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옥기린 일광.
천하 삼대 후기지수 중 한 명으로 당대의 무당파가 온 심혈을 기울여서 깎아 낸 걸작이자, 옥석(玉石).
‘뜻밖인걸.’
군사에게 듣기로 지금 옥기린은 별동대의 인원을 모집하느라 바쁘다고 했었다.
한데 그 바쁜 상황에 이곳까지 직접 찾아왔단 것은.
‘무언가 목적이 있는 거겠지.’
천휘가 그를 뚫어지게 볼 때.
“반갑습니다.”
마침 옥기린이 고개를 들었다.
시원한 이목구비와 헌앙한 체구의 그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웃고 있는 그의 외모만은 옥기린이라는 별호가 매우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천휘가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죠?”
단도직입적인 물음이었다.
‘귀찮게 빙빙 돌릴 바에는 그냥 물어보는 게 낫지.’
옥기린은 설마 이렇게 인사를 나누자마자 바로 물어올 줄 몰랐는지, 얼굴에 살짝 놀란 빛을 띠더니 이내 차분해졌다.
“빈도와 같이 별동대의 대주가 된 도우의 얼굴이나 뵈려고 왔습니다.”
옥기린이 선선하게 대답했다.
“같은 별동대의 대주로서 이왕이면 빨리 안면을 트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는 호의를 담아서 말했다.
이제부터 그들은 사흑련과의 전면전에 같이 싸워 나갈 동지이지 않나.
서로 친해져서 나쁠 것이 없다는 판단하에 시간을 쪼개, 찾아왔다.
그러나 그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바로 그 말을 건넨 상대인 천휘에 대해서 파악하지 않은 채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럼 얼굴도 봤으니, 다 됐네요.”
천휘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친해질 생각?
애초에 그딴 건 없었다.
“그럼 이만 가시죠? 이제부터 인원을 모집할 거라, 좀 바빠서.”
퉁명스러운 천휘의 말에 옥기린의 표정이 당혹감에 물들었다. 난생처음 받는 대접이었다.
어디를 가든 환영을 받아 왔는데, 이런 문전박대라니.
‘소문과는 많이 다른 분위기야.’
옥기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귀가 따갑도록 들은 자였다.
섬서의 구세주.
녹림대제를 패퇴시킨 강호의 신성.
그리고 최근 본 파에서 자신에게 견제해야 한다고 부르짖던 인물.
‘매화신협…….’
천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한없이 깊어져 가며, 영롱한 빛을 발했다.
그를 파악하기 위해서 세밀히 살펴봤지만, 도저히 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바로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온통 깜깜한 것이 마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았다.
‘……모르겠어.’
옥기린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하하, 낯을 가리시는군요.”
자신만의 결론을 내린 옥기린은 미소를 띠며,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그는 천휘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뒤로 물러났다.
‘어차피 목적은 달성했으니.’
소문이 무성한 천휘를 직접 본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그는 곧장 전각을 빠져나갔다.
한편 천휘는 그대로 멀어지는 옥기린을 바라봤다.
‘무위는 뛰어난데 말이지.’
그의 시선이 옥기린을 꿰뚫었다.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공력은 그가 괜히 옥기린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라는 듯이 강렬하고, 매서웠다.
특히나 공력의 깊이가 상당했다.
무당파에서 영약이란 영약은 모두 먹이기라도 했는지, 그 공력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넓고 깊었다.
‘천룡이라던 그놈보다 더하단 말이지.’
같은 삼대 후기지수라 불리는 제갈세가의 제갈명도 옥기린의 공력에 비해서는 손색이 있었다.
‘후기지수의 수준을 넘기는 했어.’
은연중에 보이는 공력과 기파.
그것은 후기지수라는 틀을 이미 넘어선 상태였다.
하지만 그뿐.
‘머리가 완전 꽃밭이야.’
천휘는 그를 고깝게 생각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당파가 어찌나 애지중지 키운 것인지 그는 한없이 순수하고, 맑았다.
태평성대라면 좋은 심성일지 몰라도, 지금 상황에선 최악이었다.
강호란 무릇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도산검림(刀山劍林)의 세계.
무기뿐만이 아니라, 세 치 혀와 속임수에도 목숨을 잃기 십상이었다.
그런데 지도자가 순수하다?
그만큼 무서운 것이 어디 있으랴.
‘평화에 찌들었어.’
천휘가 ‘쯧’하고 혀를 찰 무렵.
“응?”
밖에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하나가 아니었다.
최소 수십을 넘는 많은 기척들.
천휘의 시선이 대문으로 향했다.
옥기린이 진작에 빠져나간 대문에 갑자기 먼지가 일었다.
그리고 잠시 후 수십의 사람들이 앞다투어서 문을 넘어 달려오기 시작했다.
“저, 저를 뽑아 주십시오!”
“소도장!”
* * *
잠시 후 전각 앞은 수많은 사람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이거 예상보다 많은데?”
천휘는 활짝 열린 대문 바깥으로 계속 줄을 서 있는 행렬을 쳐다봤다.
그 행렬이 얼마나 긴 것인지,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어디 보자.”
천휘가 모인 이들을 둘러보았다.
줄을 선 이들의 대부분은 처음 보는 무복을 입은 후기지수들이었다.
아직 문파의 중역을 맡지 않은 젊은 고수들이기에 이러한 별동대에 도전하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는 듯했다.
‘대충 일류쯤인가?’
천휘는 눈으로 훑어보며 그들의 무위를 가늠했다.
턱을 쓰다듬었다.
마음에 안 드는 실력들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각 문파에서 배출한 최고의 후기지수들이라면 이미 삼단 사대에 들어가 있거나, 문파의 중역을 맡고 있을 테니.
‘그래도 쓸 만한 놈들이 좀 있긴 하고.’
천휘의 눈이 몇몇 이들을 담았다.
어중이떠중이들만 모인 것은 아니었는지, 몇몇의 기세가 특출 났다.
‘구파일방은 거의 없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구파일방에서 온 자들은 오히려 다른 무인들보다 기세가 옅고, 약했다.
그나마 눈길이 가는 자가 있다면.
‘개방과 종남, 그리고 저자인가.’
천휘의 시선이 세 명을 차례로 잡았다.
자신이 개방이라 밝히듯 거적때기를 입은 더러운 모습의 거지와 그 옆에 있는 종남파의 도복을 걸친 채 조용히 생각에 잠긴 청년 도사.
그리고 암울한 분위기를 전신에서 풍기고 있는 청성파의 도사였다.
‘남은 이들 중에서도 좀 있고.’
그렇게 한참 줄을 선 이들을 보고 있으니, 몇몇 이들이 크게 들썩였다.
“언제 시작하는 거지?”
“얼른 했으면 좋을 텐데.”
그들은 안달이 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옥기린의 별동대는 대부분의 인원을 채웠다는 말을 들은 터라, 그들은 불안이 깃든 상태였다.
“이걸 통과해야만 하는데…….”
“여기에 모든 것을 걸었어.”
그들의 눈에 결심이 어렸다.
최전방에 나설 별동대.
그것은 분명 목숨이 위태로운 일이었지만, 그만큼 얻는 것이 있었다.
각기 다른 문파인 듯한 그들이 한껏 열기를 불태우는 걸 바라보던 천휘의 입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리고 이내 입을 달싹였다.
“반갑네요.”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나 그것을 들은 이들의 표정은 감탄과 경악에 휩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목소리는 바로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모두의 뇌리에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엄청난 내공 운용!’
‘소문이 과장된 것이 아닌가……!’
‘옥기린 대신 매화신협을 선택하기를 잘했어!’
가볍게 선보인 천휘의 실력에 모두가 부르르 떨며 환희에 젖을 무렵.
“별동대가 되기 위해서 온 것은 좋은데, 딱 하나 지킬 게 있어요.”
천휘가 말을 마친 순간 모두가 마른침을 삼켰다.
지켜야 하는 그것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뜸을 들이냐는 듯한 눈빛들이었다.
천휘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 명령이 무엇이라도 따라야 해요. 그것이 불길로 들어가는 것이라도 말이죠. 만약 못하겠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나가시면 돼요.”
모두의 긴장감이 탁 풀렸다.
“후우, 뭐 대단한 일인 줄 알았군.”
“그 정도야 뭐…….”
그들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최전방에 나서는 일이었다.
당연히 그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흠, 그럼 다 동의한 걸로 알겠어요. 만약 명령을 거부하면…….”
말을 멈춘 천휘가 눈을 반개했다.
“그때 가서 각오하세요.”
모두의 가슴이 철렁거렸다.
몇몇은 지금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생각을 다시 할 무렵.
“거기 있는 두 명부터 오죠.”
천휘가 바로 손가락을 까딱였다.
대문의 맨 앞에 서 있던 두 청년은 기다렸다는 듯 후다닥 달려왔다.
그들은 천휘를 보며 긴장했다.
‘이분이 매화신협…….’
‘녹림대제를 패퇴시킨 분.’
둘이 속으로 감탄을 터트렸다.
그들의 눈에 비친 천휘는 너무나 눈부신 존재였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건만, 녹림대제라는 절세고수를 쓰러트렸다고 하니 어찌 경탄이 안 나오랴.
정숙해지는 분위기 속.
“응? 뭐 해요? 소개 안 하고?”
천휘가 툭 던지듯 말했다.
그러자 둘이 화들짝 놀라면서 빳빳하게 몸을 세우며, 크게 외쳤다.
“고영문의 가고정입니다!”
“숭무문의 나중환입니다!”
천휘는 우렁찬 외침을 내뱉는 둘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런 시선에 둘은 흠칫하면서 대체 무슨 시험을 하게 될지 머릿속으로 여러 상상을 하며 긴장했다.
그렇게 얼마나 쳐다봤을까.
천휘가 둘을 보며, 씩 웃었다.
“탈락이에요. 둘 다 나가시죠.”
느닷없는 통보에 둘은 어안이벙벙한 표정으로 멍하니 있다, 뒤늦게 반응했다.
“타, 탈락이라니요!”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면서 소리치는 둘을 보던 천휘는 귀를 후비며, 귀찮다는 듯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탈락이 탈락이죠. 나가세요.”
천휘의 말에 가고정은 이를 꽉 물며, 눈을 파르르 떨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 마음인데요.”
“그게 무슨?!”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거의 발작하듯 소리치는 둘을 바라보던 천휘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꼬우면 본인이 대주 하시든가요.”
“…….”
가고정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잠시 후 그는 파르르 떨더니.
“알겠소!”
이를 갈며, 바로 몸을 돌렸다.
“소문은 헛소문이었군. 매화신협이 대단한 자라기에 옥기린의 부대보다 이곳으로 먼저 달려왔건만, 이런 꼴을 당할 줄이야.”
그는 나가면서 다른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이 계속 소리쳤다.
“후에 후회할 것이오!”
천휘는 끝까지 악담을 퍼부으며 나가는 그를 보며, 손을 휙 흔들었다.
“알았으니까, 얼른 가죠?”
“……이익!”
가고정이 애꿎은 땅을 걷어찰 때.
“대협.”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중환이 차분한 태도로 천휘를 불렀다.
“소인이 탈락한 이유가 고작 그것입니까?”
“그런데요.”
“…….”
순간 나중환의 눈살이 구겨졌다.
그 또한 매화신협이라는 명성에 이끌려 이곳에 온 것이었는데, 이런 취급을 받으니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실망했소이다.”
얼굴을 굳힌 그가 몸을 돌렸다.
하나 천휘는 신경도 안 썼다.
대신 줄을 선 이들을 다시 바라보면서, 손가락을 까딱였다.
“다음 둘 오죠.”
그 말에 모두가 움찔했다.
“혹시 내정된 자가 있는 거 아니야?”
“이미 뽑아 뒀거나?”
몇몇 이들이 의심을 품고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시험을 본다거나, 대화를 나누는 것도 없이 바로 탈락을 시키지 않았는가.
그렇게 모두 흔들리는 와중이었지만.
“아미타불. 실례지만 소승이 먼저 시험을 봐도 되겠소이까?”
“제가 가겠습니다.”
당당하게 나서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구파일방에서 온 자들이었다.
소림의 승려와 종남의 도사가 힘찬 걸음으로 천휘의 앞에 섰다.
“아미타불. 소림의 호영입니다.”
“종남의 고궁입니다.”
천휘는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선 둘을 스윽 훑었다.
그러고는 바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둘이 합격을 자신하는 그때.
“탈락이요.”
천휘가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뱉었다.
“그게 무슨……?!”
“타, 탈락이라는 것이오?”
천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하는 둘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설마 제가 배경을 보고 뽑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렇게 생각했는지, 호영과 고궁이 흠칫했다.
하나 그것도 잠시 고궁이 다급하게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그러면 어째서 우리를 떨군 것이오?”
“어째서긴 뭐가 어째서예요.”
천휘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들을 보며, 비웃음을 던졌다.
“제 마음에 안 들어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