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70화 (270/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55. 예기치 않은 손님 (1)

"아야..!"

"야, 야!"

실컷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결국 상처가 벌어진 건지 아시엘이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유트리안이 넘어지려는 그의 어깨를 급하게 붙잡아 주었다.

"멍청아, 이런 몸으로 기어 나왔어? 들어가서 잠이나 자, 미련하긴."

"아야야..."

유트리안은 차마 대꾸도 못하는 그를 조심스럽게 잔디밭에 앉혀 주었다. 하얀 셔츠에 살짝 붉은 피가 배여 나오고 있었다.

"움직일 수 있겠어? 얼른 생활관으로 돌아가자. 데려다 줄 테니까."

"아야야... 잠시만, 잠시만.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어..."

덤으로 근육통까지. 이히히, 하고 아시엘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유트리안은 어이가 없어져 쏘아 붙였다.

"지금 웃음이 나오냐? 업어서라도 데려다 줄테니까 기다려."

"아냐, 내가 갈 수 있어- 응?"

고집을 피우던 아시엘은 갑자기 몸이 쑥 일으켜지는 느낌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트리안 역시 의아하게 시선을 위로 올렸고, 이내 하얀 제복의 그다지 낯설지 않은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름이..."

"슌 선배?"

기억을 더듬으려는 찰나, 남자의 손에 고양이처럼 반쯤 데롱데롱 매달린 아시엘이 고개만을 올려 어리둥절한 목소리를 냈다. 슌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는 아시엘을 똑바로 일으켜 세워 주었다.

"이럴 줄 알았지. 돌아가자, 루이스 경께서 오셨어. 얌전히 업혀."

"제가 걸을 수 있어요!"

아시엘이 항변했지만 슌에게는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그는 싱긋 미소 지으며 아시엘의 코앞에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골라. 안겨서 갈래, 업혀서 갈래? 뭣하면 하인들 불러서 들것을 가져오라고 시킬 수도 있는데."

"... 업힐게요."

결국 항복을 선언한 건 아시엘이었다. 그가 투덜투덜 무어라 불만스럽게 중얼거리기 시작했지만 슌은 당연히 무시하고 그를 가볍게 업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유트리안이 놀리듯 말했다.

"그래도 위 공기 마셔서 좋겠네. 소감이 어떠냐?"

"조용히 해, 한 대 더 맞고 싶지 않으면."

아시엘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하지만 슌의 등에 꼭 붙어 업힌 채 그렇게 말해 봤자 전혀 위협적이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본인 역시 그것을 자각하고 있었는지 그는 이내 끄응, 한숨을 내쉬며 아예 얼굴을 파묻어 버렸다. 등에서 선명히 느껴지는 감각에 슌은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 녀석은 제가 수거해갈테니 전하는 걱정 말고 들어가 보세요. 요즘 정신 없지 않으십니까."

"감시 잘 해. 또 멋대로 기어 나오게 하지 말고."

"나중에 보자."

유트리안의 대꾸에 대한 답은 슌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오랜만에 듣는 살벌한 목소리에 슌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고 유트리안은 찔끔 입을 다물었다. 하여튼 쪼그만 게 성질은 엄청 더럽다니까. 속으로만 꿍얼거린 소심한 투덜거림은 이미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황자궁을 나서자 사람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셀레니스의 제복을 입은 남자가 같은 옷을 입은 작은 소년을 업고 다닌다는 게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으니. 게다가 업혀 있는 사람이 요즘 화제의 인물인 아시엘 아르셰인인 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가 없어 더욱 그랬다. 하지만 슌은 신경 쓰지 않고 터벅터벅 느긋한 걸음을 옮겼다.

"무리해서 돌아다니지 마. 치료사 영감한테 작살나기 싫으면. 너 오늘 카이스한테도 말 안하고 나왔지?"

"그 녀석은 걱정이 너무 심해요. 내가 뭐 어린앤가."

"걱정 안 하게 생겼어? 눈만 떼면 이 모양인데."

슌이 퉁바리를 놓자 아시엘은 헤헤 어색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잠시 두 사람 사이에는 짧은 침묵이 흘렀다. 등 뒤의 그다지 무겁지 못한 무게를 의식하며 슌이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시엘. 그만 둘 생각은 없어?"

"네? 뭘요?"

그의 어깨 너머로 주변을 구경하던 아시엘이 의아하게 되물었다. 슌은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그... 대공에게 맞서는 거. 단장이 전부 다 말해 줬어. 혼자서 조사하다가 표적이 된 거라면서."

"글쎄요."

잠시 뜸을 들이다 그렇게 대꾸하는 아시엘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슌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 네가 그만둔다고 해서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오히려 모두 다 네 걱정만 하고 있을 뿐이고... 더 이상 너한테만 맡겨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서 단장도 우리한테 전부 다 말해준 거니까.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손 떼도-"

"아니에요, 선배. 걱정은 감사하지만."

조용히 그의 말을 끊으며 아시엘이 웃었다.

"하지만 이건 제 문제이기도 해요."

"...... 어째서?"

"저 역시 얽혀 있는 일이니까요. 아주아주 오래 전부터요."

간단히 돌아온 대꾸에 슌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아무렇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어조였지만 그 속에는 뼈가 들어 있었다. 움직이지 않으려는 입술을 억지로 떼 간신히 물었다.

"무슨.... 이야기야?"

"글쎄요. 지금 굳이 묻지 않으셔도 곧 알게 되실 거예요. 어쨌든 그만둘 생각은 전혀 없어요. 빠져나갈 수도 없고. 되돌려줄 것도 있고."

마치 노래라도 하듯 아시엘은 킥킥 웃으며 가볍게 말했다. 슌은 정말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언제나 느끼던 바였지만 아시엘은 의중을 읽어내기 힘든 구석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슌은 입을 얌전히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자신보다 10살이나 어린 소년을 상대로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는 가끔 단장인 루이카엔보다도 상대하기 어려웠다. 어려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럴 줄 알았어."

하지만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는 건, 이 애송이는 능구렁이를 오천 마리쯤 삼킨 듯한 주제에 심지는 지나칠 정도로 곧다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더욱 종잡을 수도 없고 이해하기도 어렵지만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시엘은 장난스럽게 슌의 뒤통수를 톡톡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할 일은 주어졌으니까 해치워 버리는 수밖에요.

"그렇네... 그렇다면 나도 내 일을 해야겠지."

"그렇죠."

복잡한 심경을 담은 한 마디에 가뿐한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뭘 하려는 줄 알고 그러는 거야, 슌은 어이가 없어져 그만 픽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가 분명히 30분이라고 말했을 텐데."

생활관에 들어서자 마자 치료사에게서 날아든 한 마디였다. 아시엘은 움찔하며 슌에게 두른 팔에 힘을 꽉 주었다.

"헤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그렇게 뒈지고 싶으면 나한테 말 하라고 했을 텐데? 공 들일 필요 없이 직접 죽여 주겠다고."

"아직 죽을 나이는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요!"

치료사가 으르렁거리며 성큼성큼 다가서자 아시엘이 등에 업힌 채 슌의 어깨를 잡아 당겼다. 덕분에 균형을 잃은 슌이 기함을 터뜨렸다.

"야, 야야! 넘어진다고!"

"슌, 그 녀석 내려 놔. 내가 저걸 아주...!"

"살려놓은 거 아까우니까 뒈지지 말라면서요!"

아시엘이 다시 그를 잡아 당겼고 슌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 그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코앞에서 닥쳐 오는 치료사 역시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슌, 내려놔. 조그만 게 말대꾸만 잘 해! 네놈 또 상처 찢었지. 안 봐도 뻔하다."

"또라니요, 지금까진 얌전히 잘 있었잖아요! 이번이 처음이라고요!"

슌을 방패 삼아 아시엘이 대꾸했다. 둘 사이에 끼인 슌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릴 수밖에 없었다. 내려놓기엔 후에 아시엘에게서 돌아올 후환이 두려웠고 그렇다고 계속 방패막이 신세로 있기엔 치료사의 맹공이 너무 위협적이었다. 그 때 마침 2층 계단에서부터 구원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고 있어, 세 사람. 아시엘은 또 왜 슌한테 업혀 있는 거야?"

"아저씨!"

루이카엔의 어이없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아시엘은 그의 곁에 있는 루이스를 발견하고 곧장 화색을 띠었다. 그는 언제 달라붙어 있었냐는듯 슌의 등에서 폴짝 뛰어 내려와 루이스에게로 달려갔다. 멍청아, 뛰지 마! 사나운 고함이 곧장 뒤따랐지만 아시엘은 신경쓰지 않았다. 루이스가 아들을 마주 껴안아 주었다.

"팔팔하네. 이제 걱정 안 해도 되겠어."

"히히. 그렇다니까요.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그가 부드럽게 미소 짓자 아시엘은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었다. 루이스는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많이 여위었네."

"이제부터 굶은 만큼 잘 먹을 테니까 걱정 말아요."

아시엘은 싱긋 어른스럽게 웃었다.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느낌에 루이스는 남몰래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조금 늦었지. 귀찮은 잡것들을 좀 떼어 놓느라고 시간이 걸렸지 뭐냐."

"괜찮아요. 아저씨야말로 얼굴 너무 상하신 거 아니에요? 아주 폭삭 늙어 버리셨네."

"그게 누구 때문일까, 요 맹랑한 꼬맹아."

그는 아시엘의 조그만 코를 아프지 않게 꼬집고 흔들었다. 아시엘은 끙 신음을 흘리고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죄송합니다아..."

"일어났으니 됐어. 다신 그러지 마. 네 아버지 심장 떨어지는 꼴 보고 싶어서 그러냐."

짐짓 엄하게 나무라는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는 킥 웃으며 손을 풀어 주었다. 곁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루이카엔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거 가족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습니까."

"네놈도 이렇게 예쁜 아들 가져 보던가. 아니면 얼른 지긋지긋한 일에서 손 떼고 장가 가던가."

"싫습니다. 경도 장가는 안 가셨잖아요. 어쨌든 슌을 마중하러 보내길 잘 했네. 도대체 뭘 했길래 셔츠가 그 모양이야? 그리고 왜 업혀온 거고."

잠깐 눈을 데굴 굴리던 아시엘은 어깨를 으쓱했다.

"잠깐 말 안 듣는 멍멍이 좀 잡느라요."

"누군지 대충 예상은 간다만. 얼른 들어가서 붕대나 갈고 와. 치료사 영감 눈에서 불나기 전에. 이제 슬슬 해야 할 이야기도 조금 있고."

"네-"

루이카엔이 툭툭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하는 말에 아시엘이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에서  치료사가 심상치 않은 시선을 쏘아대는 모습이 아무래도 슬슬 돌아가지 않으면 나중에 정말 호되게 깨질 것 같았다. 그는 아쉬운 얼굴로 루이스에게서 떨어져 나와 몸을 돌리려다 아, 하고 다시 단장에게 시선을 주었다.

"조금 이따가 손님이 올 거예요. 아마 저한테 볼일이 있다고 할 텐데, 그냥 들여 보내 주세요. 우리가 나중에 해야 하는 이야기랑 꽤 관련이 있을 사람이니까요."

"뭐? 그게 누군데?"

"루이카엔 씨도 아는 사람이요."

씨익 개구쟁이같은 미소를 끝으로 아시엘은 종종걸음으로 치료사를 따라가버렸다. 도대체 누가 온다는 거야, 남겨진 루이스와 루이카엔은 어리둥절한 시선을 교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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