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69화 (269/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54. 두 번째 서막 (3)

"걸레짝이 따로 없네."

아시엘은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보며 픽 입꼬리를 올렸다. 벌어진 셔츠 아래로 드러난 하얀 상체에는 섬뜩할 정도의 관통상흔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밖의 언제 생겼는지 모를 흉터들과 그 위에 앉은 딱지들, 생채기, 상처. 게다가 안 그래도 작던 체구가 마른 덕분에 더욱 왜소해 보였다. 덕분에 전에 입던 사이즈대로 맞춰 두었다던 제복이 꽤 헐렁했다.

"살이야 다시 찌우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아무리 사탕을 주워 먹어도 절대 살이 붙지 않던 몸뚱이가 체중이 줄었다고 해서 순순히 불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결국 아시엘은 한숨을 푹 내쉬며 붕대를 다시 둘둘 여미고 벨트를 꽉 졸라매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그 때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크, 아시엘이 흠칫하기가 무섭게 불호령이 떨어졌다.

"얌전히 누워 자라는 말 못 들었냐,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아. 옷은 또 왜 갈아입고 지랄이야? 설마 나갈 생각은 아니지?"

"아... 헤헤."

나갈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그 말을 내뱉었다간 눈앞의 분노한 치료사에게 분쇄당할 것 같은 기분에 아시엘은 어색한 웃음만 내비칠 뿐이었다. 치료사는 화를 삭이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놈의 기사단은 단체로 뒈지고 싶어 환장한 놈들만 모아 뒀나. 얼른 침대로 돌아가. 지금 상처 벌어지면 답도 없어."

"괜찮아요. 다 나았어요."

눈을 뜬 지 이제 이틀이 지나가고 있었다. 첫째 날은 하루 종일 멍한 정신에 간헐적으로 튀어 나오는 악몽들과 싸워야 했고 둘째 날은 그야말로 온 몸을 칼로 쑤시는 것 같은 통증과 싸워야 했다. 그리고 오늘로 삼일 째. 여전히 근육통과 덜 아문 상처로부터 전해지는 찌릿찌릿한 감각 때문에 몸이 부서질 것 같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움직일 수는 있었다.

"죽고 싶은 거면 내가 친히 그 머리통을 베어 주겠다만, 힘들게 살려 놨으니까 그럴 수야 없지. 도로 누워."

"괜찮다니까요. 계속 처박혀 있다간 더 골병들겠어요."

"더 골병 들 것도 없으니까 그냥 누워. 말 안 들으면 카이스 녀석 불러서 억지로 눕히라고 할 거다."

"잠깐만, 잠깐만 바람 쐬고 올게요. 네?"

아시엘이 두 손까지 모아 가며 애교스럽게 말하자 그는 지끈거리는 골을 부여잡고 으르렁거렸다.

"30분 내로 안 돌아오면 직접 찾아가서 끌고 온다. 뭐, 어디 숨겨 놓은 애인이라도 있냐? 왜 이렇게 똥강아지 마냥 쏘다니지 못해서 안달이야."

"애인 보다는 오히려 강아지 쪽에 가까울 걸요."

웃음기 섞인 그의 말에 순간 치료사는 의아한 표정을 했다가 이내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노는 것도 좋지만 살살 해라."

"네에."

아시엘은 싱글싱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쯤 전부터 그랬듯, 황자궁은 귀족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갖가지 새로이 자금을 받아 시작하게 된 사업들과 라이펜이 맡긴 업무들의 서류에 둘러싸인 유트리안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쉽지 않지요?"

곁에서 그런 그를 안쓰럽게 지켜보던 웨슬린 백작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것보다... 잠깐 가보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어딜 말입니까."

유트리안은 고개도 들지 않고 냉정히 대꾸했다. 그 뜻을 모를 리 없는 백작의 얼굴이 살며시 굳었고 파슬렌 공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진심이십니까."

"제가 어딜 가야 한단 말입니까."

아시엘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게 벌써 이틀 전이었다. 하지만 유트리안은 그것을 무시하고 궁에만 틀어박혀 외출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파슬렌 공작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허나 전하. 지금 찾아가지 않는다면 나중에 후회하실 지도 모릅니다."

"후회라니요. 전 그런 거 안 합니다. 그리고..."

그 녀석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런 말을 꿀꺽 삼키며 그는 다시 눈앞의 숫자들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풀리지 않던 게 새삼 술술 잘 해결될 리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한 지금이라면 더더욱. 결국 그는 끄응, 신음을 흘리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잠깐 바람 쐬러 정원에 나갔다 오겠습니다."

"그러십시오."

공작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트리안은 그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 그대로 방을 나섰다. 그런 시간도 아까워 손에 서류 두어 장을 챙긴 그였다.

제법 선선해진 바깥 공기가 온갖 생각들로 꽉 들어찬 머릿속을 어느 정도 씻어 주는 느낌이었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스트레칭을 했다. 그러다 곧 그는 몸을 축 늘어뜨리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쓸데없이 맑은 날이었다. 적당히 바람이 부는 가운데 구름이 몇 점 동동 흘러가는 그런. 그 녀석이 좋아할 만 한 날씨인데,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떠올린 유트리안은 이내 고개를 세차게 내젓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자신에게는 걱정할 권리조차도 없었다. 의심하는 말들을 쏘아 붙이며 그를 사지로 내몰았던 것은 다름 아닌 유트리안 자신이었으니.

꽈악, 서류가 쥐어진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그 바람에 종이가 구겨져 버렸지만 그는 그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한심하게."

너무 엄청난 일이어서 얼굴을 맞대고 사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죽지 않고 깨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리고 정말로 힘을 갖추기 전까지는 그의 앞에 나타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휘이잉, 그 때 갑자기 돌풍이 불어 닥쳤다. 바닥에 쌓여 있던 마른 잎들과 모래가 훅 일어나며 세차게 몰아쳐 그는 저도 모르게 팔을 들어 얼굴을 막았다. 그리고 잠시 후 바람이 어느 정도 잠잠해졌다 싶을 때 유트리안은 손을 내렸다. 그리고 거짓말 같은 광경이 시야에 잡혔다.

마찬가지로 갑작스러운 바람에 놀란 듯, 한쪽 손으로 작은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상징과도 같은 하얀 제복이 바람결에 너울거리고 긴 코트 안에 살짝 드러난 것은 그의 분신인 금빛의 레이피어. 조금 여윈 몸이 평소보다도 작아 보였다.

마침내 팔이 거두어지고 잠시 항의하듯 하늘을 쏘아 보던 붉은 눈동자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유트리안을 발견했다. 아시엘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지어지기 무섭게- 유트리안은 그대로 빙글 돌아, 전속력으로 달아났다.

"아."

설마 도망칠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아시엘의 얼굴에 황당함이 깃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잠시 고민하던 그는 주변에 적당한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조준, 발사!

따아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나뭇가지에 뒤통수를 강타당한 황자가 휘청했다. 그리고는 다시 팩 돌아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무슨 짓이야, 이 자식아!"

"그러게 누가 도망치라고 했어요? 막 일어났지만 아직 그럴 기력 정도는 남아 있거든요. 얼른 이리 와요."

아시엘이 생긋 웃으며 손짓했다. 하여간 저 여우같은 놈!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투덜거리며 유트리안은 주춤주춤 그에게로 다가갔다. 하지만 가까이 갈 엄두는 나지 않았던 듯 다섯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그는 멈춰 섰다. 쯧, 언짢게 혀를 찬 아시엘은 성큼 크게 보폭을 옮겨 그에게 바싹 다가섰다.

그렇게 눈싸움이 시작되었다. 아시엘은 미소를 담은 얼굴 그대로 말똥말동 그를 올려 보았고 유트리안은 시선을 피하지 못해 꺼림칙하게 그를 마주 내려다 보았다. 하지만 잠시 후, 유트리안이 이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러고 있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 괜찮냐?"

"보시다시피."

"벌써부터 돌아다녀도 되는 거야?"

"글쎄요. 치료사 할아버지한테 떼써서 나왔어요. 누구누구가 코빼기도 안 보이길래."

아시엘이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하자 그는 어이가 없어졌다.

"뭐야, 그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은. 고민한 내가 멍청이 같잖아!"

"아무렇지도 않진 않아요. 아파 죽겠거든요, 환자가 간신히 아픈 몸을 끌고 만나러 왔더니 도망이나 치고. 양심이 있어요?"

"환자가 황자한테 나뭇가지 냅다 던지는 건 양심 있는 일이냐, 이 망할 꼬맹아."

"누가 맞으라고 했나요. 못 피한 게 바보지."

밉살맞게 대꾸한 아시엘은 거기다 덧붙여 베, 혀를 빼물었다. 이 자식 진짜 얄밉다! 오랜만에 부글부글 속이 끓어오르는 기분에 유트리안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아, 이 쥐방울 만 한 걸 때릴 수도 없고!"

"쳐 보시던가요. 맞아 줄 거라고 생각해요?"

아시엘은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끼고 그를 비스듬히 비웃듯 바라보았다. 하, 하! 유트리안은 헛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걱정한 내가 등신이지."

"바보 같은 황자님. 그걸 이제야 알았어요?"

그걸 마지막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아시엘은 별로 할 말이 없었던 때문이었고 유트리안은 어이와 함께 할 말까지 없어진 탓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유트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 미안. 그리고 고맙다."

"네?"

아시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무거워진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유트리안은 쯧 혀를 차고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었다.

"그리고 유트로 됐어. 밖에 나갔을 땐 잘도 말 놓더니 뭘 새삼스럽게 황자님이야."

"호오..."

아시엘은 새삼스럽게 유트리안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의 시선이 뜨거워지자 유트리안은 주춤 뒤로 물러섰다.

"뭐, 뭐?"

"그러면 친구로 막 대해도 된다는 뜻?"

얼핏 들으면 천진한 물음에 유트리안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야 차마 낯을 내밀 수가 없어서 도망쳤고, 방금도 얼결에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아시엘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그는 생긋 웃으며- 작은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럼 일단 한 대만 맞자."

"뭐?"

"그 정도 양심은 있지? 한 대로는 모자라다고 생각하지?"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은 취소. 유트리안은 아무 말이나 내뱉은 자신의 주둥이를 백만 번은 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시엘이 실실 웃으며 하는 말에 반박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저 조그만 주먹에 호되게 맞기도 싫어- 유트리안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만.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일단 맞으라고. 맞을 짓 한 건 사실이잖아."

"황족에 대한 예우는 어디다가 팔아 먹은거야!"

"예우 차원에서 일단 물어 봐 줬잖아! 그러니까 맞으라고! 내가 왜 여기까지 왔겠어? 먼저 찾아오면 한 대로 참으려고 했는데 환자를 기어코 기어 나오게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지, 응?"

"어차피 때릴 생각이었네, 뭐! 그리고 내 핑계 대지 마! 좀 쑤셔서 억지로 나왔다는 거 누가 모를 줄 아냐!"

또다시 두 사람의 익숙한 말싸움이 시작되었다. 경비를 서던 병사들은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고래고래 고함 치는 커다란 목소리들은 황자궁 내부에까지 흘러들었다. 파슬렌 공작은 느긋하게 차 향기를 즐기며 말했다.

"그러게 먼저 찾아가는 게 좋다니까. 전하도 험한 꼴 보시게 생겼군."

"하하... 즐거워 보이십니다. 아직 경에 대한 혐의와 의문은 전혀 풀리지 않았는데요."

웨슬린 백작이 어색한 웃음 소리를 냈다. 그러자 공작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떤가. 본인이 일어났으니- 그리고 저렇게나 팔팔하니까 곧 밝혀질 테지."

속을 어떨지 모르겠다만. 뒷말을 삼키고 그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따라 차가 더욱 맛이 좋은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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