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60. 소환 명령 (4)
"생각보다 늦었네."
평소와 같이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억과 그다지 차이가 없는 칠칠맞은 모습으로 라이펜이 픽 웃으며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깨어난 걸 축하해, 아시엘... 라고 말하고 싶지만. 어젯밤에도 죽을 뻔 했다면서?"
"아직까지도 안 죽은 거 보면 확실히 전 명줄이 긴가 봐요. 게다가 아침엔 이런 것까지 왔더라고요."
아시엘은 주머니에서 소환장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읽지 않아도 그게 뭔지 대충 짐작한 듯, 라이펜은 턱을 쓰다듬으며 눈을 반짝였다.
"간 큰 인간들일세. 루이스 아르셰인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저질렀단 말이지."
"폐하도 알고 계셨던 거잖아요? 발뺌하지 마세요."
소환장을 다시 대강 구겨 넣으며 아시엘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글쎄, 애매한 답을 내놓으며 라이펜은 그의 곁에 선 레키아를 곁눈질했다. 아까 두 사람이 집무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는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낯선 남자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마치 이질적인 조각처럼 아름다운 외모의 레키아는 그의 시선을 진즉에 알아 차리고 마찬가지로 웃음기를 담은 시선을 라이펜에게 보내고 있었다.
"저 손님은 누구지?"
"마족이요."
라이펜이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툭 내뱉은 말에 아시엘이 상큼하게 대답했다. 쿨럭, 쿨럭! 상상 이상의 답이 상상도 못 한 가벼움으로 던져지자 라이펜은 저도 모르게 마른 기침을 쏟아냈다. 아시엘은 히죽히죽 웃으면서 그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간신히 기침을 멈춘 라이펜은 입가를 닦으며 어색하게 입술을 비틀었다.
"갑작스러운 건 변하질 않는구나..."
"어쨌든 그렇게 됐으니까 이 사람, 아니 마족이 생활관에 머물 만 한 명분 좀 만들어 주세요."
"내가 왜?"
소년이 뻔뻔하게 요구하자 라이펜은 삐딱하게 대꾸했다. 아시엘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물론 폐하가 저랑 이 남자를 이용하실 거라면 말이죠."
"호오."
흥미롭게 미소 지으며 라이펜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계속 하라는 듯 그의 눈이 반짝이자 아시엘은 자신의 작은 가슴팍을 툭 손으로 쳤다.
"어쩌실래요? 지금 폐하의 수중에 나이 많은 마족 한 명이랑 어쩌다 살아나서 인생이 꼬여버린 꼬맹이 하나가 들어왔잖아요."
"저도 저 황제님의 수중 안인가요?"
레키아가 어이없이 웃으며 말했지만 그는 묵살했다. 아시엘의 금가루를 뿌린 듯한 적안에 이전과 다르지 않은 빛이 일렁이는 것을 응시하며 라이펜은 이마를 짚었다. 어떻게 저 당당함은 변하지도 않는 걸까.
"선택하라는 거냐? 너를 내치고 흑마법을 대대적인 적으로 공표해 정면 승부를 걸 것인지, 아니면 네 녀석과 저 남자를 이용할 건지. 넌 그렇다 치더라도 저 자는 오늘 처음 볼 뿐더러 아직 이름조차 모르는걸. 정말 마족이란 말이지?"
"그냥 레키아라고 부르세요."
레키아가 간단히 자신을 소개했다. 라이펜은 잠깐 그를 곁눈질하고 다시 아시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내가 널 버리더라도 넌 그걸 받아들일 생각인가 보지?"
"네. 물론 혼자서 움직일 거예요."
당연하게 대꾸하는 소년의 말에 라이펜은 킥 입술을 비틀었다.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지만 루이스 녀석이 시퍼렇게 눈 뜨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널 버리냐. 저 남자가 진짜 마족인지 아닌지는... 일단 네 판단을 믿는 게 빠르겠군. 그래서, 난 저 남자의 뭘 믿고 이용하면 되는 거지?"
"언제부터 폐하가 사람 믿고 쓰셨나요, 뭐. 절 믿으신다면 레키아 씨도 믿어도 좋아요."
"만약 그렇다고 해도, 내가 네 부탁을 들어 줄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농담 반 진담 반을 섞어 황제가 툭 내뱉자 아시엘은 흐흥, 하며 빙그레 웃었다. 라이펜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 얼굴은 낯설지가 않았다. 예쁜 얼굴에 넋이 나갈 정도로 귀여운 미소. 하지만 그 뒤에 버티고 있는 것은-
"야, 설마."
"못 믿으신다면 어쩔 수 없죠. 아, 루이스 아저씨는 아직도 모르셨던가- 폐하가 절 굳이 여장까지 시켜서 대공 전하가 참석하는 파티장에 밀어 넣은 거 말이에요. 그 때 쯤에는 이미 폐하께선 제가 뭔지 알고 있었던 거 아니에요? 너무하셨어요, 정말."
작은 악마였다. 잠깐 고민에 빠진 체 아시엘은 턱을 톡톡 두드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순진무구한 얼굴이었지만 잠시 후 살짝 벌어진 사랑스러운 입술 사이에서 에서 나오는 말들은 결코 그렇지 못했다.
"그 때 대공 전하 눈이 띄어버린 덕분에 그런 일이 생겼었던가, 아마도? 이야~ 지금 생각해 보니 완전히 우리 황제 폐하 때문이었네요. 그 상황에 몸 던져서 황자님 목숨도 구해 줬는데 말이에요. 아아, 그런데 우리 황제 폐하는 야박하게 이런 작은 부탁도 못 들어 주시는 건가... 그럼 어쩔 수 없죠. 저도 치사해지는 수 밖에."
"잠깐잠깐, 잠깐만!"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차차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가더니 결국 라이펜는 버티지 못하고 다급하게 말을 가로막았다. 그제야 아시엘은 줄줄 쏟아내던 말을 멈추고 눈웃음을 치며 황제를 올려다 보았다. 그 밉살맞은 얼굴에 골이 다 지끈거렸지만 황제는 억지로 웃는 낯을 만들었다. 어느새 이마에 식은땀이 촉촉해게 배여 나오고 있었다.
"이... 치사한 녀석. 기사란 녀석이 주군을 위해서 희생하는 건 당연한 거 아냐? 그리고 나도 설마 이 지경까지 될 줄은 몰랐다고."
"뭘 새삼스럽게. 그런 식으로 벗어나려고 해도 소용 없어요. 아저씨가 그런 변명으로 넘어가진 않을 것 같은데요?"
아시엘이 싱긋 웃었다. 때리고 싶다, 진짜 때리고 싶다. 라이펜은 주먹을 파르르 떨었다. 만약 저 녀석이 바로 며칠 전 일어난 환자가 아니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몽땅 다 사실인 게 아니었거나 하다못해 그가 조금만 더 가까이 있었더라도 라이펜은 저 맹랑한 꼬마 기사에게 꿀밤을 놓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에게 가능한 일은 없었다. 결국 황제는 영혼을 토하내는 심정으로 한숨을 내뿜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네게는 빚도 있으니... 하지만 소환 건은 어쩔 건데?"
"고맙습니다. 그리고 그건 그냥 내버려 둬요."
"뭐?"
라이펜이 얼빵하게 되묻자 아시엘은 의기양양하게 입꼬리를 휘었다.
"슌 선배랑 저기 고귀하신 귀족 나으리들이 굳이 마련해 준 기회를 날려버릴 수는 없으니까요."
"누가 네 녀석 아니랄까 봐. 그런 꼴을 겪고도 그런 말이 나와?"
어이가 없어진 라이펜이 황당하게 말했다. 늘 그렇듯, 뭔가를 숨겨 둔 채 반짝이는 적안은 아무리 들여다 봐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다음 순간 머릿속에 짚이는 한 가지에 라이펜은 살짝 미간을 구겼다.
"혹시... 화난 거냐? 오늘따라 좀 더 까칠한 것 같은데."
"네."
"누구에게?"
"전부 다요."
아시엘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결국 화풀이를 하려는 셈이냐, 대충 상상은 된다만. 라이펜은 푹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결 좋은 머리칼을 짜증스레 벅벅 헝클어 버렸다. 레키아가 저도 모르게 안쓰러운 시선을 보낼 정도로 -그런 자신 역시 완전히 부속물 취급을 당하고 있던 것은 제대로 자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시엘의 한달 여 만의 방문은 복수라도 하듯 순식간에 황제를 너덜너덜하게 만들어 버렸다. 라이펜은 정신을 추스려 심호흡을 햇다.
"... 어쨌든. 유트를 구해 준 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이번 일과는 별개로 말이야."
"뭘요. 저야 뜯어먹을 부분 더 생기고 좋죠, 뭐. 그리고 꽤 오래 자고 있던 사이에 그 당사자도 꽤 능력이 생긴 모양이니 그 몫은 본인에게 받겠슴다."
아시엘은 히히, 짓궂은 소리를 냈다. 그래, 저 녀석이 어디 가냐. 라이펜은 헛웃음을 삼키고 말았다. 벌써부터 저 녀석으로 인해 골머리를 실컷 앓고 있을 보호자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래, 이래야지.
"정식으로 복귀를 축하한다, 아시엘 아르셰인. 생활관에서 다음 명을 기다리도록. ... 제발 심하게 날뛰지는 말고."
"노력은 해 볼게요."
라이펜의 진심이 듬뿍 담긴 말에 아시엘은 히죽 웃었다. 그래 말 해봤자 뭐 하겠냐. 라이펜 역시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마족 형씨는 나중에 내가 따로 전갈을 주지. 거주지는 셀레니스 생활관으로 하면 되겠지? 어차피 그쪽도 저 맹랑한 꼬맹이에게 코가 꿰인 모양이니."
"잘 부탁드립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레키아에게 향한 라이펜의 시선에 언뜻 동정의 빛이 스쳤다. 그것을 알아차린 레키아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하자 라이펜은 손을 내저었다.
"아니, 형씨도 수고하라고. 꽤 고달프겠네. 특히 저 녀석에게 지은 죄가 있다면."
"아."
순간 레키아는 정강이를 걷어 차인 순간을 떠올렸다. 그 정도 쯤이야 마족인 자신에게는 크게 상관 없는 일이었다. 조금 아프긴 했지만 그리 타격이 될 것 까진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대꾸하려던 레키아를 라이펜이 저지했다.
"말랑하게 생각하면 분명히 나중에 후회하게 될걸."
진심이 듬뿍 담긴 충고에 레키아는 그만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옆에서 아시엘이 사람 괴물 취급 하지 말라며 그 나잇대에 맞는 불평을 종알종알 늘어 놓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그다지 와닿지 않고 있었다. 수고해라. 그렇게 말하는 듯한 라이펜의 황금빛 눈동자에 레키아는 쓴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