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58. 소환 명령 (2)
이미 다들 내려와 기다리고 있었던 듯 아시엘이 계단에 쭈뼛거리며 나타나자 모두가 벌떡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게 사색이 되어 있는 한 사람, 루이스를 발견한 아시엘은 어색하게 웃었다.
"죄송해요. 늦잠 자버렸네요. 오래 기다리셨-"
저벅저벅, 루이스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어깨를 와락 붙잡았다. 그리고 억지로 고개를 젖히게 해 목에 새겨진 상흔을 살폈다.
"아프진 않아? 괜찮아?"
"안 아플 리가 있겠어요. 괜찮아요. 멍은 곧 사라지겠죠, 뭐."
아시엘은 손을 내저으며 루이스에게서 황급히 벗어났다. 그의 안심시키는 말에 루이스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괜찮다는 말은 좀 집어 치워! 농담하는 게 아냐, 일어난 지 며칠 됐다고 벌써 이 꼴이야?"
갑작스런 터져나온 큰 소리에 아시엘이 저도 모르게 움찔했고 로비에는 서늘한 침묵이 내려 앉았다. 아시엘의 놀란 눈을 마주한 루이스는 그제야 실수를 깨닫고 짜증스럽게 머리칼을 헤집었다.
"... 미안, 네 잘못이 아닌데. 답답해서."
"아저씨가 왜요. 걱정해주셔서 그런 건데요."
아시엘의 쓴웃음 때문에 괜히 마음만 더 갑갑해진 기분에 루이스는 쯧 혀를 찼다. 뭐가 이렇게 태평한 건지. 속을 태우는 자신만 바보가 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마찬가지였던지 케빈이 신경질적으로 테이블을 쾅, 걷어 찼다.
"젠장, 슌 이자식! 감히 배신하다니... 가만 안 둘 거야."
"이미 간 사람한테 그래 봤자 뭐 하겠어요."
그의 속 없는 대꾸에 덕분에 어이가 없어진 케빈이 쏘아 붙였다.
"넌 그런 소리가 나오냐. 너 그 자식이랑 꽤 사이 좋았던 거 아니었어?"
"물론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어요. 다음에 만나면 어떻게 해줄까, 란 건 나중에 진짜 만났을 때 제일 먼저 드는 충동으로 해결해 버리죠, 뭐."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아시엘이 시원스레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다른 이들의 표정은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때 허공에서 검은 연기 자락이 스륵 피어나더니 그의 옆에 레키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결국 저질렀나 보네, 그 남자."
재미있다는 미소를 가득 담은 얼굴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흥미로운 목소리가 노래하듯 유쾌하게 울려 퍼졌다. 갑작스러운 등장이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기사들이 흠칫 얼굴을 굳히고 아시엘이 그에게 눈을 흘겼다.
"두 발 놔뒀다 뭐 해요. 말도 없이 어디 갔다 왔어요?"
"잠깐 산책. 내가 어제 그렇게 충고를 해 줬는데 말이야. 그 놈도 불쌍한 인생이네요."
키득키득 웃음소리를 내는 그를 루이카엔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쏘아보았다.
"그 말은 뭡니까. 결국 이번에도 당신은 이 일이 일어날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겁니까?"
"물론. 그 남자가 실패할 거란 것도 또 그의 말로가 썩 좋지 않을 거란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충고를 했고, 그는 듣지 않았네요. 뭐, 그도 감시당하는 입장이라 어쩔 수 없었겠지만."
레키아는 턱을 쓰다듬으며 스스로의 말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케빈이 이를 북 갈아 붙이며 으르렁거렸다.
"재미있어? 지금 이게 재미있냐고."
"네. 엄청요. 전 마족이라고 했을 텐데요. 당신들의 기준에 맞춰서 생각한다면 아주 큰 오산이에요."
"심술은 그만 부려요. 성가시니까."
아시엘이 짜증스럽게 툭 내뱉는 말에 레키아는 미소는 지우지 않으면서도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케빈 역시 불만스럽게 미간을 찌푸렸지만 더 이상의 드잡이는 하지 않았다. 골치가 지끈거려와 루이스는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토록 무력감을 느낀 게 도대체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뭔가가 제대로 틀어져 잘못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문제였는지.
처음에 흑마법을 조사하기 위해 황성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선에서 끝낼 생각이었다. 그게 만용이었다는 것을 얼마 전에 깨달았지만 그래도 이런 사태까지 번질 거란 것은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바였다. 그리고 떠돌아 다닌지 5년째 되던 혹독한 겨울, 우연히 주운 소년이 이 일에 휘말릴 터란 미래 역시 자신은 전혀 읽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휘말린 게 아니었다. 모든 상황이 철저하게 아시엘을 폭풍 속으로 밀어 넣지 못해 안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가장 잘 알고 있을 본인은 덤덤히 그것들을 모조리 받아들이고 있었다. 도대체 뭘 기다리고 있는 건지, 자신이 키운 아이였지만 루이스는 알 수가 없었다. 답답함이 끝도 없이 가중되고 있는 것은 아마 그것 때문이었다.
똑똑. 복잡하게 꼬인 그의 귀에 노크 소리가 파고들었다. 루이스가 퍼뜩 고개를 들고 눈짓하자 루이카엔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밖에 서 있던 것은 옷을 잘 차려 입은, 낯설지 않은 얼굴의 하인이었다. 그는 루이카엔에게 모자를 벗어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용건을 말했다.
"실례합니다. 아시엘 아르셰인 경께 전해 드릴 것이."
"저요?"
아시엘이 루이스의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자, 하인은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양해를 구하고 생활관 안으로 들어서 그에게 다가가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최고급의 종이에 화려한 금박이 입혀진 봉투는 황가의 인으로 봉해져 있었다. 남자는 정중한 태도를 잃지 않고 말했다.
"등기입니다."
"흐음."
아시엘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것을 받아 들자 하인은 다시 짧게 묵례하고 그대로 돌아서 생활관을 나갔다. 그는 봉투를 뜯고 안에 들어 있던 종이를 확인했다. 마찬가지로 고급스러운 종이에 마찬가지로 좋은 향기를 내는 고급의 잉크로 정갈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소환장. 아르셴 아르셰인 귀하.
"소환장?"
"뭐라고?"
그가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루이스가 놀라 종이를 빼앗아 읽었다. 루이카엔과 케빈도 다가와 내용을 확인하고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다음 주의 대전 회의에 출석하라는 명령... 인데. 말투가 이게 뭐야? 거의 용의자 취급을 해 놨잖아?"
"조사를 위해... 라. 웃기는군. 몰아붙일 생각밖에 없잖아."
케빈이 으득 이를 갈아 붙이자 루이카엔이 툭 내뱉었다. 루이스는 인상을 구기며 그대로 종이를 찢어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아시엘이 기겁하며 재빨리 그것을 다시 빼앗아 왔다 .
"뭐 하는 거예요, 아저씨!"
"뭐 하는 거긴, 이 녀석아. 이런 건 안 봐도 돼. 네 아버지가 누군지 이 작자들이 잠깐 잊어버린 모양인데-"
"에이. 그러지 마세요."
루이스가 사납게 쏘아 붙이는 말에 아시엘이 이히히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는 와중에 소환장을 곱게 접어 주머니에 쑤셔 넣는 것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곁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카이스가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이라도 있는 거야?"
"글쎄? 적어도 내가 여길 가야 하는지는 다른 사람이 정할 몫이지."
아시엘이 묘하게 즐거워보이는 얼굴로 대꾸하며 외투를 챙겼다. 루이카엔이 의아하게 물었다.
"어디 가게?"
"잠깐 폐하께요. 레키아 씨, 당신도 같이 가요."
"뭐? 라이펜 그 자식한테는 왜? 그리고 저 자는 왜 데려가는 거야?"
와락 얼굴을 찌푸리며 루이스가 캐물었지만 아시엘은 글쎄요, 하며 히죽 특유의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건 나중에 보면 알겠죠. 그럼 다녀올게요. 레키아 씨, 가요!"
"네네."
레키아는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런 그를 차마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남겨진 이들은 두 사람이 문 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쿵! 생활관의 문이 묵직하게 닫히는 것을 멍청하게 바라보던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