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천마-268화 (268/391)

268화

“뭔 놈의 공력이…….”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난 적호채주는 강렬한 돌풍을 머금었던 일도(一刀)를 막아 낸 주먹을 슬쩍 봤다.

돌덩이와 같은 주먹에는 한 줄기 피가 흐르며 혈흔이 새겨져 있었다.

‘대력호왕권(大力虎王拳)을 막아 낸 것으로도 모자라 상처라니…….’

그의 눈살이 구겨졌다.

아주 오랜만의 상처였다.

대력호왕권을 익힌 이후 그는 상처 하나 없이 적호채를 점령했고, 십 년 동안을 왕처럼 군림해 왔었다.

그만큼 뛰어난 권법이었다.

그동안 자신에게 덤볐던 이들은 모두 생채기조차 입히지 못하고 당하기만 했었는데…….

이놈은 달랐다.

‘괜히 구파일방이 아닌가.’

아직 나이가 어렸지만, 펼치던 보법과 도법은 그간 만나 온 놈들의 것과 격을 달리하고 있었다.

무식하게 느껴질 만큼 거칠고 빠른 보법.

거기에 살의가 가득한 도법이 더해지니, 대력호왕권과 동수를 이루기 충분했다.

따끔거리는 손을 흔들던 적호채주가 주먹을 꽉 쥐며, 고갤 들었다.

푹!

마침 손에 든 도를 바닥에 내리꽂은 단리관천 또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이 활활 타올랐다.

일개 산척치고 제법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상대의 무위는 뛰어난 수준을 넘은 상태였다.

‘괜히 사흑련이 녹림을 품에 담으려고 한 것이 아니었나.’

적호채주를 노려보던 단리관천이 바닥에 꽂은 도를 천천히 뽑았다.

도신에 묻은 흙이 떨어지고.

스윽―

폭이 상당히 좁은 도신이 적호채주를 일(一)자로 가리켰다.

그 순간.

쿵!

묵직한 압박감이 내려앉았다.

단리관천이 내공을 끌어 올렸다.

전신에서 내공이 줄기줄기 흘러나오며, 도신을 휘감았다.

동시에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매섭고도, 싸늘한 삭풍(朔風)이.

마치 신들리기라도 한 것처럼 바람을 휘감은 단리관천이 한 걸음을 내디뎠다.

저벅―

가죽신의 끝부분이 차가운 땅을 밟는다 싶은 순간, 시야가 일그러졌다.

부운약표.

청성파의 고절한 경공이 적호채주와의 거리를 단숨에 좁힌 것이다.

그렇게 삭풍은 질풍이 되었다.

휘익!

쇄도하는 단리관천을 보던 적호채주가 무릎을 굽히며, 공력을 실었다.

한껏 부푼 대퇴근에 무복이 찢어질 것처럼 팽팽해졌고, 그의 발바닥이 서늘한 흙바닥에 점점 파묻혀 갔다.

개구리처럼 한껏 움츠린 모습.

그때 단리관천이 손목을 뒤틀었다.

찰나의 순간 이루어진 짧은 움직임이 도에 전해지고.

능풍도법이 펼쳐졌다.

그러자 살의가 도신에서 흘러나오며, 공기를 희롱하듯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유형화된 살의는 곧 강렬한 도기가 되어 도신에 피어났다.

그리고.

쐐애애액!

능풍도법이 적호채주를 덮쳤다.

강렬한 와류가 거세게 몰아쳤다.

눈을 반개한 단리관천의 흑발이 바람에 휩쓸려서 파도처럼 나부꼈다.

그때.

“어딜…….”

바로 밑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바늘처럼 날카롭게 귓가를 쑤셔 왔다.

시선을 내리니 적호채주가 올려다보고 있었다.

시퍼런 안광이 섬뜩하게 빛났다.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먹이를 기다려 온 뱀의 눈처럼 보였다.

적호채주가 불쑥 위로 솟구쳤다.

한껏 팽팽해져 있던 그의 하의가 단숨에 찢어지며, 폭발적인 파동이 일었다.

그를 중심으로 퍼진 거센 파동.

대퇴근과 발에 실었던 내공을 폭사한 그는 치솟는 힘을 이용해 대력호왕권을 거칠게 펼쳤다.

화아악!

한 줄기의 혈흔이 새겨진 거대한 주먹이 질풍을 뚫고 승천했다.

이윽고 권과 도가 부딪치고.

콰아앙!

그들의 주변에 떨어져 있었던 낙엽이 한순간에 터져 나갔다.

‘큭!’

단리관천이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엄청난 위력의 일권이었다.

단리관천이 방금의 충격에 뒤로 튕긴 도를 수습하려고 할 때.

훅―

적호채주의 신형이 갑자기 흐릿해지더니, 바로 측면에서 나타났다.

거대한 덩치에 맞지 않는 날랜 몸놀림을 선보인 적호채주가 텅 비어 있는 단리관천의 옆구리를 노렸다.

단리관천의 사고가 빠르게 흘렀다.

‘맞으면 위험하다.’

무인의 육감이 경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닥친 상태.

일순간 사고가 빨라졌다.

‘부운약표를 펼쳐서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어. 그렇다면 도신을 들어서 막아야 하나? 하지만 그렇게 된다고 해도 충격은 피할 수 없…….’

그가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내려고 하던 그때였다.

『상대를 향해 왼발을 내디뎌서 일부러 맞은 다음 사선으로 그 도법을 휘둘러요.』

머리를 관통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목소리는 대주의……?’

순간 단리관천은 당황했다.

뜬금없이 전음을 전해 온 것에 놀란 것도 있었지만, 지금 그의 말은 마치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나방이 되라는 것과 같았으니, 어찌 당혹스럽지 않겠는가.

『당장은 살을 주고, 뼈를 취해야 이겨요. 잘 알지 않아요?』

하나 곧바로 이어지는 전음에 단리관천은 눈살을 구겼다.

그 말이 맞았다.

지금 떠올린 수많은 방법들 중 대주가 말한 방법이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그는 결국 이를 악물며, 왼발을 내디뎠다.

저벅―

단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이었다.

하나 그로 인해서 적호채주가 휘두른 권이 빠르게 옆구리에 닿았고.

퍼어억!

묵직한 경파가 옆구리를 관통했다.

맞았던 부분의 반대쪽 옆구리의 의복이 찢어발겨지며, 흩날리고.

‘컥!’

단리관천의 정신이 새하얘졌다.

당장이라도 의식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참아 냈다.

참아 내야만 했었다.

의식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서.

씨익―

격통에 얼굴이 일그러지는 단리관천을 본 적호채주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제대로 박았어.’

틀어박은 주먹에 느낌이 왔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단리관천이 쓰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리어 그는 꼿꼿이 서서는 핏줄이 터진 새빨간 눈으로 도를 위로 치켜들고 있었다.

‘설마……!’

적호채주가 식겁한 그 순간.

쐐애애액!

단리관천의 손에 들린 도가 거칠게 휘둘러지며, 돌풍이 그를 휩쓸었다.

허공을 유린하던 능풍도법이 기어코 한 줄기의 궤적을 길게 그렸다.

적호채주의 가슴팍에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붉은 선이 그어졌다.

그 선을 따라 핏자국이 번져 갔다.

“큭!”

적호채주가 신음을 흘리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의 눈은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양패구상이라도 노린 건가……!”

그때 단리관천이 휘청거렸다.

일부러 바짝 다가가 무공이 제대로 펼치기 전에 맞았다지만, 그렇다고 위력이 약한 것은 아니었다.

“커헉!”

결국 참다못한 단리관천이 허리를 굽히고 각혈했다.

거무죽죽하게 죽은 까만 토혈이 내장 조각과 섞여, 흙바닥에 떨어졌다.

그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너무 많은 피를 한 번에 토하니, 정신까지 아득해질 정도였다.

‘어지러워.’

시야는 이미 흐릿해져 있었다.

제대로 초점이 잡히지 않아서, 앞의 적호채주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눕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서 있어야만 했다.

상대가 쓰러지지 않는 한.

그가 흔들리는 몸을 억지로 추켜세우던 중에 몇몇 인영들이 다가왔다.

“채주님!”

“괘, 괜찮으십니까?”

고수 간의 싸움에 차마 다가오지 못했던 녹림도들이 황급히 달려왔다.

“저, 저놈을 죽…… 큭!”

수하들에게 버럭 소리친 적호채주가 가슴팍을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다행히 급사할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손가락 틈새 사이로 쏟아지고 있는 피가 상당했다.

“뭣들 하냐! 당장 저놈 죽여!”

적호채주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에 녹림도들이 당황했으나, 비틀거리는 단리관천을 본 그들이 이내 고갤 끄덕이더니, 바로 병장기를 꼬나 쥐었다.

그리고 단숨에 달려들었다.

타앗!

단리관천의 눈빛이 흔들렸다.

흐릿해진 시야 속 가까워지는 어그러진 인영에 그가 억지로 손에 힘을 주어 도를 쥐려 할 때.

스걱!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그러진 시야에 붉은 것이 점령하기 시작하고, 달려들던 인영들이 고꾸라져 갔다.

그리고 앞에 불쑥 누가 나타났다.

적색과 흑색이 어우러진…….

그것은 익숙한 색 배합이었다.

“대주……?”

단리관천이 잇새 사이로 간신히 말을 내뱉을 무렵.

‘이, 이럴 수가…….’

적호채주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검광이 번뜩인다 싶더니 달려들었던 수하 여섯이 주검으로 변했다. 그가 본 건 그뿐이었다.

그때 싸늘한 주검이 된 녹림도들을 슬쩍 훑어본 천휘는 고갤 들었다.

그리고 적호채주를 보며 웃었다.

“일대일 생사결에서 수하들을 부르면 안 되지.”

“으, 으으…….”

그 눈을 마주한 적호채주가 뒷걸음질 쳤다.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 앞에 있는 도사는 자신이 멀쩡했어도, 이길 수 없는 자란 것을.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적호채주를 보던 천휘가 검, 화월을 들었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검신.

하지만 마주한 적호채주에게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은 없었다.

천휘가 화월을 옆으로 그었다.

스으으―

화월이 조용하게 세상을 갈랐다.

적호채주는 두 눈을 부릅뜨며 화월이 시야를 가득 채우는 것을 봤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툭.

적호채주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자신이 죽은 것도 모르는 그의 눈은 여전히 부릅떠진 채였다.

고요한 적막이 주변에 가라앉았다.

푸슈슉―

뒤늦게 피가 솟구친 적호채주의 둔중한 몸이 천천히 쓰러졌다.

쿵!

아주 조용한 최후였다.

적호채주에게서 시선을 뗀 천휘가 몸을 돌려 휘청거리는 단리관천을 봤다.

“참을성이 부족하네요. 마지막에 도법을 펼치던 손이 끝에서 흔들리지 않았다면, 단숨에 죽였을 텐데.”

“그건…….”

입을 열었던 단리관천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 말대로였다.

마지막에 고통을 참지 못해 능풍도법의 초식이 흐트러졌었다.

그것은 아주 얕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적호채주는 죽지 않았고, 자신이 위험해 처하게 되었다.

“……내 실책이오.”

천휘는 가타부타 말없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단리관천을 만족스러운 눈으로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는 대충 정리 끝났고.”

중얼거리던 천휘의 시선이 별동대의 기세가 느껴지는 곳으로 향했다.

“조금 시간이 걸리려나?”

작게 속닥이던 천휘가 단리관천을 지그시 바라보며, 덤덤하게 물었다.

“움직일 수는 있죠?”

단리관천이 힘겹게 고갤 끄덕였다.

아주 잠깐이나마 숨을 고른 덕분일까, 흐릿했던 시야도 안정되어 갔다.

“움직이기만 하는 것이라면…….”

대답을 들은 천휘가 몸을 돌렸다.

“그럼 마저 정리하러 가죠.”

* * *

“이런 젠장!”

상황은 언뜻 별동대가 녹림도들을 압도하는 듯해 보였으나, 중간에 몇 번이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뒤!”

호광개의 외침에 무홍이 재빨리 구상검법(俱傷劍法)을 펼쳐, 달려드는 녹림도들의 도끼들을 흘려 냈다.

그런데 그때.

휙― 휙―

녹림도들의 눈이 치켜 올라가더니 서로 눈짓을 해 댔다.

살의를 번뜩 일으킨 녹림도들은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도끼를 놓아 버리더니 품속에서 날카로운 암기를 꺼내 전력으로 던졌다.

푹!

“큭! 피해!”

호광개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무홍의 허벅지와 어깨에는 암기가 틀어박혀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육시럴!”

도사답지 않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무홍은 다급히 검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암기를 던지느라 무방비가 된 그들에게 힘껏 찔러 넣었다.

푹!

검이 그들의 어깻죽지를 찔렀다.

녹림도들은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졌으나, 사정을 둔 손속에 다시 눈을 살기를 띠며 달려들었다.

그런데 그때.

쿵!

달려들던 녹림도의 몸이 갑자기 앞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그 뒤로 검은 인영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대주?”

그는 바로 천휘였다.

피 묻은 검을 아래로 늘어트린 천휘가 무심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이어서 천휘의 닫힌 입이 열리고.

“지금 뭐 하는 거죠?”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쟁터에서 손속에 사정을 두다니…… 뭐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것도 아니고.”

그가 신랄한 말을 내뱉던 그때.

파앗!

천휘의 등 뒤로 총 여섯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들은 빈틈을 노리며 기회를 엿보던 녹림도들이었다.

그들의 손에 들린 날카로운 박도들이 햇빛에 반짝이며, 천휘의 정수리를 향해서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대주!”

“대주님!”

별동대원들이 당황하며 외쳤다.

하나 천휘는 그들의 외침은 신경도 안 쓴다는 듯이 계속 말을 뱉었다.

“딱 일각 주죠.”

말을 하던 천휘가 눈을 반개했다.

그와 동시에 섬뜩한 붉은 안광이 드러나며, 화월이 살짝 흔들렸다.

그 순간.

촤아아악!

달려들던 녹림도들의 몸이 반으로 갈라지며, 혈우(血雨)가 쏟아졌다.

말로 표현하지 못할 광경.

그 폭우 아래 천휘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 안에 모두 처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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