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82화 (282/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65. 소환 재판 (2)

회의를 가장한 재판을 위해 준비된 것은 황궁에서 두 번째로 큰 원형 홀이었다. 화려한 샹들리에를 중심으로 바닥에는 아름다운 최고급의 대리석이 깔린, 거의 파티장의 용도로 사용되는 호화로운 곳. 가운데를 뻥 비워둔 채 가장자리를 따라 수많은 사치스러운 의자들이 빙 둘러 놓이고 가장 안쪽 상석에는 유독 눈에 띄는 라에펜의 황좌가 자리를 잡았다. 유트리안 전용 의자는 바로 그 옆이었고 맞은편에는 라이펜의 것 못지 않게 호사스러운 슈베이만의 자리가 마련됐다.

오전 10시, 귀족들이 하나 둘 홀에 모이기 시작했다. 시종들은 바쁘게 음료와 다과를 나르기 시작했고 한 시간쯤이 지나자 홀에 놓인 의자들은 거의 가득 찼다. 회의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면서 정치적인 문제로 얽힌 이들 뿐만이 아니라 사건에 대해 관심이 딨는 이들까지 모여든 탓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정오가 되자 대공이 루아 이클립스 기사단을 대동하고 입장했다. 그 직후 라이펜이 루이스와 함께 회랑에 나타났다.유트리안이 그 뒤를 따랐고 그의 곁에는 파슬렌 공작이 있었다. 그리고 루이카엔 드 카시마엘이 이끄는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이 그들을 호위했다.

모두가 모인 자리, 누구 하나 섯불리 입을 열지 못하고 침묵을 지켰다. 대공파, 황제파, 중립파의 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인 귀중한 광경이었다. 누구 하나 입을 잘못 놀리게 되면 매장의 대상이 되버리기 십상이었다. 흑마법과 황자 습격 사건 그리고 몇몇 귀족들이 이 얄팍한 평화를 지키기 위해 혹은 정체상태인 균형을 깨기 위해 희생양으로 내새운 소년 기사.

다들 품은 생각은 다를 테지만 결국 그 화살이 향할 곳은 똑같았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루이스 아르셰인의 아들은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라이펜은 픽 웃으며 날렵한 턱을 쓸었다.

"슬슬 시간이 되었으니 아시엘 아르셰인 경에게 들라 전해."

하인들이 고개를 숙이고 굳게 닫혔던 입구를 다시 천천히 열기 시작했다. 거대한 오동나무 문이 끼이익, 육중하게 열렸다. 그리고 절반도 열리지 않는 문 틈으로 새하얀 제복의 기사가 스스럼없는 걸음걸이로 홀에 들어섰다.

뚜벅, 뚜벅. 유난히 고요한 홀에 부츠 굽이 대리석과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새로 들어선 어린 기사에게 향했다. 검을 쥐기에는 가늘어보이는 선과 소문에 자자한 인형같이 아름다운 외모, 그리고 독특한 적안에 처음 그를 보는 귀족들의 입에서 저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홀의 가운데에 선 아시엘은 라이펜에게 예를 취했다.

"아시엘 아르셰인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부상 중에도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맙군. 그럼 회의를 시작해도 되겠나?"

아시엘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정중히 끄덕였다. 라이펜은 픽 입꼬리를 올리고 처음 이 회의를 발의한 파르베르 후작에게 눈짓했다. 아시엘 역시 호기심 어린 시선을 돌려 중립파의 수장이라는 그를 바라보았다.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중년인은 흠,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리고 대공 전하. 많은 분들이 모여 주셨으니 시간 지체할 것 없이 바로 질문하겠습니다. 제가 회의에 아시엘 아르셰인 경께 출석을 청한 이유는 다름 아니라 황자 전하의 피습 사건 때문입니다."

그가 말을 한 번 끊자 라이펜이 계속 하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후작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는 말을 이어갔다.

"그 날의 잔악무도한 배후는 아직까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건으로 아시엘 아르셰인 경과 이야기를 나눠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네. 대강 전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파르베르 후작이 두 눈을 날카롭게 반짝였다.

"그 날 저녁, 어째서 황자 전하를 모시고 궁 바깥으로 나간 것입니까."

"황자님께서 바깥 바람을 쐬어 보고 싶다 하시길래, 마침 수도에서 야시장이 열리고 있는 걸 생각해 내서 모시고 나갔습니다."

"습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고?"

"그렇습니다."

생각보다 순조로운 흐름이었다. 아직까지는 떠보기만 하는 건가. 상황을 지켜보며 루이카엔은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파르베르 후작이 눈을 날카롭게 반짝였다.

"그렇다면 경 역시 그 배후를 모른다는 말이군."

"글쎄요."

아시엘은 모호한 답을 내놓으며 유트리안을 힐끗 곁눈질했다. 궁 바깥으로 나간 이유를 물을 때부터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가고 있었다. 양심은 있나 보네. 아시엘은 쿡쿡 웃음을 속으로 눌러 담았다. 그 때, 파르베르 후작이 아닌 다른 쪽에서 느긋한 질문이 날아 들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황자 전하를 모시고 성 밖으로 나가, 일부러 함정에 빠뜨린 것이 아시엘 아르셰인 경이 아닙니까?"

아시엘은 다시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갈색 머리칼에 희멀건 얼굴의, 그다지 특징을 잡을 수 없는 수수한 외모의 한 남자가 그 곳에 있었다. 아시엘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황자 전하의 총애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황자 전하를 모시고 성을 빠져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었겠지요."

하지만 그의 되물음에 답한 것은 다른 이였다. 아시엘은 머릿속을 뒤져 그가 누군지 기억해 냈다. 얼마 전 유트리안의 집무실에서 본 귀족들의 신상 정보 서류 더미에서 비슷한 초상화를 본 적이 있었다. 대공을 모시는 하노빌 백작의 측근, 콘로드 자작이란 자였다.

슬슬 시작인가. 아시엘은 목 근육을 두둑, 소리나도록 풀고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제가 황자님을 모시고 성을 나갔다고 해서 그게 제가 암살자들과 한 편이라는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심증은 충분하지요. 총애를 받고 있다 해도 경과 황자 전하가 썩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고 들었습니다. 매일 다툼이 오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도 크게 싸우는 바람에 며칠동안 황자궁을 방문하지 않으셨다고요."

"요점만 말하게."

지루하게 듣고 있던 라이펜이 툭 한 마디를 던지자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엘 아르셰인 경은 다툼 때문에 경이 황자님께 앙심을 품고, 일부러 화해를 청해 그 분을 황성 바깥으로 모시고 나가 습격 사건이 일어나도록 유도한 게 아닙니까?그 때 그것을 저지하려던 레이 베르튼 경을 살해했다는 혐의 역시 씌울 수 있습니다."

"억측은 삼가 주십시오. 그는 저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한 치의 거짓 없는 사실입니다."

결국 유트리안이 끼어들어 사납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유트리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전하도 속으셨을지도 모릅니다. 어린 소년이라고 만만히 봐서는 안 되는 자라는 것을, 그는 황성에서 기사단으로 활동하는 동안 우리에게 아주 잘 보여 주었습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갑자기 아시엘 아르셰인 경이 황자님의 궁에 드나들기 시작했던 것 역시 계산된 행동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제 판단력을 의심하고 있는 겁니까. 내가 일개 기사에게 속아 넘어갔다고요? 그리고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먼저 성 밖으로 데리고 나가달라 청한 것은 바로 저라는 사실을 숙지해 주십시오."

"아시엘 아르셰인 경이 그동안 바깥에 대해 이야기를 자주 전하께 전했다면 전하가 성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실 거란 것도 예상했겠지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전하."

물 흐르듯 이어지는 자작의 말에 발끈한 유트리안이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아시엘이 끼어들었다. 큰 목소리가 아니었지만 유트리안은 끙 소리를 내며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아시엘이 다시 입술을 뗐다.

"흥분하시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콘로드 자작님은 그렇게 생각한단 말씀이시죠? 제가 황자님을 일부러 끌어내 사지로 몰아 넣었다고. 그리고 그걸 저지하려던 레이 베르튼 경을 살해했다- 라."

"그렇습니다."

찜찜함을 느끼면서도 콘로드 자작은 그렇게 시인했다. 아마 그 뿐만이 아닌 이 회장에 모인 3분의 1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잇을 테고, 그 나머지의 반은 그렇게 몰아가고 싶어할 것이고 나머지의 반의 반은 단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잇을 터였다. 그리고 극소수의 남은 사람들은-

"음... 뭐라고 말씀드리면 좋을까."

아시엘은 조금 곤란하다는듯 중얼거리며 턱을 긁적였다. 기세가 죽은 모습에 콘로드 자작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잠깐 생각하던 아시엘은 이내 싱긋 웃으며 툭 한 마디를 내뱉었다.

"전 고통을 즐기는 변태가 아니랍니다."

갑작스러운 발언에 순식간에 회장이 얼음물을 끼얹은듯 서늘해졌다. 셀레니스의 기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마를 짚었고, 루이스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라이펜은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순간 얼이 빠져 멍하니 있던 자작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벌컥 화를 냈다.

"이 곳은 장난을 쳐도 되는 자리가 아니오, 경!"

"누가 장난이라고 했습니까. 제가 황자님을 굳이 모시고 나가서 함정에 빠뜨린 거라면 제가 그렇게 피떡이 될 필요는 없었겠죠. 설마 절 저지하려는 레이 하나와 싸우고 그렇게 됐다고 말씀하시고 싶으신 거라면, 완전히 잘못 짚었어요."

아시엘의 웃음기 섞인 가벼운 음성이 한순간에 소란스러워진 홀에 가득 울려 퍼졌다. 그의 말을 이해하려 콘로드 백작이 미간을 찌푸리자 아시엘은 어깨를 으쓱했다.

"전 레이 베르튼 경과 아카데미 동문이었습니다. 몇 번은 같은 클래스에 있기도 했고 꽤 친한 사이었어요. 함께하던 6년동안 그는 단 한번도 제게 이긴 적이 없습니다. 고작 그 녀석 하나와 싸워서 그런 중상을 입을 정도로 전 약하지 않아요. 이래 보여도 마검사인걸요. 그런데 하, 자작님 말씀대로라면 레이가 절 저지하는 와중에 그 자리에 있던 암살자들을 다 몰살시켰단 뜻인데."

마지막 말에는 콘로드 자작을 향한 가지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자작의 입술이 분노로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고 이제 라이펜의 입술 사이에서는 끽끽거리는 소리가 새 나오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런 자작극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배에 스스로 구멍을 내는 취미도 없고, 그런 피곤한 계획을 세울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습니다. 계산적인 속셈으로 전하께 접근했던 게 아니라고는 말 할수 없겠지만 적어도 여러분보다는 순수한 의도였을 거예요."

정말 어이가 없을 정도의 당당함이었다. 아시엘이 자객들과 한 패라고 믿는 사람이 3분의 1, 그 나머지의 반은 그렇게 몰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고 나머지의 반의 반은 상황이 돌아가는 것에 촉각을 곤두세운 기회주의자들. 그리고 극소수의 남은 이들은 아시엘이 제발 얌전히 있기를 바라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아시엘은 그 어디에도 어울려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얌전히 있겠다면서, 루이스가 그런 말을 속으로 아주아주 힘겹게 삼키며 부들부들 떨었다. 루이카엔은 그 뒷모습을 조금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믿었던 우리가 등신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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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본 주문일 이틀 남았습니다ㅇㅂㅇ/  다들 서두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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