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53화 (253/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39. 붉은 별의 저녁 (3)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무아지경으로 사람들 사이를 헤쳐 달리던 유트리안의 머릿속은 엉망 진창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아까까지만 해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추격자의 살기가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불안해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빙글빙글 시야가 돌고 속이 메스꺼웠다. 퍽, 퍽 앞길을 막는 사람들을 마구 엉망 진창으로 밀치며 그는 마구잡이로 달렸다.

"황자님!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그 때, 뒤에서 들려온 선명한 목소리가 얼음물을 끼얹듯 유트리안의 정신을 현실로 돌려 놓았다. 그는 확 뒤를 돌아보았다. 달리는 발을 멈추지 않으며 아시엘은 박힌 화살대를 부러뜨리고 거추장스러운 망토를 벗어 던졌다.

새하얀 제복이 크게 펄럭이며 밤의 거리에 모습을 선명히 드러냈다. 어깨 쪽이 점차 붉게 젖어 들고 있었지만 그것이 위용을 가리기엔 부족했다. 아시엘은 순간 제복에 술렁이는 이들을 무시하고 유트리안을 앞질러 달렸다.

"여기에서 대치하는 건 무리에요. 일반인들도 많고 무엇보다 적을 파악하기도 힘들어요. 조금 도박이긴 하지만 뒤쪽에 작은 언덕이랑 숲이 있으니까 그쪽으로 가요!"

그 힘 있는 음성이, 흔들리지 않는 두 눈이 순식간에 유트리안을 진정하게 만들었다. 고개를 크게 끄덕인 그는 곧장 아시엘의 뒤를 따랐다.

그건 그렇고. 기사는 쿡쿡 쑤셔 오는 통증을 무시하며 생각을 이었다. 자신이 황자를 데리고 오늘 황성을 나섰다는 것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나오는 중에 그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고 아시엘 역시 본의는 아니었지만 나오기 전 선배들에게조차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터였다. 그렇다면-

황실 기사의 제복에 놀란 사람들이 질겁하며 길을 비켰다. 두 사람은 전보다 수월하게 혼잡한 시장을 빠져나가 민가의 갈림길에 들어섰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추격자들은 끈질기게 따라붙고 있었다. 신중하게 그리고 조용히 움직이는 적들의 기척을 잡아내려 아시엘은 애썼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는 게 둘 다 살아남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일까. 그는 도움을 청할 생각으로 초조하게 귀걸이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피이잉! 또다시 어디선가 쏘아진 화살이 공기를 가르고 쇄도해 왔다. 이번에도 노린 것은 유트리안이었다. 아시엘은 반사적으로 그를 잡아 끌고 화살을 검으로 쳐냈다. 카앙, 캉! 거친 쇳소리에 황자가 파랗게 질려버렸다. 그런 그를 아시엘이 재촉했다.

"넋 놓지 말아요. 제가 지킬 테니까 얼른 달려요!"

"어, 어!"

그는 급히 고개를 끄덕이고 굳어버리려는 다리를 채찍질했다. 아시엘은 달리면서도 계속 통신을 시도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집무실을 비운 모양인지 루이카엔은 응답하지 않았다. 결국 언덕의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간간히 날아드는 암기들을 막아내며 두 사람은 작은 숲으로 숨어 들어갔다. 아시엘은 유트리안을 그늘에 숨기고 자신 역시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 버렸다.

"헉, 헉... 하. 제발 좀 받아요..."

귀걸이를 쥐고 애타게 중얼거리는 그를 바라보던 유트리안은 흠칫하고 말았다. 쉴 새 없이 도망치는 통에 아시엘의 상처는 더욱 벌어져 버린 모양인지 축 처진 그의 한쪽 팔을 타고 똑, 똑 떨어져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야, 너 팔...!"

"아무것도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요... 쳇, 집무실에 아무도 없는 건가."

아시엘은 손을 거두고 나무에 등을 기대 숨을 골랐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이 상황은 괴로웠다. 하지만 휴식은 짧았다. 그의 귀에 다시 암살자들이 기척이 잡힌 탓이었다.

서걱, 서걱. 기계적인 발소리와 아주 미미하게 들리는 쇳소리. 적어도 다섯 이상이 두 소년을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포위해 오고 있었다. 정상 쪽으로 몰아가려는 속셈인 듯 했다. 아시엘은 귀걸이를 빼 유트리안에게 쥐여 주었다.

"도망치면서 계속 연락을 시도해요. 전 저 놈들을 상대해야 하니까. 생활관이건 경비대건 황실 근위대건 상관 없어요."

"어어, 알, 알았어."

유트리안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엘은 나무에 몸을 바싹 붙이고 주변을 경계했다. 여기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공터였다. 거기는 몸을 숨길 곳이 없으니 그 곳까지 가는 일은 어떻게든 피해야 했다. 하지만 아랫쪽에서는 점점 적들이 올라와 둘과의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포위라도 당하면 끝장이었다.

".. 일단은 올라가요.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아시엘은 앞장서서 한 걸음 옮겼다. 서벅, 해 지난 마른 낙엽이 작게 소리를 질렀다. 두 사람이 걸을 때마다 불가피하게 생겨나는 소음들과 소년의 팔에서 핏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려 왔다. 아시엘은 혀를 고개를 돌려 자신들이 지나온 자리를 힐끗 곁눈질했다. 자신의 피가 두 사람의 뒤를 따라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이러면 완전 어디에 있다고 광고하는 꼴이잖아.

더욱 미치겠는 건 자신들은 적들에 대해 알 수 있는 게 없다는 거였다. 청력을 최대한 돋구고 있었지만 슬슬 체력적인 한계가 찾아오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확실한 숫자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저것들은 도대체 정체가 뭐야..."

평범한 고위 자객의 기척 정도는 충분히 잡아내는 청력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을 쫓는 자들은 도무지 정체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간간히 발소리나 대략적인 위치는 알 수 있었지만 그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소리와는 조금 달랐다. 어쩔 때는 소음이 아예 뚝 끊겼다가 두 사람이 멈춰설 때쯤 다시 부스럭 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 왔다. 마치 일부러 자신들의 움직임을 알려 두 소년을 몰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빽빽해진 풀숲을 헤치고 나가며 아시엘이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혹시 아까 나오기 전에 저 말고 누군가랑 만나셨어요?"

"어?"

"갑자기 야시장을 보러 가자고 한 건 황자님 본인의 의견이 맞아요? 스스로의 의지로 저와 단 둘이 성 밖으로 나오겠다는 생각을 한 거냐고요."

숨을 몰아쉬면서도 아시엘이 덤덤히 말했다. 잠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눈을 꿈뻑이던 유트리안의 얼굴이 한순간에 창백해졌다.

"설마..."

"역시.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함정에 걸린 거예요, 저희는. 애초부터 계획된 일이었어요..."

아마 자신이 임무로 성을 비웠을 때부터. 아시엘은 그렇게 추측했다. 유트리안의 태도가 달라졌던 것이 아마 그 무렵이었을 테니. 그리고 그렇다면 지금 자신들을 죽이려 드는 이들의 정체 역시 대강 짐작이 갔다. 더더욱 상황이 절망적으로 변해버렸지만.

"대공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려는 거야."

아시엘의 눈이 매섭게 반짝였다. 황자를 바깥으로 끌어내 죽인다. 암살에 이것보다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은 없었다. 무단으로 외출한 것은 황자 쪽인 데다 나중에 시신이 발견된 뒤에라도 다른 바깥의 왈패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 수 있으니. 그리고 이 상황을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대공, 슈베이만 뿐이었다.

점차 숲이 끝나가려는지 나무들이 듬성듬성해지기 시작하고 멀찍이 풀숲 사이로 빈 공간이 보였다. 저쪽으로 나가야 하나, 아니면 이 곳에 숨어 있을까, 아시엘은 고민했다. 하지만 어차피 '그들' 이라면 자신들의 위치를 찾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일 터였다. 그는 멈추지 않고 공터 쪽으로 나아갔다. 유트리안 역시 불안하게 그의 뒤를 따랐다. 어느 새 휘영청 떠오른 달빛이 나뭇가지들 사이로 새어 들어왔다.

숲을 벗어나자 마자 연극 무대를 비추는 스포트라이트처럼 황홀경에 젖은 새하얀 월광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아시엘은 곧 공터의 한가운데, 달이 굽어보고 별이 박힌 푸른색 밤하늘 아래에 홀연히 서 있는 한 인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순결한 핏빛의 붉은 제복. 성인으로는 보이지 않는 비교적 작은 체구.

아시엘은 상황도 잊고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상대방 역시 그를 발견한 듯 고개를 살짝 돌렸다가 이내 주근깨가 낀 앳된 얼굴에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찌르르, 밤벌레가 노래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서로를 응시하는 그들의 머리칼을 살살 흔들었다. 아시엘은 공터의 소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니, 뗄 수 없었다. 얼어붙어 버린 그의 시선과 소년의 애정 어린 눈길이 얽혔다. 그리고 긴 침묵의 끝, 소년- 레이가 눈꼬리를 휘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아시엘. 기다리고 있었어."

익숙한 목소리가, 친근한 어조가 아시엘의 심장에 푹푹 박혀 들었다. 그의 두 눈동자는 선명한 붉은색에 물들어 있었다.

불길한 바람이 불어 닥치는 저녁이었다. 루이카엔은 흐트러진 머리칼을 대강 정리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스산한 공기가 썩 유쾌하진 못했다.

"어째 기분이 영 별로네."

금방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예상보다 외출이 길어져 버렸다. 어차피 남은 잔업은 아델레트가 알아서 했겠지만 그래도 그 잔소리를 감당할 생각을 하니 조금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내 생활관에 다다른 그는 문 앞에 서 있는 카이스를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카이스? 여기에서 뭐 하는 거야?"

"단장님."

얼핏 보면 감정을 읽어내기 힘든 무심한 얼굴로 어둠 속을 유심히 바라보던 카이스는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루이카엔은 친근히 손을 흔들어 주며 그에게 다가갔다.

"바람이라도 쐬는 거야?"

"아니... 아시엘이 돌아오지 않아서요. 조금 걱정되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시엘이?"

루이카엔이 의아하게 되물었다. 분명 그는 이번 주 동안은 치료사의 협박 아닌 협박에 억지로 휴가를 받아 생활관에 머물고 있었다. 유트리안과도 다툰 것 때문에 정말 외출할 일이 없어져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카이스가 곧이어 덧붙이는 말에 그는 더더욱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아까 초저녁에 황자 전하의 부름을 받고 나갔다고... 케빈 선배가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황자궁에 가도 이런 시간까지 있었던 적은 없는데."

"그래...? 별일이네."

하지만 어차피 어디로 가 봤자 황성 안이었다. 아니면 황자를 만난 뒤에 혼자 외출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아시엘의 성정 상 카이스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별로 예감이 좋지 못한데, 루이카엔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찰나 한 시종이 헐레벌떡 그들 쪽으로 달려왔다.

"헉,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혹시 아시엘 아르셰인 경 있습니까?"

"아니...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가 얼떨떨하게 대꾸하자 시종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카이스가 재우쳐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당신은 황자궁의 시종이죠?"

"아... 아아... 큰일입니다, 황자님께서 오후부터 통 모습을 보이지 않으십니다...! 가끔 도망을 가시긴 했지만 이런 시간까지.. 그래서 아시엘 경께 여쭤 보려고 했는데.."

횡설수설하는 그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황자가 사라져? 루이카엔과 카이스는 눈빛을 교환했다. 그렇다면 지금쯤 둘이 함께 있는지도 몰랐다. 카이스가 입을 열었다.

"... 성 바깥으로 나간 게 아닐까요? 오늘은 야시장이 열리는 날입니다."

"설마, 이 시국에 그런 짓을 하려고... 황자라면 몰라도 아시엘은 그럴 녀석이 아니잖아."

루이카엔이 황당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라도 유트리안이 조르거나 협박했다면 아시엘은 거절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 때, 그의 감각에 수상한 기척이 포착되었다. 루이카엔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그것은 카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무언가가 생활관을 둘러싸고 접근해 오고 있었다.

"단장님."

"어어."

갑자기 두 사람이 몸을 굳히자 시종은 의아하게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직후, 그는 갑자기 강한 힘으로 뒷덜미가 잡혀 뒤로 내동댕이 쳐졌다.

"우와앗!"

그리고 그와 동시에 콰아앙! 방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에 커다란 낫이 박히며 지면을 갈라 놓았다. 잠시 얼이 빠져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시종은 이내 죽을 뻔 했다는 것을 자각했는지 아, 아아... 하며 차마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시종의 앞을 막아 서며 루이카엔은 검을 뽑이 들었다. 아직 낫을 갈무리하지 못한 정체 불명의 습격자는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형상이었다. 카이스 역시 그 낯익은 모습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이건.."

"크르르르..."

그의 신음성은 몬스터의 사나운 목울림에 묻혀 버렸다. 뚝, 뚝, 검은색의 끈적한 체액에 그것의 몸에서 떨어졌다. 분명 메르티스 가의 거대 괴물에게서 분열되어 나왔던 변종 몬스터였다. 루이카엔은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이윽고 몬스터들이 하나 둘 달빛 아래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커다란 이를 가진 놈, 네 발로 기는 놈, 도롱뇽처럼 긴 꼬리를 휙휙 저어대는 놈 등 그 꼴도 가지 각색이었고 그 수는- 역시 버거울 정도였다. 거기다 지난번의 변종 몬스터보다 모두 기본 2 배는 더 거대했다.

"망했네."

루이카엔이 농담처럼 짧게 한탄했다. 아무래도 대공은 그들의 생각보다도 훨씬 더 서두를 모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