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41. 달빛 아래의 세상에서 (2)
"옛날 옛날, 사실은 그렇게 먼 과거도 아니지만 말이야. 땅도 넒고 돈도 많은 부자 나라에 멍청한 황제가 살았어. 좀처럼 회임을 하지 못하는 황후 대신 후궁을 맞은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첫째 황자를 얻을 수 있었지."
마치 노래하듯, 기이한 침묵에 휩싸인 언덕에 레이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을 포위한 자객들과 몬스터들은 꼭 소년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는 것처럼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5년 뒤, 황후가 드디어 적통이 되는 황자를 낳았고 황제는 뛸 듯이 기뻐했어. 온 제국은 축제가 벌어졌지. 제 1황자의 어머니인 후궁 역시 아낌없이 축하를 보냈어. 그녀의 곁에는 막 5살이 된 자그마한 아들이 있었지."
자신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든 그의 두 눈이 충만히 반짝였다. 친구의 취한 듯 몽롱한 얼굴을 바라보며 아시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소박하고 밝던 소년이었다, 레이는. 소심한 면이 있었지만 그래도 유쾌하고 솔직한 친구였다.
"어머니가 달랐지만, 두 황자는 참으로 많이 닮아 있었어.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머리칼에 황금색의 눈동자. 그래, 거기 황자님처럼. 그건 오래 전부터 황가의 상징이 되었지. 그리고 성격, 행동 역시 잘 맞아서 그런지 참 사이가 좋았대. 두 어머니들도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애초에 그 황제를 사랑해서 결혼한 것은 아니니까. 각자 계승권이 있는 아들을 둔 황후와 후궁의 관계라고 하기 힘들 정도로 둘 역시 친한 친구 사이 같았다나 봐."
그래서 지금의 광경은 악몽보다도 더 지독했다. 레이의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는 손이 귀여운 강아지를 쓰다듬듯 진물이 뚝뚝 떨어지는 몬스터를 어루만졌다. 새빨간 붉은 제복의 어깨에 달빛이 쏟아졌다. 같은 얼굴, 같은 목소리였지만 그는 레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았어. 원래 몸이 약하던 황후가 일찍 죽어 버렸거든. 그것으로 힘의 균형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역시 제 1의 황위 계승자는 황후의 몸에서 난 둘째 아들이야. 그것은 변치 않는 사실. 하지만 정작 황태자 책봉을 받은 둘째 황자는 별로 황위에는 관심이 없었지. 그리고 형 쪽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어. 동생은 언제나 이야기하곤 했지. 이딴 황성 벗어나서 자유롭게 살겠다. 이 빌어먹을 제국은 형님께 떠넘겨 버리겠다고. 그게 농담이 아니라는 건 사이 좋은 형제 단 둘만의 비밀이었어."
연극 배우라도 된 마냥 과장된 몸짓을 하며 그는 키득거렸다.
"하지만 모든 것을 박살낸 것은 하나의 뜨거운 마음, 바로 사랑. 두 형제는 같은 여자를 사랑했어. 밤하늘같이 예쁜 검은 머리칼의 소녀였대. 하잘 것 없는 백작가의 딸이었던가? 그녀는 감히 두 황자를 두고 '선택'을 했어. 그리고 그것은 당시 황태자였던 동생. 실연한 형은 자괴감에 빠졌어. 아주아주 깊이 사랑했거든."
아무에게도 듣지 못한 이야기였다. 유트리안은 침착을 가장하려 애쓰며 레이를 노려보았다. 지금 그는 제국이 갈라진 것의 이유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는 욕심이 있는 자였어. 그리고 그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였지. 아들이 내켜하지 않으니 상황을 가만히 지켜 보고만 있었을 뿐이었던 거야. 그리고 그들은 결심했지. 모든 것을 빼앗겠다고. 공교롭게도 그 직전에 황제가 차를 마시다 독살당한 것은 과연 우연이었을까? 그 반역의 죄를 물어 그는 사랑하던 여자를 죽이고 그녀의 가문을 멸망시켰어. 절망에 빠진 황태자 역시 독기를 품었지. 그는 결국 황제를 자처했어. 그토록 싫어하던 자리에, 오로지 형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오른 거야. 자, 그리고 지금부터 다시 이야기는 시작이야. 아시엘. 너도 익히 알고 있을 이야기."
레이의 은근한 시선이 아시엘에게 닿았다.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레이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형제는 서로를 증오하는 데 제국을 이용하기로 했어. 단지 그뿐. 대공과 황제가 된 그들은 각자 결혼도 해서 아들을 두게 되었어. 이제 사랑 같은 건 어찌되도 좋게 되었어. 첫사랑의 감정은 이미 심장 저 아래에서부터 동이 나 버렸는데 서로에 대한 증오는 어딜 가도 사라지지 않아. 그래서 잠시 고민하던 황제와 대공은 복잡한 건 치우기로 했어. 이 제국에서 서로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것에 모든 것을 걸기로 했지. 그들은 망가져 버린 거야. 자신의 충실한 말이 되어 줄 기사단을 만들고, 제 세력을 조금씩 늘려 갔어. 하지만 그래선 이 균형을 깨기가 힘들어. 그래서 후궁이 병사한 뒤 그녀에게서도 자유로워진 대공은 금단의 마법에 손을 댔어."
"금단의... 마법?"
유트리안이 망연히 중얼거리는 소리에 아시엘의 눈가가 살짝 움찔했다. 그것을 알아챈 레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 쪽으로 사뿐사뿐 발걸음을 뗐다. 아시엘은 피하지 않고 그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레이의 목소리가 조곤조곤 이어졌다.
"아울 님은 이 세상에 흥미가 많은 분이야. 특히 인간에 대해. 그 분은 당신의 마력과 여러 인간으로 실험을 하셨어. 하지만 인간 주제에 그 분들의 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지. 거의 다 흉측하게 변형되거나 그 자리에서 몸이 폭발해 죽어 버렸어. 하지만 드디어 첫 번째 성공 사례가 나타난 거야, 아시엘."
아시엘의 코앞에 멈춰 선 레이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아시엘의 목을 가볍게 쥐었다. 쿵, 쿵, 점차 빨라져 가는 박동이 느껴지는 바로 그 자리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네 안에 흐르는 이 피 말이야."
"아닌 밤중에 몬스터라니."
케빈은 눈 앞에 펼쳐진 이질적인 광경에 입꼬리를 비틀었다. 흉측한 모습의 몬스터들이 생활관 앞을 빽빽히 채우고 있었다. 생활관에 복귀해 시간을 보내던 기사들은 어느 순간 감지된 수상쩍은 기척에 모두 튀어나와 작금의 상황과 마주하고 있었다. 제르닌은 혀를 쯧 차며 검을 뽑아 들었고 아델레트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별 꼴을 다 보겠네. 황성에 이런 몬스터가 출몰한다는 보고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데."
"왔냐?"
루이카엔이 태평하게 뒤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모습을 드러낸 몬스터들은 목울대를 울리며 점차 가까이 다가왔다. 저벅, 저벅. 생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발소리와 그 형태가 꼭 살아 움직이는 시체를 앞에 두고 있는 것만 같았다. 늑대형으로 변한 벨킨과 베르칸은 몸을 바짝 숙이고 전투 태세를 취했다.
"상황이... 좀 곤란하게 되어 버렸는데. 황자님이랑 아시엘도 돌아오지 않는다고?"
"이쪽이 이 모양이라면 둘한테도 무슨 일이 생겼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루이카엔의 말에 케빈이 덧붙였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왔다. 카이스는 입을 꾹 다물고 검자루를 고쳐 쥐었다.
"이것들 다 처리하고 나면 전 그 녀석 찾으러 갈 겁니다."
"아마 괜찮을 것 같긴 하지만. 오히려 습격당했는데 이 자리에 없다는 건 운이 좋은 일일지도 모르지."
언제나와 같이 누군가가 가볍게 던진 말에 모두가 픽 웃으며 동의했지만 단 두 사람, 루이카엔과 케빈만은 속이 초조하게 타들어가는 속을 어쩔 수가 없었다. 유트리안이 함께 모습을 감췄다는 것은-
지금 상황의 가운데에 서서, 적에게 가장 접근해 있는 것은 아시엘이었다. 가장 위험한 것은 그였다.
왜 이때까지 생각하지 못한 거야. 철컥, 루이카엔은 자책하며 땅을 딛은 발에 힘을 싣고 검을 꽉 쥐었다. 생활관에서 유일하게 수정구가 있는 집무실은 한참 전부터 비어 있었다. 주인인 그가 없는 동안은 그 누구도 발을 들이지 않는 곳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 곳을 정리해야 했다. 물론 눈 앞의 것들이 하나 하나가 다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것은 이 곳의 모두가 이미 깨닫고 있었다.
"크으아아앙!"
그의 살의에 반응한 몬스터가 크게 울부짖으며 파박 달려들었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다른 개체들 역시 침을 흘리며 기사들에게 뛰어들었다. 기사들은 저마다 무기를 뽑아들고 응수했다.
아시엘은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목에서 무언가가 꽉 틀어막고 있는 것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망설이던 입술은 이내 움찔 일그러졌다. 레이의 손이 상처 부분을 건드린 탓이었다.
"아파? 어째서 적대하는 거야? 넌 우리와 같은데."
작은 속삭임 속에 든 것은 무구한 의문이었다.
"있잖아, 네 어머니는 최고의 그릇이었대. 금발에 푸른 눈의, 참 아름다운 아가씨였다고 하더라. 실험이 진행되면서 그 바다같던 눈동자는 점차 붉은 색으로 물들어 갔지만 이때까지와의 것과는 달라. 금빛 광택이 도는 화톳불 빛의 적안은 그 누구의 것보다도 맑고 선명했지. 그래, 꼭 너처럼."
레이는 자신의 손에 묻어난 아시엘의 피를 힐끗 보고는 이내 빙그레 미소지었다.
"난데없이 황궁으로 납치되어 왔지만 그래도 굳세고 강한 여자, 대공을 상대로 농담 따먹기를 하고 툭하면 대공 전하의 궁에서 도망쳐 나와 황성을 돌아다녔대. 잠긴 방에 가둬 놨지만 마족의 힘을 받은 그녀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던 거야.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힘에 적응했고 자유 자재로 썼어. 이때까지의 실험체가 보였던 인격 붕괴나 신체 변형은 찾아볼 수 없었어."
그만해. 아시엘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만. 듣고 싶지 않아. 하지만 온 몸은 얼어 붙은 듯 꼼짝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녀는 달콤한 사랑에 빠졌어. 대공 전하의 궁에서 일하던 한 시종과. 첫 눈에 반한 그들은 대공 전하와 마족들의 시선을 피해 사랑을 나눴고 이내 도피를 하기에 이르러. 저도 모르게 넋을 놓을 정도로 아름답지만 그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한 여자와 소박하지만 인정 많던 한 남자. 그들은 하노빌 백작령의 끄트머리 마을에 다다랐고 어머니를 쏙 빼닮은 아들을 낳아 행복하게 살아갔지. 사랑은 날로 깊어만 갔고 그녀는 이내 자신의 힘에 대해서 새카맣게 잊은 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어. 하지만- 그건 얼마 가지 못했지."
레이는 몸을 빙글 돌려 다시 아시엘에게서 천천히 멀어졌다. 그의 뒷모습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느날,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가 실종되었어. 그녀는 애타게 기다렸지만- 며칠 뒤 돌아온 것은 처참한 시신. 사지가 찢기고 두 눈이 파먹힌 채 난자당한 시신 말이야. 그 때 그들의 아이는 고작 5살이었지. 집 앞에 버려진 남편의 시신에 여자는 오열했고, 또 절망했고 이내 분노했어. 그리고 그녀는 자신 안에 잠들어 있던 힘을- 퍼어엉."
다시 아시엘을 마주 보며, 그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폭발시켰어."
아시엘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 끝이 덜덜 떨려 왔다. 이것은 그의 이야기였다. 비명과 아우성, 그리고 폭발음이 이명처럼 웅웅 덮쳐 왔다. 어디선가 진한 탄내가, 혈향이 코 끝을 찌르는 것만 같았다.
"마을의 생존자는 단 한명. 하지만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버렸지. 아울 님은 흡족해 하셨다고 해. 그녀가 보여 준 힘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거든. 실험은 대 성공이었던 거야."
"그럼 그게, 다 실험... 이었다고?"
"그럼. 녹스 님의 능력은 정신지배, 인간을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뜨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야. 아무리 굳세고 강하던 그녀라도. 인간 남자 하나 납치해서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것도 일도 아니지."
간신히 그가 더듬더듬 묻는 말에 레이는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힘을 이기지 못해 여자는 피부가 녹고 뒤늦게서야 변형으로 온 몸이 일그러져 곧 목숨을 잃었지만 그래도 괜찮았어. 하지만 한 가지 예상하지 못한한 것은- 아들이었던 네가 당시의 루아 이클립스 기사단이 마을을 찾기 전, 이미 하노빌 백작령의 중심지 쪽으로 가 버렸다는 점일까. 심지어 기억까지 잃은 채 말이야."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아시엘의 모습이 만족스러운지 그의 눈꼬리가 가느다랗게 찢어졌다.
"웃기는 일이지. 그리고 또 공교롭게도 네가 루이스 교수님의 손에 거둬진 것 역시 정말 기막힌 일이었어. 실은 네가 루이스 경의 뒤를 이어 황성에 발을 들일 때까지도 아울 님이나 대공 전하는 네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거든. 그 뒤로 네 어머니만큼 힘을 잘 받아들이는 실험체는 찾지 못하고 아울 님은 다음 단계의 실험에 돌입하셨지. 인간 이외의 것에 힘을 담아 분리시키는 것 말이야. 너도 알지? 그 구슬."
숨이 가빠지려는 것을 아시엘은 억누르려 애썼다. 환청과 환각이 그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불타는 민가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사람들, 그리고 춤추는 여인. 그 때, 덥석- 피에 젖어 미끌거리는 손을 낚아채는 온기에 그는 흠칫 정신을 차렸다.
"...아."
"야. 무슨 말인지는 하나도 모르겠지만 일단 진정해. 네가 이러면 내가 뭐가 되는 거야? 지켜 준다면서, 이 망할 꼬맹아!"
멍해진 그의 시야에 유트리안의 성난 얼굴이 들어왔다. 그랬지, 혼자 있는 게 아니었지. 쿵쾅쿵쾅 뛰던 심장이 점차 제 페이스를 찾아갔다. 레이의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킨다고, 널? 아시엘이?"
"그래. 이 자식의 임무라고. 안 그러면 해고당할 테니까."
유트리안이 그를 노려보며 쏘아 붙였다. 그에게서 방금 전까지의 패닉 상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잠시 그를 어이없이 바라보던 레이는 이내 입꼬리를 올렸다.
"아시엘, 멍청한 황자를 버려 두고 나랑 같이 가자. 넌 최고의 걸작품이랬어. 누구보다도 인간답고, 온전해. 네가 잘난 것도 모두 아울 님의 은덕이었던 거야. 그런 거였다면 난 널 질투할 필요가 없었어. 나도 참 바보같은 짓을 했다니까?"
"같이... 가자고?"
"응. 대공 전하께서도 그러셨어. 죽이는 것은 황자 뿐, 넌 데리고 돌아오라고. 함께 예전처럼 행복하게 지내는 거야! 나쁠 것 없잖아? 지금 네 곁에 있는 건 아둔한 인간들 뿐이야. 격에 안 맞다고!"
아시엘이 천천히 묻자, 그는 반색하며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아무도 널 괴롭히지 않아, 아시엘. 교활한 황제가 널 앞세운 이유가 뭐겠어? 이 모든 걸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널 미끼로 해서 대공 전하에게 보인 거라고. 숨겨 줘도 모자랄 판에 말이야. 이대로 간다면 넌 결국 이용당하다 죽어버릴 거야. 네가 원한다면 루이스 교수님도 지켜줄게."
"...하!"
잠시 뜸을 들이던 아시엘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아직까지 자신의 손을 꽉 잡고 있는 유트리안을 부드럽게 떼어 놓고 한 발작 나아갔다.
"그래? 재미있는 이야기 잘 들었어, 레이. 내가 그렇게 태어난 거였어. 이제야 궁금증이 풀리네."
"그렇지? 그러니까 이제 나랑 가자. 응? 우린 제일 친한 친구잖아."
레이가 함박미소를 가득 얼굴에 걸었다. 유트리안은 불안함에 아시엘을 따라가려 했지만 주변의 몬스터들과 자객들이 위협을 가해 오는 바람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아시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청량한 월광 아래에서의 그는 그 여느 때보다도 새하얗고 아름다웠다. 그는 고개를 들어 똑바로 레이를 바라보았다. 맑고 깨끗한 적안이 정면으로 자신을 향하자 레이는 움찔 눈썹을 치켜 올렸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어, 레이. 어디서 태어났건 내가 뭐건 지금 서 있는 곳은 변하지 않아. 난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의 아시엘 아르셰인."
아시엘은 검을 들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마력을 끌어올려 검기를 일으켰다. 금색의 도신이 희미한 붉은색에 감싸여 빛났다.
"다른 이름은 필요치 않아. 그러니 나는 여기에서 내 친구이자 주인인 유트리안 디아란 세튼 전하를 지킨다. 죽어야 한다면 기꺼이 목숨을 내놓겠어."
"... 그래? 아깝게 됐어, 아시엘. 그렇게까지 이야기한다면 더 이상 설득할 이유도 없지."
레이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졌다. 그에게서 느껴지던 검은 마력이 더욱 더 짙어지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않던 몬스터들과 자객들도 서서히 잠에서 깨어난 듯 근육을 풀기 시작했다. 진득한 핏빛의 눈동자가 자아를 잃은 듯 깊은 어둠에 침식되기 시작했다.
"널 증오해, 아시엘 아르셰인. 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네 스스로의 힘도 아니면서 잘난 체 해 대는 네가 너무너무 싫어."
"유감이네. 난 널 꽤 좋아했거든."
아시엘은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는 마력을 운용하고 몸을 숙여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수 있도록 전투 태세를 취했다.
"안녕, 레이."
심장 어딘가에 저장된 가장 예뻤던 기억, 추억 속의 오랜 친구에게 작디 작은 작별 인사를 건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