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36. 물밑 게임 (4)
이틀 동안 유트리안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식사도 거른 채 누구의 출입도 허락하지 않은 채 그가 틀어박혀 있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항상 꼬박꼬박 황자궁을 들락거리던 아시엘도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하인들은 정말 무슨 사달이 났다고밖에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덕분에 황자궁에는 오전부터 긴장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제 방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자 않은 유트리안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그야 본인 역시 머릿속이 엉망 진창이었으니.
"하아...."
그는 이미 잔뜩 헝클어진 된 에메랄드빛 머리칼을 쥐어 뜯었다. 밤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건지 얼굴색 역시 파리해져 있었다.
제대로 앉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못하는 그를, 에스테반은 유트리안의 침대 위에서 마치 한 자리의 고양이처럼 뒹굴며 바라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고민하는 거야, 황자님?"
"또 상처주는 말을 해 버렸어... 물론 숨긴 그 녀석이 잘못한 거지만, 그래도."
처음 만났을 때도 꽤 험하게 싸웠고 이때까지도 절대 사이 좋게 하하호호 지냈다고 할 순 없었지만 아시엘이 그렇게나 진심으로 화내는 모습은 처음 보는 거였다. 아니, 단순히 분노하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항상 미소짓던 새하얀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던 순간 그는 깨달았었다.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하지만 사과의 말을 하려던 순간 입 밖으로 튀어나온 것은 잘 벼려 둔 칼보다 날카로운 비난이었다.
"...사과해야 해."
"그치만 황자님, 생각해 봐. 그 기사님이 먼저 황자님을 속인 거잖아. 그래서 황자님이 화가 났고. 그런데 굳이 황자님이 먼저 사과해야 할 필요가 있는 거야?"
에스테반이 무구한 목소리로 말하자 유트리안은 그를 사납게 쏘아보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헛소리 하지 마! 따지고 보면 이게 다 네 탓이잖아!"
"하긴 그건 그렇네. 내가 잘못한 게 맞아. 그래도 사실은 사실이잖아. 그가 황자님을 속였다는 건 변하지 않아. 하지만 황자님이 그에게 해선 안 될 말을 했다는 것도 사실이네."
아이는 짐짓 심각하게 고민하는 체 침대에 엎드려 고개를 갸웃했다. 새하얀 은발이 은하수처럼 반짝이며 쏟아져 내렸다. 초승달을 닮은 아름다운 얼굴에도 아이다운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올랐다. 너무나 사랑스러워 다른 누군가가 보았다면 신음을 흘릴 만 한 모습이었지만 유트리안의 눈에는 더 이상 순진한 어린아이로 비치지 않았다. 마치 이 세상의 모든 색을 씻어낸 듯 아이는 새하했지만 절대 그것이 소년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은 유트리안은 이미 지나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따졌다.
"그러면 뭐 어쩌라고!"
"기사님에게 부탁을 해 보는 건 어때? 친구로서 정말로 황자님을 아끼고 있는 건지 마지막으로 시험하는 거야. 그는 강하니까 웬만한 돌발 상황에도 안전하게 황자님을 지켜낼 수도 있을 테고, 그러지 못하면 황자님의 호위 자격이 안 되는 거지. 화해할 계기도 만들 수 있을 텐데. 어때?"
뒹굴, 에스테반이 나른하게 몸을 뒤집으며 빙그레 미소를 그렸다. 그의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가 빛을 품은 얼음 조각처럼 반짝 빛났다. 마치 착한 강아지를 꼬드기는 듯한 부드러운 소년의 목소리는 이상한 힘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몽롱하게 정신을 흐려 놓는 무언가의 약물처럼 그렇게.
"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믿어 봐. 이번에도 내가 틀렸다면 난 영영 네 눈 앞에서 사라질 테니까. 응?"
에스테반이 조곤조곤 속삭이자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듯, 유트리안은 저도 모르게 멍하니 그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못 이기는 척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오랜만에 진지하게 들여다 본 서류는 꽤 재미있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라이펜은 비져나오는 웃음을 눌러 담으며 팔락, 종이를 한 장 넘겼다.
"다들 똥줄이 탄다, 이거지?"
이번 사건으로 들쑤셔진 귀족들이 모두 허둥지둥 숨겨둔 재산을 처리하고 태세를 바꿀 준비를 해 대는 광경을 상상하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위험을 감수해 가며 같은 편까지 한꺼번에 정리해 버린 것이 아무래도 꽤 효과를 본 모양이었다.
오전에 올라온 이 보고서는 귀족들의 급해진 움직임을 상상할 수 있게 만들었다. 대공에게 붙어 야금야금 세력을 챙기던 남작 하나가 몰래 쌓아 왔던 재산을 팔아 치우고 영지로 돌아갔고 무슨무슨 후작은 갑자기 선물이라며 막대한 자금을 바쳐 왔다. 그 밖에도 황도를 이탈하는 자, 갑자기 식솔이 아프다며 시골로 들어가 버리는 자 등등 아군 적 할 것없이 꼬랑지에 불 붙은 개 마냥 서두르는 꼴이 가소로웠다.
병사들을 보냈다고 했을 때 설마 설마 했겠지만 정말로 그 5명 중 3명이 현장에서 인신매매죄로 체포되고 전 재산이 몰수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결국 라이펜은 킬킬 어깨를 떨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꼴 좋다, 속이 다 시원하네. 하하하하!"
"폐하. 쪽팔리니까 좀 조용히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 중에 우리 편 손실도 적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
보다 못한 루이카엔이 못마땅하게 말했지만 라이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눈물까지 맺힌 눈가를 닦으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우리끼린데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라고. 솔직히 너도 통쾌하잖아? 언젠가 이것들 엿먹여 주는 게 내 소원이었는데."
"물론 그렇긴 하지만요. 그래도 계속 그러시면 분명 제 명에 못 죽을 겁니다, 폐하는. 루이스 경은 아무 말씀 없어요?"
"그걸 나한테 묻냐? 그 녀석 아들내미는 네 밑에 있잖아."
라이펜은 서류를 책상에 탁, 던지며 대꾸했다. 하긴 그렇지. 루이카엔이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지나가는 말처럼 덧붙였다.
"너 그 녀석 간수 잘 해라? 잘못되면 루이스한테 목 내주는 걸로 안 끝날걸."
"잘 알고 있습니다. 굳이 루이스 경이 아니더라도요."
루이카엔은 가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것보다 대공전하 쪽은요. 별 움직임을 보이진 않습니까?"
"이만큼 찔렀으니 안 움직이는 게 이상하지. 하지만 겉으로는 그닥 보이는 게 없어... 아쉽게도. 정작 노렸던 대어인 하노빌 백작은 수사 그물망에서 쉽게 빠져나가 버렸고. 물론 쉽게 잡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제부터가 문제지."
조금 아쉽게 라이펜이 입맛을 쩝 다셨다. 잠잠하면 오히려 더 불안한데. 마족들을 움직이면 그건 곧바로 대형 사고로 이어질 게 분명하니 촉각을 최대한 곤두세워야 했다.
"일단... 좀 더 지켜보는 걸로 하자. 당장은 납치되서 팔린 애들을 구해내는 게 급선무니까."
한참을 고민하던 황제가 결국 시원찮은 결론을 내렸다. 사실 그것 이외에는 아직 방법이 없으니. 성 내의 분위기는 상당히 흔들렸지만 대공만은 못이라도 박힌 듯 최소한의 대처만 했을 뿐 실상 자신 아래의 귀족들은 구제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썩은 살을 잘라내며 체포령을 내린 라이펜과 마찬가지로.
그래서 형제라는 건가- 루이카엔은 침을 꿀꺽 삼켰다. 대공과 황제, 두 사람은 서로 반목하는 관계였지만 소름 끼치도록 닮은 구석이 있었다. 겉으로 보면 판이하게 다른 듯 보여도 실상은 아니었다. 그는 생각을 털어 버리고 화제를 돌렸다.
"그것보다 폐하, 요즘 황자님은 뭐 하고 지내는지 아십니까?"
순간 라이펜이 흠칫 굳었다. 루이카엔이 그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자 그는 하, 하하, 하며 방금과는 다른 어색한 웃음 소리를 냈다.
"아, 아시엘이 잘 놀아주고 있는 거 아냐?"
"싸웠대요. 아시엘이 황실 전용 도서관 서가에 드나드는 걸 들켜서. 덕분에 아시엘도 근처에 얼씬도 말라는 소리까지 들어서 찾아갈 엄두도 못 내고 있어요. 티는 안 내지만 나름 상처받은 모양이죠."
"끄으응..."
라이펜은 신음 소리를 내며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한동안 잠잠하나 싶었더니... 그래서, 유트리안은?"
"안 그래도 신경 쓰여서 거기에 일하던 하인에게 물어보고 왔는데 황자궁에 처박혀서 안 나온답니다. 오늘 하루 종일 먹지도 않으셨대요."
거기까지 말한 루이카엔은 씨익 짓궂은 미소를 입술에 그렸다.
"애들 싸움에 어른이 끼어들기는 좀 그렇죠? 폐하."
"워낙 변덕이 심한 녀석이니까. 아시엘도 보기보단 한 성깔 하고. 누굴 닮았나 몰라, 둘 다."
"누굴 닮았는지 굳이 이야기 해야 합니까?"
"시끄러워. 적어도 유트는 날 안 닮은 게 확실해."
거기에는 그 역시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금색의 눈동자와 올라간 눈꼬리, 에메랄드 빛 머리칼은 라이펜과 빼다 박았지만 -재수 없이 잘생긴 것도- 성격 부분에 가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건 아마 그 뿐만이 아닐 듯 했다. 잠시 생각하던 루이카엔이 툭 한 마디를 내뱉었다.
"적어도 제멋대로란 점에선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겠네요."
"시끄러워. 어쨌든 아시엘이니까 알아서 하겠지, 그건. 네 말대로 어른이 끼어들 문제는 아닌 것 같고... 유트에겐 미안하지만 지금 그 애에게 신경 쓸 시간은 없어."
"그렇죠."
라이펜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이야기하자 그 역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 사람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지금은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
"나중에 좀 안정되고 나면 찾아가 보세요. 아끼는 아들이지 않습니까."
"말 안 해도 그럴 거야. 그때라면 슬슬 화해했겠지, 뭐. 아시엘이 도서관에 드나드는 건 내가 허락한 일이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녀석한테 전해. 시선은 좀 모이겠지만 되도록이면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라고도 얘기해- 뭐, 그건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만."
"네. 그렇게 전해 둘게요. 그리고 그 녀석한텐 나중에 급료 좀 더 얹어 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양심적으로요."
루이카엔이 픽 웃으며 농담처럼 뱉았다. 웃기지 말라는 듯 그를 노려본 라이펜 역시 이내 한숨처럼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좋아하는 과자나 보내주지 뭐. 산더미처럼."
하지만- 다음은 언제? 불안정의 극치인 이 상황에서는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었다. 자신들이 얼마나 위태롭게 걸어가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들이었다. 그러니 막연히 짐작만 하고 있는 위험이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것은 그들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