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56. 예기치 않은 손님 (3)
스릉! 그의 말에 기사들이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은 검을 빼드는 것이었다.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아시엘을 뒤로 물리는 모습들에 남자- 렌이기도 했고, 레키아노스이기도 한-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과보호 아닌가요? 오히려 뒷덜미 잡힌 건 제 쪽인데."
"헛소리 지껄이지 마. 처음부터 알고 접근한 건가? 언제부터 위장하고 있었지?"
루이카엔이 그에게 성큼 다가서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그는 단장을 가소롭게 바라보았다. 그의 오렌지 빛깔의 눈동자가 오만하게 반짝였다.
"굳이 접근하지 않았어요. 마족인 내가 하기는 조금 우스운 말이지만 그냥 운명의 시간선에 살짝 발을 들인 것뿐이죠. 렌으로 살아온 것도 꽤 나쁘지만은 않았어요.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변하는 건 지금의 저에겐 무리지만 살짝 바꿔치기 하는 건 간단한 일이거든요."
"바꿔치기?"
"나뭇잎 여관의 렌 이라고 하는 청년은 분명히 존재했어요. 약간의 예언 능력 역시 가지고 있었죠. 하지만 그 남자는 자신의 능력을 약한 신체가 견디지 못해 쇠약사해 버렸고- 제가 살짝, 그의 이름과 얼굴을 빌린 것일 뿐이랍니다. 마침 가족도 친척도 없으니 잘 된 일이었죠. 아시엘과 만난 렌은 저지만 그 이전의 렌은 제가 아니었던 셈이죠."
케빈의 의아한 물음에 상식 밖의 설명이 이어졌다. 눈앞에서 그의 모습이 바뀌는 것을 봤으면서도 이 남자가 마족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도 벅찼다. 거기다 새로운 사실들이 쏟아져 들어오자 그들은 머리가 지끈거릴 판이었다. 남자가 킥 웃으며 고개를 살짝 젖혔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분명 말씀 드렸을 텐데. 꽤 약해진 상태이긴 하지만 인간 기사 한 둘쯤은 문제없답니다."
"뭐야, 이게-"
"상대가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렇겠지만 여기 모인 사람의 범주를 벗어난 괴물들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다를 걸요."
울컥한 케빈이 뭐라 쏘아 붙이려는 순간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아시엘의 느긋한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덕분에 맥이 탁 빠지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비틀거린 그는 아시엘에게 사나운 시선을 보냈다.
"무슨 소리야, 넌!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어떻게, 알면서 여기까지 데려 올 수가 있어!"
"말은 바로 해야죠. 데려 온 게 아니라 제 발로 들어온 거예요. 그리고 렌 씨는, 아. 이제 렌 씨라고 부르긴 좀 그런가. 어쨌든 저 남자는 우리 편이 되어 줄 테니까 걱정 말아요."
그 호언에 케빈은 기가 막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장 황당해 하는 것은 루이스였다.
"하지만 아시엘, 저 남자는 마족이라고 했잖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넌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건데?"
"글쎄요. 저도 사실 몰랐어요. 단 둘이 밤에 외출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친구를 믿지 마라. 시내에서 만난 날 그렇게 말했을 때도요. 단지 다음 파견에 대한 예언인 줄 알았는데."
아시엘의 시선이 레키아노스를 향했다. 그의 얼굴에 빙그레 의미 있는 미소가 드리워졌다.
"사실은 황자님과 제가 단 둘이 외출한 날, 제가 죽을 지경에 다다를 걸 얘기한 거였죠? 당신은 그걸 알고 있었던 거고."
"정-답. 그리고 이젠 레키아 라고 부르면 된답니다. 당신이라고 불리는 건 썩 유쾌하지 못하네요."
남자, 레키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단원들의 얼굴이 다른 의미로 한층 살벌해졌다. 아델레트가 적의를 숨기지 않으며 캐물었다.
"알고 있었다고? 그런데도 그냥 방치한 거야?"
"방치하지 않았어요. 충고까지 해 준 걸요. 단 둘이 밤에 외출하지 말라고. 그게 시기가 좀 일러서 아무래도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지만."
"보통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겠죠. 만약에 당신이 움직이던 진짜 렌 씨라면 당신의 목숨이 위험하다면서 좀 더 사람다운 충고를 하지 않았을까요. 거기에서 살짝 힌트를 얻었죠."
아시엘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레키아에게 사뿐사뿐 다가섰다. 레키아의 눈동자가 그의 움직임을 흥미롭게 좇았다.
"내가 죽어도 그다지 상관없지만 기왕이면 죽지 않기를 바라는 무언가. 황성의 상황을 대충 알고 있고 우리가 누구에게 습격 받을지도 알고 있을 한 사람... 그리고 날 공격한 그 녀석, 레이가 그 때 어떤 상태였는지 알고 있지 않는 이상 그런 충고는 불가능해요. 그래서 대충 감은 잡았죠. 물론 당신 때문에 꽤 험한 꼴을 당했긴 하지만 저도 그걸 막아주지 않았다고 원망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아시엘은 어쩔 줄을 모르는 동료들 사이를 지나 레키아의 앞에 섰다.
"그래도 기분은 좀 나쁘네요. 남의 목숨을 가지고 도박 같은 걸 하다니."
"사실 네가 살아남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그 철부지 황자님의 손에 의해 그런 일이 일어날 거란 사실 정도는 읽어낼 수 있지만 나와 같은 종류의 힘을 가진 아시엘의 미래는 읽어내기 힘들거든요."
레키아는 미소 지으며 아시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굳이 그 손을 피하지 않고 아시엘은 태연하게 물었다.
"그래서 제가 죽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는데요?"
"이런.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음- 아시엘이 거기에서 목숨을 잃었다면 저도 그대로 사라질 생각이었어요. 더 이상 수도에 머물 필요도 없으니까요."
사라진다, 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아시엘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휘었다. 렌으로서의 삶을 그만 둔단 뜻인가. 그게 아니라면- 하지만 더 생각하기도 전,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카이스가 자신 쪽으로 와락 잡아 당겼다.
"손 치워."
짧은 한 마디였지만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단호한 거부가 선명히 담겨 있었다. 레키아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킥 웃음을 터뜨렸다.
"알겠어요. 뭐 어쨌든 검은 슬슬 치워 주세요. 저는 그다지 상관없지만 그래도 이러면 대화하기 힘들잖아요? 여러분 팔도 아플 테고. 절대로 제가 먼저 여러분이나- 혹은 이 아이."
레이카는 앞의 아시엘을 살짝 눈짓했다.
"아시엘을 먼저 공격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예언자는 거짓말 하지 않아요."
기사들은 꺼림칙한 시선을 서로 교환했다. 그러던 중 그를 노려보던 루이스가 간단하게 명령했다.
"검 집어넣고 앉아. 일단 이야기나 더 나눠 보지."
"역시 아저씨."
카이스가 가려 버린 시야를 확보하려 까치발을 들고, 아시엘이 씩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루이스는 여전히 굳어버린 표정을 풀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대화를 위해서다. 허튼 짓 하면 이 자리에서 죽여주지."
"호오- 역시 소드 마스터라 그런가. 기백이 남다르네요. 하지만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아무 짓도 하지 않겠다고."
다시 한 번 그가 힘주어 말하고 나서야, 기사들은 슬금슬금 검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았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에서는 여전히 노골적인 적대감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레키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할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대신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그 에쉬리아라는 실험체는 직접 보니 어땠어요? 그래도 지금의 당신과 가장 처지가 비슷할 텐데. 아니, 그 반대인가."
"소감을 묻는 거라면 아주 개같았어요."
아시엘이 드물게도 날카롭게 대꾸했다. 그 때 루이스가 끼어들었다.
"무슨 뜻이야, 처지가 비슷하다니. 이 녀석과 그 여자가? 게다가 실험체란 말은 또 뭐고."
"말 그대로에요. 그 여자는 흑마법사들의 실험체였고, 그 실험은 성공했어요. 저도 마찬가지고. 아니지, 전 좀 계획 외의 산물이라고 하는 게 맞으려나."
그 말에 아무렇지도 않게 답을 준 건 아시엘이었다. 뭐? 순간 멍해진 그들의 시선이 한 몸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레키아는 마냥 재미있다는 듯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솔직히 의문스럽지 않았어요? 바깥에 나가니까 온통 그 얘기 뿐이던데. 정말로 아시엘 아르셰인이 그 많은 자객들을 모두 처리했나. 말도 안 된다고."
"아시엘, 그건-"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감을 잡은 루이카엔이 급하게 말을 막으려 했지만 아시엘이 더 빨랐다.
"제가 한 거 맞아요. 그 때의 감각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걸요.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었지만."
"... 정말? 정말로 네가 다 한 거야?"
잠시 뜸을 들이던 아델레트가 결국 그렇게 물었다. 아시엘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거기에 있던 레이도 제가 죽인 거예요. 이 레이피어로. 아, 그리고 어머니라던 여자가 나한테 떠넘긴 짐 덩어리도 한 몫 했죠."
그의 말이 끝맺어 갈 쯤, 로비에는 싸늘한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 한 사람, 루이카엔만은 속으로 탄식을 흘리고 있었다. 아시엘이 무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제 어머니라는 사람이 대공의 실험체였다고 하네요. 인간계에 소환된 마족의 힘을 인간에게 부여한대나 어쩌나. 어쨌든 그 실험은 성공했고, 어머니는 그 길로 탈출해서 아버지란 인간과 후카덴 영지의 깊숙한 마을로 갔대요."
"......."
"그리고 거기서 절 낳고, 잘 먹고 잘 살다가. 아버지란 작자가 죽는 바람에 어머니가 미쳐서 그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고 자폭했대요. 그 와중에 저만 살아남은 거고. 그 때 모두를 죽인 힘이 저한테도 있다고 하네요. 뭐, 레이의 말은 대충 거기까지였어요."
"아시엘."
결국 루이스가 그를 소리 내 불렀다. 하지만 아시엘은 쓰게 웃을 뿐이었다.
"다른 생각 안 할래요. 이것 때문에 저 싫어한다고 해도 할 말 없고. 그냥... 저한테 주어진 게 그런 거라니까 받아들일 수밖에요."
분명 소년의 입에서 갑작스레 나온 말들은 엄청난 것이었지만 그들은 현실감을 잡을 수 없었다.
"절 공격한 레이... 도 비슷한 종류라고 했어요. 그 녀석은 힘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격이 붕괴된 모양이지만. 저도 완전하진 못한 것 같아요. 그 때 이성이 완전히 날아가 버렸으니."
널 증오해, 라고 고함치는 그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아시엘은 고개를 털어 그의 모습을 지워 버리고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 놈들은 고대로부터 인체 실험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목적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 인간들에게 자신의 힘을 이식하는 거겠죠."
"아니, 그게 진정한 목적은 아니죠."
할 말을 잃은 기사들이 차마 뭐라 말하거나 심지어는 헛소리 말라며 화 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을 때 잠자코 있던 레키아가 가볍게 툭 내뱉었다.
"그들의 목적은 다른 데 있어요. 물론 인간계의 정치 문제와는 전혀 관련이 없이."
그는 잠시 말을 고르듯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그런 레키아의 얼굴에서는 일순 미소가 사라졌다가 이내 다시 떠올랐다.
"앞뒤 설명 다 자르고 말하자면 그들의 목적은 계약자 없이 이 땅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것. 계약자가 살해당하면 마족 역시 목숨을 잃고, 그렇지 않더라도 수명이 짧은 인간이 노쇠해서 죽기라도 하면 마족은 마계로 역소환 당하니까. 그리고 그건 아주 오랜 옛날에 한 번 성공했어요."
레키아는 잠깐 말을 끊었다. 어벙한 시선들이 모두 자신에게 모여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여기 서 있는 저. 제가 그 증거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