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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64화 (264/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50. 변화(2)

그 날 저녁, 유트리안은 사건 후 처음으로 생활관을 찾았다. 여태까지 죄책감에 휩싸여 도무지 엄두도 못 내던 방문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그를 꼭 한번은 봐야 했다. 스스로를 다잡기 위함 역시 있었다.

평소에 기를 쓰고 떼어 내려던 호위 병사들을 줄줄이 대동하고 꼭 참석해야 하는 파티가 아니라면 절대로 꺼내지 않던 정복 차림으로 나타난 유트리안을, 기사들은 조금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의중을 짐작한 루이카엔이 침착히 말했다.

"2층으로 안내해 드리죠."

"응."

유트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조금 떨어진 선 카이스가 읽을 수 없는 무심한 눈빛으로 지켜보다 이내 등을 홱 돌리고 그 자리에서 떠나 버렸다. 황자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곁눈질하고는 이내 루이카엔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몇 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유트리안에게는 그 순간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호위병들까지 우르르 복도를 통과해 아시엘이 잠들어 있는 방 앞에 섰을 때, 그는 긴장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순간 약 냄새가 훅 끼쳐 왔다. 그를 위해 병실처럼 꾸며진 방은 달랑 커다란 침대 하나와 몇 가지의 소박한 가구들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침대맡에서 손질한 약초를 정리하던 치료사가 황자를 발견하고는 몸을 일으켜 뒤로 물러섰다. 유트리안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 네놈이 시끄러운 거 싫어하는 거 알면서도 이딴 짓 한다고 투덜거리지 마라, 너. 네가 자초한 일이니까."

작게 중얼거리며 그는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지나치게 커 보이는 침대에 고스란히 놓인 깨끗한 얼굴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안 그래도 중성적인 얼굴은 며칠 새 더욱 선이 가늘어져 정말 툭 치기만 해도 그대로 바스라질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것은 여전했다. 그가 보여 줬던 모든 강함은 두 눈에서 뿜어져 나왔던 건지 붉은색의 선명한 눈동지기 보이지 않는 지금의 아시엘은 너무나도 작고 약해 보였다.

무심코 손을 뻗어 시트 위에 가지런히 올려진 가느다란 손목을 잡아 보려던 유트리안은 움찔하며 손을 거두었다. 순간 그 날의 피에 젖은  모습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오른 탓이었다. 그는 입술을 살짝 짓씹었다가 천천히 운을 뗐다.

"대전 회의에서의 일은 모두 전해 들었겠지. 귀족들과 백부님이 이 녀석을 의심하고 있다고."

"하오나 전하-"

"아시엘 아르셰인 경은 내 은인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에게 각별히 감사를 표하려 한다. 셀레니스 기사단의 충정을 그대들도 본받았으면 좋겠군."

무어라 말하려던 근위대장이 입만을 달싹이다 이내 고개를 숙였다. 따라 들어온 기사들은 가라앉은 눈으로 유트리안을 응시했다. 방 안에는 묵직한 침묵이 흘렀다. 그 때, 구석에 물러나 있던 카이스가 조용히 말했다.

"황제 폐하께 영광을.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 그와 저는 그렇게 맹세했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때의 맹세는 결코 잊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건 황제 폐하와 황자 전하를 성심껏 보필하겠습니다."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는데도 그 때 자리를 지키지 못해 송구합니다, 전하."

루이카엔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뒤의 다른 기사들 역시 서로 눈치를 보다 이내 그를 따라 예를 갖췄다. 이윽고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앉자 당황한 것은 근위병들이었다.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그들은 곧 허둥지둥 덩달아 무릎을 꿇었다.

좁은 방에 장관이 펼쳐졌다. 천방지축의 하얀 제복의 들개들이 여태까지 약간의 입지도 만들지 못한 철부지 황자에게 최고의 예우를 표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황제의 개 노릇만 하던 그들이 유트리안을 황제와 거의 동등하게 모시겠다는 뜻이 되기도 했으며 그것은 곳 앞으로의 행보에 방패막이 되어 주겠다는 말이었다.

봤냐, 아시엘. 네가 눈을 뜬 뒤에는 모든게 조금 더 바뀌어 있을 거야.  궁에서 엉뚱한 곳에 튀어나온 돌 취급만 받던 황자는 그렇게 첫 약속을 했다.  유트리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해가 뜨자마자 간밤에 있었던 황자의 첫 공식적인 행보는 사람들 사이로 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습격 사건 이후로 칩거만 하던 유트리안 황자가 호위병사들을 대동한 채 생활관에 방문해 직접 그의 공을 치하했다는 이야기였다. 셀레니스 기사단의 단장과 그 휘하의 부하들 역시 그를 극진히 대했다는 소식 역시 궁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귀족들의 귀에 들어갔다.

궁은 다시 한 번 시끄러워졌다. 아예 정신을 놓고 재기 불능이 되어 버린 줄 알았던 그의 움직임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게 아니냐는 무례한 이야기부터 외조부인 파슬렌 공작이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그는 사건 뒤 유트리안과 조금의 접촉도 없다는 것이 드러나며 소문은 금세 잠재워졌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처음부터 수사의 초첨을 아시엘 아르셰인에게 잡은 것부터가 잘못이 아니냐고 말하는 정의감 넘치는 말까지 떠돌기 시작했다. 황자가 미친 것이 아니라면 자신을 사지로 몰아 넣은 이에게 그렇게까지 할 리 없다며 처음 아시엘을 지목했던 귀족에게의 비난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본인들 역시 은연중에 동의하며 셀레니스 기사단의 힘을 조금이라도 줄여 보려던 속셈을 가졌던 것은 당연히 시치미를 뚝 떼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런 소식이 황궁에 머무는 중인 루이스와 황제인 라이펜 역시 당연히 아침 일찍부터 접하게 되었고- 루이스의 방, 침대에서 주인 대신 뒹굴거리던 라이펜은 곧장 박장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하하하하! 대단한데? 루이스, 너 아들 하나는 정말 잘 둔것 같다. 그 유트리안이 직접 앞으로 나서다니. 그것도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말이야."

"입 다물어, 라이펜. 그리고 넌 왜 내 방에 와서 아침 댓바람부터 난리 법석인 거냐."

루이스가 싸늘하게 쏘아 붙였다. 간신히 웃음을 멈춘 라이펜이 눈물을 훔치며 상체를 일으켰다.

"아아, 너무 그러지 마. 확실히 아시엘을 유트리안 곁에 붙여둔 건 잘 한 일이었어. 그 녀석 덕분에 바뀐 거야. 난 손 댈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뭐, 확실히 의외긴 하군. 꼴통 황자가 셀레니스 기사단의 비호를 받는다는 게 세상에 알려졌어. 원래 그 녀석의 몫이긴 했지만 새삼 자각시켜 주는 것은 다르지."

방치된 황자, 라는 것이 유트리안에 대한 전체적인 평이었다. 성격 나쁘고 버르장머리 없지만 자존심만 센 무능한 이. 덕분에 원래 가지고 있던 제 1황자라는 지위 역시 묻혀 가던 실정이었다.

"녀석도 꽤 골치 아픈 길을 선택했군."

"어차피 네 뒤를 이어 황제가 되어야 할 놈이야. 19살이나 되서 여태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단 게 더 기적이라고. 뭐, 그 덕분에 살아 남았는지도 모르겠지만. 하노빌이나 슈베이만이 좀 더 기를 쓰고 죽이려 들었으면 아마 뼛조각도 남지 않았을 테니까."

마족을 움직였다면 간단히 해결되었을 일이지만 그들에게는 유트리안을 없애는 것은 좀 더 나중으로 미뤄도 될 문제였을 터였다.

"그것보다 넌 어딜 가려고 아침부터 서두르는 거냐?"

"아카데미."

라이펜의 물음에 루이스는 담담히 대꾸했다. 의외의 답이 돌아오자 황제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루이스는 짜증스레 덧붙였다.

"급하게 오는 바람에 인수인계도 못하고 왔어. 게다가 이것저것 챙겨올 자료도 많고. 아카데미의 도서관도 자료 수집에는 꽤 괜찮은 편이니까."

"그랬냐. 완전히 들어와 지내는 줄 알았는데, 아쉽네."

라이펜이 입맛을 쩝 다시자 루이스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이딴 곳 한시도 붙어 있고 싶지 않아. 내가 전부터 말했잖아. 특히나 이런 상황이라면 더더욱. 아시엘만 아니었으면 내가 제일 먼저 네 녀석을 없애고 그 가벼운 모가지를 대공에게 갖다 바쳤을 걸."

"너무하네. 나름 오랜 지기 아니었냐?"

그가 픽 웃으며 툴툴거리는 것을 루이스는 무시한 채 가방을 챙겨 들고 몸을 일으켰다. 라이펜은 그대로 등을 돌려 방을 나서려는 그에게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주었다.

"잘 다녀와. 난 오랜만에 아들이랑 진한 대화를 나눠 봐야겠네."

"어어."

루이스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튼 무뚝뚝한 녀석. 라이펜은 불만스럽게 입을 비죽이곤 벌러덩 드러누워 버렸다.  그 때, 똑똑. 누군가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루이스는 라이펜에게 힐끗 시선을 주고는 들어와, 하고 짧게 허락의 말을 했다. 곧 문이 열리고 보좌관 페이튼이 들어왔다.

"황자님께서 폐하를 잠깐 뵙고자 청하십니다."

"오. 그래? 생각보다 빠르네."

라이펜은 픽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나도 나가봐야 겠는데. 내 아들의 탈피를 축하해 줘야지."

"축하하는 사람 치고는 표정이 미묘한데."

훅 정곡을 찌르는 말에 그가 멈칫했다. 그의 준수한 얼굴에 싱글싱글 걸려 있던 미소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이내 라이펜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내 길을 따라오지 않기를 바라는 건 어느 부모나 똑같지 않겠냐."

"그렇지."

루이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기왕이면 쓸모 없는 사람인 채로 그저 예쁨만 받으며 살아가기를 원했건만 얄궂은 운명의 장난일까- 두 아들이 택한 것은 제 아버지들과 비슷한 가시밭길이었다. 라이펜은 허공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래도 존중은 해 줘야지. 이게 운명이라면 운명이고, 지금 녀석이 아시엘을 지키고 싶어 조바심이 나 있고, 그런 상황에서 그 놈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 그것이라면  난 참견할 자격이 없어. 적어도 나보다는 훨씬 순수하잖아."

"이 제국처럼 개인의 사사로운 이유 하나만으로 움직이는 나라는 세상에 또 없을 거야. 아마 앞으로의 역사에도 없겠지. 황제란 인간이 이 모양이니."

얼핏 들으면 상처받을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라이펜은 그저 웃기만 했다. 사실 이 제국이 쑥대밭이 되건 제일 상관 없는 사람은 바로 그였다. 조국에 대한 애정이고 나발이고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인생사가 다 그런 거 아니겠냐. 난 그냥 인생을 살고 있을 뿐이야. 너덜너덜해지긴 했지만."

황제로서의 삶이 아니라 단순한 인생.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자의 말 치고는 상당히 아이러니했지만 루이스는 반박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라이펜이 원했던 것은 한 사람으로서의 인생이었으니. 그에게 제국은 단지 거추장스러운 짐덩이일 뿐이었다. 그래도 그게 인생을 망쳐 버린 이에 대한 원한을 갚은 데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어깨에 이고 갈 수 있었다.

"... 간다. 너도 나가야 할 것 아냐."

"그렇지."

루이스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걸음을 떼자, 방금 전 들었던 씁쓸한 목소리가 거짓말이라도 되는 듯 라이펜은 씨익 장난스럽게 웃으며 벌떡 일어나 친구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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