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48. 흔들리는 균형 (5)
회장이 쥐 죽은듯 조용해지자 라이펜은 천천히 운을 뗐다.
"오늘 모여주신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하는게 먼저겠지만 사안이 사안이니 그건 뒤로 미루기로 하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신하된 도리로 폐하의 근심을 덜어 드리기 위해 모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어느 노백작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라이펜은 속으로 헛웃음을 삼키며 새삼 모여든 이들을 살폈다.
단지 호기심과 무언가의 계기가 될 듯한 이 상황에 기회를 잡아 보려 찾아든 이들도 있었지만 전대 황제 때부터 꽤 이름을 날렸던 귀족들도 보였다. 루이스까지 십여 년만에 참석한 지금 그의 현황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함도 굳이 여기까지 찾아든 이유 중 하나일 터였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 교단의 사건으로 시끄러운 때 이런 일이 터졌으니 매우 유감이오. 그래서 여러분의 생각을 직접 듣고 싶었소."
"외람되오나 폐하, 유트리안 황자 전하의 용태는 어떠하시옵니까."
파슬렌 공작이 염려스럽게 묻자 라이펜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꽤 안정을 찾은 듯 합니다. 아직 거처에서 나오려고 하지는 않지만요. 그리 유약한 아이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습니까..."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표정이 개운치는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라이펜도 찔리는 게 없지 않아 있어 더 이상의 말은 아꼈다. 원래도 그리 왕래가 잦지는 않았지만 사건 후 경황이 없어 유트리안을 찾아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게 단지 정신이 없었다는 이유만이었을지, 그것은 스스로도 몰랐다. 어쩌면 은연중에 아들을 만나는 것을 꺼리고 있는지도.
"전하께서 강녕하시다니 무엇보다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슬슬 본제를 꺼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수사에 관한 것 말입니다."
슈베이만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에 라이펜의 입술이 살짝 비틀어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번 암살 기도 사건에 대한 수사는 제 1수도 경비대와 웨슬린 백작, 그리고 하노빌 백작이 맡기로 했었지요. 자객들로 보이는 무수한 시신들과 알 수 없는 몬스터의 잔해, 그리고 루아 이클립스 기사단의 레이 베르튼 경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라고 생각해야 할까요."
"그렇군요. 설마 스물도 안 된 두 기사의 손에 그 참극이 벌어졌으리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겠지요. 결국 유트리안 황자 전하의 증언에 의지할 수밖에요."
파슬렌 공작이 끼어들자 라이펜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자의 말로는 아시엘 아르셰인 경과 단 둘이 외출을 했고, 야시장을 구경하던 중 갑자기 습격자가 나타나 아시엘 경의 보호 아래 도망쳤다고 합니다. 그러다 두 사람은 시신들이 발견된 언덕의 공터까지 몰려 거기에서 기다리던 레이 베르튼 경과 마주했다고 합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루이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해가는 것을 눈치챘지만 라이펜은 무시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형님. 레이 베르튼 군이 암살자들을 이끌고 두 사람을 습격했다. 이것 이외의 시나리오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폐하께서는 제가 배후에 있다 짐작하시는 겁니까. 레이 베르튼 경을 움직여 두 사람을 습격하라 시켰다고요."
슈베이만이 입가에 미소를 드리우며 느긋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폐하. 전 그 날 저녁 황자님과 그 어린 기사가 단 둘이 궁을 빠져나갈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없었습니다. 하온데 어찌 제게 그런 일이 가능하다 말씀하시는 겁니까."
"요즘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것에 대해 연구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형님."
순간 대전이 크게 술렁였다.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것? 설마 그렇게 대놓고 쑤시고 들어올 줄은 예상치 못한듯 슈베이만의 미간이 조금 구겨졌다. 하지만 곧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요. 죄가 되는 줄은 알지만, 약간의 호기심에 말입니다."
"약간의 호기심 말씀이십니까."
라이펜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오지게도 뻔뻔한 인간이었다. 파슬렌 공작이 침착함을 잃지 않고 물었다.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것이라니, 그게 무얼 뜻하는 것입니까."
"흑마법이라 불렸던 것이지요. 언젠가 이 땅에서 사라졌던 그것이 다시 흔적을 드러내는 듯해 조금 조사해 보았습니다."
대공의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나온 흑마법, 그 한 단어에 귀족들의 술렁임이 더욱 커졌다. 질문을 던진 공작의 눈썹 역시 불유쾌하게 휘었다. 경악해 어버버, 소리를 내던 웨슬린 백작의 입에서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전하! 그것은 함부로 손 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찌 그런 일을-"
"하지만 그게 지금의 상황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겁니까."
슈베이만은 조용히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백작이 할 말을 잃고 망연히 그를 바라보기만 하자 대공은 급할 것 없이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금지되었다는 것은 저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백작. 하지만 그것은 아주 오래 전 그것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선대들이 만든 법 아닙니까. 그것이 우리 제국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된다면 약간의 변화는 언제나 필요한 법이지요. 그리고 폐하."
"말씀하세요, 형님."
"제가 그 흑마법을 이용해 황자님과 어린 기사를 바깥으로 꾀어 냈다는 이야기라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정곡을 찔러 들어오는 그의 말에 라이펜과 루이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슈베이만은 정말 안타깝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아주 약간, 흑마법에 손을 댔다고 해도 그것이 죄가 되는 겁니까. 그것으로 황자님을 어린 기사와 단 둘이서 바깥으로 나오도록 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암살자들을 도륙한 것은 그 소년입니다. 평소 본인의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요."
"... 그래서 형님께서는 지금 전혀 관련이 없다 주장하시는 겁니까?"
"저도 황자님이 겪으신 그 사건은 매우 중요한 건이고, 그만큼 폐하께서 심중이 급하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 섯부른 판단이 아니었는지."
슈베이만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의 말이 끝날 무렵 회장은 다시 조용해져 있었다. 루이스는 이를 뿌득 악물었지만 어떻게든 참아내고 있었다. 상황을 제대로 모르는 이상 웬만해서는 앞에 나서지 말라는 라이펜의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공 전하의 말씀이 옳다고 사료됩니다."
그렇게 침묵을 깬 것은 수많은 귀족들 중의 한 명이었다. 그러자 그것을 시발점으로 귀족들이 하나 둘 나서기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흑마법에 손을 대신 것은 다소 성급한 선택이셨던 듯 하나 그것으로 의심을 두는 것은 바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부디 재고하여 주십시오, 폐하."
라이펜의 미소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 때 와글와글 떠들어 대는 그들을 손을 드는 것으로 조용히 시킨 슈베이만이 다시 입술을 뗐다.
"그리고- 루이스 아르셰인 경. 그대 역시 흑마법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전해 들었습니다. 극비리에 말이죠."
"......"
루이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가 점차 온도를 높이고 있다는 것을 슈베이만이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그는 등받이에 편안히 기대며 손에 깍지를 꼈다.
"어딘가에서 흑마법의 가능성을 보고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던 중 아시엘 아르셰인 경을 만났다고 알고 있습니다."
"폐하의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전 그 배후가 당신에게 있다는 사실도 밝혀냈습니다."
드디어 루이스에게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무슨 수작이신 겁니까, 슈베이만 전하. 흑마법의 흔적이 남은 곳에는 언제나 당신의 손길이 닿아 있더군요. 최근 수도 안팎에서 일어난 이상 현상들까지 다 말입니다."
"저도 한 발 앞서 조사했던 것 뿐입니다. 그것으로 제가 이번 일을 지시했다는 것은 당치도 않는 억측이지요."
슈베이만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까 레이의 이름이 거론되었을 때부터 루이스는 당장이라도 그를 찢어 죽여버리고 싶었다. 여기가 대전이 아니었다면 당장에 실행했을 터였다.
"그리고 이번 수사의 초점을 제게 맞추는 이유가 레이 베르튼 경이라면,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다는 말씀만을 드릴 수밖에 없군요. 듣자 하니 과거 그와 아시엘 아르셰인 경이 친밀한 사이였다고요? 아카데미를 함께 졸업했다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때 루카인 아카데미에 계셨던 루이스 경의 제자가 될 수도 있겠군요. 아들의 친우였으니 당연히 아는 사이셨겠지요."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닐 터입니다, 대공."
루이스가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렸다. 존칭조차 생략한 채의 무례한 한 마디였지만 그는 질책하지 않았다. 라이펜은 짧은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그래서요. 지금 형님이 하고 싶은 말씀은 도대체 뭡니까?"
"글쎄요, 저도 잘. 어쨌든 저는 결백을 주장할 뿐입니다."
슈베이만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황제와 대공의 두 쌍을 이루는 황금빛 눈동자가 일순간 똑바로 부딪쳤다. 먼저 시선을 거둔 것은 슈베이만이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어째서 두 사람이 단 둘이서 황성을 빠져나갔는지가 아니겠습니까. 단순히 구경만이 목적이었다고 하기엔 평소 황자님은 그다지 바깥 세상에 흥미를 두지 않으셨으니."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그 때, 귀족들의 틈에서 누군가가 앞으로 나섰다. 황성을 자주 드나들며 사업을 진행하고 종종 회의에도 참석하는, 라이펜에게도 꽤 낯익은 얼굴이었다.
"말하시오."
"최근 유트리안 황자 전하와 아시엘 아르셰인 경의 사이가 가까워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공연한 황제파이자,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은 이그니스 교단과의 줄이 닿은 명단에 존재하는 이였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유트리안 전하를 바깥으로 모셔 가기 가장 쉬운 존재가 바로 그가 아닐까 사료됩니다."
"뭐?"
"평민 출신인 아시엘 경이라면 전하께 바깥의 지식을 전해 호기심을 불어넣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신뢰받는 모양이니 아무 의심 없이 황자님을 성 밖으로 빼낼 수 있지요."
역시 이렇게 되는 건가. 라이펜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대충 예상했던 바였다. 상정했던 여러 시나리오 중 가장 최악의 상황이기도 했다. 루이스가 결국 고성을 터뜨렸다.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페르난테 후작!"
"고정하시지요. 단지 그렇다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리고 정말 그가 다른 의도가 있어 황자 전하를 바깥으로 유인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몰래 황성을 빠져나가 황자님을 위기에 처하도록 만든 그 책임은 져야 할 것입니다."
후작은 짐짓 근엄하게 턱에 길게 자란 수염을 쓸었다. 루이스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하! 책임? 지금 책임이라 하셨습니까? 주군이 될 자를 목숨 걸고 지켜내 지금 생사를 오가는 아이에게 책임이요?"
"하지만 어린 판단으로 자신이 지킬 수 있다는 판단도 제대로 서지 않은 채 황자님을 바깥으로 모셔간 것은 큰 죄입니다. 위험 상황에 빠졌으니 남은 삶을 바쳐서라도 주군을 지키는 것은 기사의 당연한 도리 아니겠습니까."
"후작님, 갑자기 끼어들어 송구하지만 아시엘 아르셰인 경은 그리 어리석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신중하고 사려가 깊어 판단력 또한 그 여느 기사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보다 못한 웨슬린 백작이 그를 거들고 나섰다. 하지만 후작 역시 물러날 생각은 없는듯 했다. 그 때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윈프라운 후작이 손을 들었다.
"파견지에 갈 때마다 대형 사고를 몰고 오는 그가 말입니까? 결과야 어떻든 주군을 위험에 몰아 넣었으니 그 값은 치러야 할 것입니다. 의식이 돌아온 뒤라도 말이지요."
"그리고 아시엘 아르셰인 경을 위주로 수사하여 보심이 옳을 듯 합니다. 폐하와 루이스 경께는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정황상 음모를 꾸미기 가장 좋은 위치에 있던 것은 아시엘 경입니다. 마침 사망한 레이 베르튼 경과도 연관이 있던 모양이니 조사할 가치는 충분하다 사료됩니다. 그리고 유트리안 전하가 그를 아끼는 듯 하니 친우를 감싸기 위해 거짓 증언을 했을 가능성 역시 두셔야 합니다."
그 뒤로 쏟아져 나온 말들은 대공파 황제파 너나 할 것 없이 비슷한 내용들이었다. 파슬렌 공작 역시 침묵을 지켰고 라이펜은 어이없는 헛웃음을 터뜨려야 했다.
"지금 황자의 말을 의심하는 건가."
"의심이 아니오라- 단지 그럴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냉정함을 잃지 마시고 객관적으로 판단을 해야 합니다."
저들 중 몇은 이그니스 교단 건으로 셀레니스 기사단에 앙심을 품은 자들일 터였고, 몇은 그 장부에 잔뜩 쫄아들어 대공에게 보호를 요청한 이들일 터였으며 그 나머지는 정말로 그 의견에 동의하는 듯 보였다. 군중 심리가 발동한 이들에게는 천하의 루이스 아르셰인 역시 통하지 않았다.
그다지 새삼스럽지는 않았지만 역시 황당했다. 네놈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사이가 좋았다고. 지끈지끈 아파져 오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라이펜은 실실 웃음을 터뜨렸다. 슈베이만이 언제부턴가 자신의 이복 동생을 조용히 응시하며 특유의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한때는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고, 지금은 세상 무엇보다 증오하는 그것이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형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깔끔한 패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