존재감을 겪은 그에게 이제 녹림도들의 살의는 한없이 약하게 느껴질 만큼 자극을 주지 못할 뿐이었다.

압박감이 다른 녹림도들의 공격에 한차례 웃은 호광개가 진각을 밟았다.

쿵!

그리고 아까 전에는 차마 펼치지 못했던 무공을 뽐내기 시작했다.

백결신장, 회선권(回旋拳) 등.

“컥!”

그가 펼치는 무공 한 번 한 번에 녹림도들이 뒤로 나가떨어지며, 명을 달리했다.

그렇게 호광개가 활약을 선보이자.

꽈악―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 있던 별동대원들이 눈치를 보듯 서로를 바라보더니, 이내 땅을 거칠게 박찼다.

“후우.”

충격을 받았던 임하율 또한 정신을 차리기 위해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며, 떨리는 손으로 검을 파지했다.

상처를 입은 손이 아직 아팠다.

하지만 그녀는 고통을 감내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를 기회였다.

한데 이걸 이대로 놓칠 순 없었다.

그녀는 남은 내공을 모조리 끌어올리며, 녹림도들에게 달려들었다.

‘활약을 선보여야 해.’

굳은 결심을 다진 임하율이 마지막으로 전장을 향해 달려가자.

탁.

침묵 가운데 지켜보던 천휘가 화월을 남겁했다.

이어서 그는 녹림도들을 상대로 죽을 듯이 달려드는 별동대원을 주시하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내비쳤다.

“그나마 좀 낫네.”

시간의 압박과 활약을 펼쳐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 때문일까.

아까 전까지 엉거주춤하기만 하던 그들의 모습이 조금씩 바뀌어 갔다.

신속하고,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게.

물론 아직 부족한 것은 많았다.

그래도 조금 전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모습과 비교하면 훨씬 나았다.

그때.

“……혹 이것도 시험인 것이오?”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돌려 보니 단리관천이 옆구리를 감싼 채로 천휘를 보고 있었다.

아직도 고통이 심한지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지만, 천휘를 바라보는 눈빛 하나만큼은 형형하게 빛났다.

천휘는 그런 그를 마주 보며 웃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일부러 그런 분위기를 만들고 시간 압박을 준 것 같소만…….”

단리관천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천휘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저것을 물어본다는 것은 와중에도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뜻이니.

천휘의 입매가 천천히 비틀렸다.

“역시나 눈치가 좋네요.”

단리관천의 말대로였다.

일부러 강렬한 존재감을 흘려 압박하며, 그들을 심적으로 몰아붙였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코끝을 간질이는 짙은 혈향은 그들을 자극했을 것이고, 도륙 난 시체들이 온실 속 화초인 그들의 마음을 흔들었을 터다.

“맞아요.”

전장을 둘러보며 시원하게 답한 천휘는 별동대원들을 한 명씩 훑었다.

“이건 시험이죠.”

뚝 끊는 대답에 단리관천은 더 물어보려다,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 이후 그는 천휘를 따라서 시선을 옮겨, 별동대원들을 바라봤다.

‘다른 사람이 된 것 같군.’

어느새 별동대원들의 기세는 이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바뀐 것은 다름이 아니라, 천휘의 존재감 덕분이었다.

‘지독한 압박감이었어.’

그는 조금 전 광경을 떠올렸다.

혈우 속 대원들을 쳐다보는 천휘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었다.

기이하고, 몽환적인…….

말로 표현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강렬한 분위기는 단숨에 별동대를 휘어잡았다.

‘괜히 소문이 퍼진 게 아니었나.’

그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거렸다.

삼단 사대 중 어떠한 곳에도 무난히 들어갈 수 있는 실력자인 단리관천이다.

하지만 그는 일부러 별동대를 골랐다.

큰 위명을 떨치는 매화신협이라는 자를 직접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는 뼈저리게 느꼈다.

소문은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직접 겪어 보니 과소평가된 것 같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였다.

“그런데 그쪽은 언제 갈 거죠?”

천휘가 단리관천을 보며 말했다.

“이제 몸도 괜찮으면서.”

그 말에 단리관천이 눈썹을 찡그렸다.

몸은 괜찮아졌지만, 아직 내상은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아직 내상이…….”

“네? 그래서 쉬겠다고요?”

천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내상을 당했다고 하면 적이 아이고야, 내상 입었으니 건들면 안 되겠구나 하면서 그냥 봐주나 보죠?”

“…….”

단리관천이 입을 다물었다.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천휘는 입을 꾹 다문 단리관천을 내려다보며, 다시 입을 달싹였다.

“시간 없으니 얼른 가요.”

수긍한 단리관천이 발을 움직였다.

이내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된 천휘는 팔짱을 끼며, 전황을 지켜봤다.

단리관천이 가세한 덕분일까.

“세류도 소협!”

“소협이 돕는다면…….”

별동대의 기세가 더욱 올랐다.

그에 반해 녹림도들의 기세는 땅으로 떨어지듯 계속 하락하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단리관천이 여기 있다는 것은 적호채주가 패배를 했다는 뜻이었으니.

“이러면 곧 끝나겠는걸.”

천휘는 작게 중얼거렸다.

생사를 가르는 싸움과 전쟁에서 기세는 큰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지금 전황은 기울고 있었다.

아주 가파르게.

“아쉽지만, 일단 처음이니 이 정도로 넘어가는 것도 좋겠어.”

* * *

약속된 일각의 시간이 흘렀다.

팔짱을 낀 천휘는 숨을 가쁘게 들이쉬었다 내쉬는 별동대원들을 봤다.

그들의 모습은 처참했다.

전신에는 자상이 가득했고, 얼굴에는 채 가시지 않은 충격이 남아 있었다.

“흠, 아슬아슬하지만.”

천휘는 말과 함께 주변을 봤다.

녹림도들 절반은 시체가 되어 있었고, 남은 절반은 포박되어 있었다.

단리관천이 가세하자, 이미 패배를 직감하고 있던 녹림도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항복을 선언한 것이다.

“어찌 됐든 일단 소탕한 것 맞으니, 넘어가죠.”

별동대원들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끝났나.”

“다행이군.”

천휘는 안도하며 기뻐하는 그들을 보더니, 옅은 조소를 머금었다.

“그보다 제대로 실전을 겪어 보니까, 어때요?”

별동대원들의 표정이 굳었다.

실전은 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살의를 풍기며 달려드는 녹림도들의 공격은 매서웠으며, 그로 인해서 압도당한 그들은 초반엔 제대로 된 무공조차 펼치지 못하고 밀리기만 했었다.

실력 차이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만약 단리관천이 합류하지 않았더라면 승리조차 점지할 수 없었다.

천휘가 입술을 깨물며 침묵하는 그들을 주시한 채, 말을 덧붙였다.

“이제부터 이런 실전은 자주 겪을 거예요. 아니, 이건 오히려 약과겠네요. 다음부터 만날 적들은 이런 어중이떠중이들과 다를 테니.”

적호채는 녹림에서도 외진 산채.

이제부터 최전방에서 만나게 될 사흑련의 문파와는 그 격이 달랐다.

“다행히 오늘은 운 좋게 모두 살아남았지만, 다음 임무에도 오늘처럼 손속에 사정을 두었다가는 아마 여기서 몇 명은 죽을 수도 있겠네요.”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하나 그걸 듣는 별동대원들은 하나같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실전은 지금껏 그들이 해 온 수련과 전혀 달랐다.

높은 무위를 지녔다고 해도 빈틈을 보이거나, 당황하면 죽음을 면치 못하는 것이 바로 실전이었다.

죽기 전에 죽여야 한다.

그것을 온몸으로 겪은 그들은 입술을 깨물며, 천휘를 올려다봤다.

“혹시 지금이라도 관두고 싶은 사람 있어요?”

“…….”

중간에 몇몇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끝까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응? 의외네요. 한 명쯤은 관두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하하, 대주도 참.”

혈전에 모든 힘을 쏟아서 진이 빠진 듯한 호광개가 힘없이 웃었다.

“벌써 임무까지 수행했는데, 그만둘 리가 있나. 다들 안 그렇소?”

그 말에 동조하는 움직이는 별동대원들의 고갯짓을 본 천휘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다 들어오는 것으로 알죠.”

그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일 때.

“그러면 하나만 알아 둬요.”

천휘가 싸늘하게 말했다.

“제가 필요한 건 즉시 쓸 만한 별동대원이지. 오늘 같은 짐 덩어리는 아니란 걸.”

“……!”

그 말에 별동대원들이 움찔했다.

즉 짐 덩어리가 되지 않도록 다음에는 제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천휘는 그의 말을 이해한 듯 긴장한 얼굴이 된 그들을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모두 이해한 것 같으니 여기 정리를 하고 복귀…… 아참.”

나직이 말하던 천휘가 몸을 돌리려다가 ‘아차’하며 입을 달싹였다.

“그러고 보니 계속 별동대라고 부르기도 그런데, 이름 하나 짓죠.”

그 말에 모두 눈을 빛냈다.

계속 별동대라고만 불리다가 부대의 이름이 정해진다니, 이제야 제대로 소속을 가지게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좋습니다.”

“좋네요.”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대답에 천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떤 이름이 좋을까요?”

“대주의 별호를 따서 신협대가 어떻습니까?”

“저, 무협대는 어떻…….”

여기저기서 이름이 쏟아져 나왔다.

천휘는 그 모든 명칭들을 들으면서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임하율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멸절대(滅絶隊)는 어떨까요?”

조금 과격한 명칭에 모두가 사뭇 놀란 눈으로 임하율을 쳐다봤다.

“그, 그게 이번에 사파를 멸절한다는 의미로…….”

임하율이 갑자기 집중되는 시선에 끝말을 흐리며, 어색하게 웃을 때.

“멸절이라…….”

천휘가 씩 웃었다.

“그거 좋네요. 멸절대로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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