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67. 소환 재판 (4)
바깥의 다른 방에서 대기하다 드디어 호출을 받은 케빈과 레키아가 함께 회의장으로 발을 들였을 때, 두 사람은 홀 안에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를 어렵잖게 감지할 수 있었다.
누가 봐도 확연히 창백해진 두 귀족과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는 라이펜. 슈베이만 역시 피식피식 새 나오는 웃음을 굳이 숨기지 않고 있었다. 라이펜의 옆에 앉은 루이스는 책상의 나무 무늬를 세려는 모양인지 멍하니 앉아만 있었고 동료 기사들은 애매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정 중앙에 서서 숱한 정계의 별들의 시선을 받으며 히죽히죽 웃고 있는 아시엘까지. 케빈은 직감했다. 저 자식 또 입 털었구나.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더욱, 그가 맡은 역할을 수행해내기 고달플 거란 사실을.
회의의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 줄 두 사람이 등장하자 귀족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들에게 모였다. 아시엘은 자신의 마법으로 얼굴이 변한 케빈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원래의 삐죽삐죽 뻗친 머리 대신 숱이 적은 갈색 머리칼에 여드름 흉터가 가득한 수수한 얼굴. 다름 아닌 오늘 파견 근무를 떠난 병사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곁에 선 것은 정말 지나치게 화려한 외모의 레키아였다. 보기 드물게 선명한 주황빛 눈동자에 귀족들은 자리도 잊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에 못마땅해진 케빈이 흠, 헛기침하고 우렁차게 외쳤다.
"벤자민이 황제 폐하와 대공 전하, 그리고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레키아 노스티어가 황제 폐하와 대공 전하,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레키아 역시 정중하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유트리안은 레키아가 바로 아시엘이 말했던 마족 조력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화려한 외모도 그렇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분위기와 기척이 저절로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두 사람이 자신의 곁까지 다가오자 아시엘이 두 사람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들이 증인입니다."
"... 흠! 그대가 레키아 노스티어 경인가. 이번에 폐하의 부름을 받고 황성으로 올라왔다는."
"예. 그렇습니다."
어느 귀족이 헛기침하며 묻자 레키아가 선뜻 대답했다. 곧 독이 오를대로 오른 콘로드 자작이 날카롭게 질문했다.
"그대가 정말 황자 전하와 아시엘 아르셰인 경을 구명한 건가.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에서야 모습을 드러낸 거지?"
"그 역시 그때 크게 부상을 입었으니까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레키아가 눈을 데굴 굴리자 아시엘이 나서서 대꾸했다. 그러자 자작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부상이라고?"
"저는 몸이 작아 황자 전하 혼자서도 충분히 성으로 옮길 수 있었지만 레키아 경은 보시다시피 키가 커서 근처의 치료사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이 자리에 섰다고 경의 혐의가 풀리는 것은 아니네."
잠자코 있던 윈프라운 후작이 입을 열었다. 막 습격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제일 처음 아시엘에게 혐의가 있다고 주장했던 남자였다.
"사람의 입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건 경도 잘 알고 있을 테지. 경의 주장이 현실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네. 잘 알지요. 그걸 판단하는 것은 어려분이지 않습니까."
아시엘이 싱긋 웃으며 답하자 윈프라운 후작은 입술을 비틀었다. 결국 알아서 파헤쳐 보라는 도발이었다. 이게 거짓이라는 것을 까발린다면 귀족들의 승리가 될 테고 그러지 못한다면 아시엘 아르셰인의 승리.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 한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노스티어 경을 황도로 오도록 한 것이 언제이온지."
"답하지 않겠다. 내가 지금 뭐라 말하건 공들은 듣지 않을 게 뻔하니."
라이펜이 은근슬쩍 뒤로 빠져버리자 아시엘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표정이 굳어진 것은 윈프라운 후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노련하게 얼굴을 수습했다.
"... 그렇게 말씀하시니 유감스럽습니다만, 폐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그렇다면 벤자민이라 했나. 자네는 확실히 그 시간에 노스티어 경이 성을 황급히 나가는 걸 봤단 말이지."
"예, 예."
벤자민- 케빈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함이 넘치는 연기 덕분에 귀족들의 눈에 의구심이 가득 찼다. 한쪽에 앉아 있던 또 다른 이가 따지듯 물었다.
"정말인가? 이 자리는 거짓을 고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네."
"그렇습니다."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간신히 눌러 담으며 케빈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때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확실히 자네는 저녁에서 밤 시간대에 성문 경비를 맡는 자들 중 하나로군. 하지만 분명 성문을 지키는 이는 하나 뿐만이 아닐 텐데, 그걸 자네 혼자만 본 건가?"
"예. 다른 놈들은 다 곯아 떨어져 있었슴다."
슬슬 그의 어조에 짜증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던 하노빌 백작이 입에 미소를 머금고 다시 아시엘에게 화살을 돌렸다.
"혼자 본 것 뿐이라면 이 자는 증인이 되기 어렵네, 아시엘 아르셰인 경. 무언가를 원하고 거짓을 말하는 걸지도 모르니. 좀 더 구체적인 증거를 가지고 오게."
"그런 게 필요했나요? 저는 여러분이 단지 심증만 가지로 이런 큰 회의를 열어 주셔서 당연히 필요 없는 줄 알았어요."
아시엘이 비꼬는 기색을 전혀 숨기지 않고 웃는 낯으로 말하자 다시금 회장에 서늘한 기운이 끼얹어졌다. 순간적으로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던 하노빌 백작이 미간을 주무르며 다시 입을 열었다.
"... 말버릇이 나쁘군, 경. 하지만 자네가 죄가 있다는 증거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터. 그러니 경도 증거를 가지고 와야지 무죄가 성립이 되네."
"하긴 그렇겠네요. 여기에 있는 분들이 저보다 증거 조작에 더 전문적일 테니 말이에요."
야, 야! 케빈이 순간 질겁하며 아시엘을 곁눈질했다. 그를 향한 귀족들의 시선이 더욱 살벌해져갔다. 하지만 아시엘은 자신은 꿀릴 것 하나 없다는 듯 도발적으로 백작을 응시했다. 결국 분노한 한 귀족이 벌떡 일어서 핏대를 세웠다.
"불경하다! 전하의 습격의 배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저 놈은 불경죄로 감옥에 처넣어야 합니다!"
"옳소. 위아래도 모르는 저런 놈을 전하의 곁에 둘 없습니다!"
"음- 그러니까 체란 백작님과 로제트 자작님이셨던가요. 지방에 계시다 최근에 황성에 들어오셨다던. 하지만 그거 아십니까?"
아시엘은 싱긋 미소 지었다.
"제국 기사법 제 1항 5조.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은 후작 이하의 권한을 가질 수 있다. 최근까지 영지를 편안하게 하시느라 이쪽에는 영 밝지 못하셨나 봅니다."
"네놈!"
그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체란 백작이라 불린 자가 다시 언성을 높이려 하자 어흠, 하고 루이스가 크게 헛기침했다.
"백작, 앉으시오. 경의 언동이 불량하긴 하지만 셀레니스 기사단에게 불경을 물을 수 있는 자는 공작 전하나 폐하 정도이니. 그리고 아시엘, 너도 그만해."
"죄송합니다."
아시엘은 이번에도 쌈박하게 사과해 버렸다. 케빈의 이마에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설마 아까부터 이런 식이었던 거냐? 그가 소리 없이 눈으로 묻는 말에 루이카엔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흥분한다면 아시엘에게 놀아나는 꼴이 될 뿐이라는 것을 귀족들 역시 슬슬 깨닫고 있었다. 영악한 꼬마. 윈프라운 후작은 미간이 구겨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눌러 담았다.
"그럼 레키아 경에게 질문하지. 정말로 두달 전 황도로 올라온 것이 맞나?"
"네. 그렇답니다."
"아시엘 경의 구원 요청을 받고 습격 현장으로 달려갔고?"
"네."
그가 단정하게 대답하자 윈프라운 후작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이 자는 정상이구나. 그리고 질문을 이어갔다.
"현장은... 경이 그랬다면 우리보다 더욱 잘 알고 있겠지. 갈기갈기 찢어진 시신들과 몬스터의 사체. 그리고 루아 이클립스 기사단의 레이 베르튼 경이 살해됐다. 그건 경이 한 일인가."
"레이 베르튼 경은 제가 갔을 때 이미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저는 남은 인원을 처리했을 뿐입니다."
레키아는 정중히 고개를 살짝 숙이며 답했다. 후작은 다시 날카롭게 말했다.
"필요 이상으로 심하게 훼손된 시신들이었다. 베테랑 기사들도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할 광경이었어. 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아, 그건."
잠깐 뜸을 들이며 레키아는 아시엘의 눈치를 살폈다.아시엘이 슬쩍 고갯짓을 하자 그는 시원스레 웃으며 덧붙였다.
"제 취미입니다."
"푸크헙!"
여기저기에서 마른 사레가 들린 기침소리가 터져나왔다. 심지어는 케빈마저 입을 쩍 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취미? 취미라고? 하지만 레키아는 여전히 예의 바르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은 비교적 침착을 유지하던 후작 역시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경!"
"사실 거기에는 깊은 사정이 있어서 말입니다..."
레키아는 정말로 슬픈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어릴 적, 아버지에게 학대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버지는 일찍 병사하고 저는 어느 마음씨 착한 귀족 나리께 구원을 받게 되었지만 그 후유증으로 그만..."
귀족들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그가 말끝을 흐리며 눈물을 찍어 내는 시늉을 하자 아시엘은 위로하듯 토닥토닥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래서 검을 배우기 시작한 뒤로부터 시신을 찢는 습관이... 그래도 아름답지 않습니까? 반항 못 하는 시체를 찌르고 가르고 피가 퍽퍽-"
"그만! 알겠으니 그만 하게."
노백작이 기겁하며 그의 말을 막았다. 아시엘은 정말 유감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고 하네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래도 레키아 경은 강한 사람이에요. 실제로 그 상황에 저희를 구해 내 주셨으니까요. 그렇죠, 전하?"
"아, 어? 어? 어어..."
유트리안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시엘은 어떠냐는 듯 회장을 쭉 둘러보았다. 역시 충격 요법이 제일이지. 윈프라운 후작은 화를 눌러 참듯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번쩍였다.
"지금 경은 나와 장난을 하고 싶은 겐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죠. 이 웃기지도 않은 회의를 진지하게 임하라니 그것보다 심한 장난이 어디에 있어요?"
"경!"
농담기 섞인 말에 회장이 다시금 술렁였고 결국 후작이 마지막 이성을 끌어모아 외쳤다. 하지만 아시엘은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여러분이 진짜로 제가 황자님을 습격하도록 사주했다, 그렇게 의심해서 저를 이 곳에 세우신 게 아니란 건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 특유의, 나잇대의 소년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아연실색하던 기사들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살짝 굳혔다. 루이스와 라이펜 역시 그의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제가 여기에서 말한 발언이 사실인지 아닌지 솔직히 그다지 중요하지 않잖아요. 지금 후작님이나 하노빌 백작님, 그리고 여러 분들이 주장하는 제가 암살자들과 한 패였다는 말도 그게 사실인지 신경 쓰는 사람이 이 곳에 있나요. 진실은 이미 입이 마르도록 말했어요. 제가, 그리고 저기 앉아 계신 황자님이."
그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분위기는 점차 가라앉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결국 아시엘의 낭랑한 목소리만이 울려 퍼지게 되었다.
"다들 알고 계시지 않아요? 매일같이 싸운다고 해서 모두가 서로에 대해 원한을 가지게 되는 일은 없어요. 왜요, 미운 정이란 말도 있잖아요. 전 확실히 황자님과 사이좋은 친구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어요. 성심성의껏 황자님을 모시는 충직한 기사라고 하기에도 우습죠. 하지만 그래도 저에겐 황자님을 해칠 마음 같은 건 없어요. 한 대 쥐어박을 수는 있을지도 모르지만."
잠깐 말을 끊고 아시엘은 유트리안에게 은근한 시선을 보냈다.
"... 후작님께서 진지하게 임하라고 말하신다면 그러지 못할 것도 없죠. 내겐 죄가 없어요. 황자님을 지키려고 제 친구였던 레이 베르튼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죽였고, 지금은 저를 지키려고 내 손에 죽은 친구가 범인이라고 지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게 변하지 않는 진실이고."
아시엘은 다시 고개를 돌려 윈프라운 후작과 눈을 정면으로 마주쳤다. 한 치의 떨림도 없는 소년의 당돌한 눈동자에 후작의 눈썹이 꿈틀했다.
"만약 제가 말한 게 거짓이라고 주장하실 셈이라면 후작님이 이때까지 말씀하셨던 것도 거짓말이란 걸 인정해야 하실 겁니다. 제게 씌우신 혐의 모두를요."
그는 시선을 돌려 한쪽에 앉은 파르베인 후작흘 힐끗 곁눈질하고 그의 곁에 앉은, 처음의 그 수수한 인상의 사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가장 처음, 회의의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든 첫 질문을 던졌던 남자. 며칠동안 귀족들의 이름과 지위, 그리고 인상착의를 달달 외운 아시엘의 기억에도 없는 이였다.
그와 눈이 마주친 남자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아시엘 역시 그에게 마주 씩 웃어 주며 툭 내뱉었다.
"이 거짓말쟁이 싸움을 시작한 건 제가 아니잖아요?"
"경의 말대로라면 이 다툼에서 승리할 자는 거짓말을 좀 더 그럴듯하게 하는 쪽이 될 듯 합니다."
드디어 묵묵히 있던 그 사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헤일론 자작. 아시엘은 작게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뇌고는 시원스레 답했다.
"전 여기, 어쨌든 증인들을 내세웠어요. 윈프라운 후작님이나 하노빌 백작님 및 여러분이 말씀하시는 혐의보다는 조금 더 진실에 가깝지 않아요?"
"그렇다면 저 벤자민이란 자와 레키아 경이 경의 말이 사실이란 것을 입증하면 되겠군요. 하지만 더 이상 말하는 것도 입이 아플 테니..."
헤일론 자작은 레키아와 벤자민의 얼굴을 한 케빈에게로 눈을 돌렸다. 두 사람이 움찔하자 그가 덧붙였다.
"경비병 벤자민이 그 때 자고 있었다던 동료들을 불러 증언을 시키던가 큰 부상을 입어 한 달동안 은거했다는 레키아 경이 상처를 보여 준다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 아닙니까?"
이런. 순간 아시엘의 얼굴이 미묘하게 뒤틀렸다. 케빈과 레키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시엘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잘 나가고 있는데 산통 깨시긴."
"원래 이런 자리가 아닙니까, 여기는."
자작이 후후 웃음소리를 내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윈프라운 후작이 다시 나섰다.
"그러는 게 좋겠군. 그렇다면 깔끔히 해결될 일 아닌가."
"하지만 경비병들이 당시에 곯아 떨어져 있었다는 걸 순순히 말할까요? 징계받을 게 뻔한데?"
"그렇다면 레키아 경이 상처를 보여주면 될 일이네."
그가 날카롭게 말하자 셀레니스 기사단은 저도 모르게 몸을 딱딱하게 긴장시키고 말았다.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레키아는 마족인데다 그 싸움에 낀 적도 없으니까! 아시엘이 빠르게 변명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자리입니다. 그러니-"
"더이상 말은 말게나. 나도 검을 잡았던 사람이니 상처를 보면 그게 언제쯤 생긴 것인지 정도는 알 수 있어. 탈의하게. 일을 빠르게 해결하고 싶다면."
하지만 윈프라운 후작은 그의 말을 막아버렸다. 긴장된 공기가 사람들 사이에 진득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어쩔거야, 아시엘. 차마 끼어들지 못하고 루이스는 초조하게 아들을 바라보았다. 궁지에 몰린 아시엘은 잠깐 머리를 굴리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바닥만 응시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 레키아 경, 탈의 부탁드려도 될까요?"
뭐? 순간 셀레니스 기사단 뿐만이 아닌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 변했다. 어차피 상처가 없을 게 뻔한데 옷을 벗겨서 어쩌게! 루이카엔은 그렇게 외치고 싶은 것을 꾹꾹 눌러담느라 식은땀까지 흘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레키아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뭐가 어려운 일이라고요."
그는 지체 없이 훌렁 상의를 벗어버렸다. 모두는 자각하지도 못한 채 숨을 멈추고 말았다.
그의 하얀 피부는 그야말로 엉망 진창이었다. 어깨에서 사선으로 베인 상처는 겉만 아물어 흉하게 피를 머금고 있었고 보기 좋게 잡힌 복근 위에도 커다랗게 피를 머금은 흉터가 자리잡고 있었다.
큰 검에 꿰뚫린 관통상은 등까지 상흔을 남겼고 그 외의 자잘한 상처들과 피부를 덮은 시퍼렇고 검은 피멍들은 셀 수도 없었다. 가짜 흉터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너무나도 끔찍한 부상의 흔적들이었다.
몇 분의 시간이 흐르고, 레키아는 다시 상의를 걸쳤다. 그리고는 예의바른 미소를 띠었다.
"이걸로 증명이 되었을까요?"
회의장은 쥐 죽은듯 고요했다. 잠깐 주변을 의미 있는 눈으로 둘러본 아시엘이 살짝 웃으며 선언했다.
"죄인은 레이 베르튼이에요. 정말 습격 사건의 배후를 알고 싶다면 그에게 그 많은 암살자들을 제공한 자를 찾아야겠죠. 처음부터 제가 말하던 건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결판이 난 것 같은데."
침묵을 지키던 라이펜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맞은편에서 슈베이만 역시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이만 폐정해도 괜찮을 듯 하군."
그에 반대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