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42화 (242/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29. 붉은색의 안개(1)

평화로운 시간은 지나치게 빨리 흘러갔다. 3일간의 휴가 내내 카이스는 감시라도 하겠다는 양 아시엘을 졸졸 따라다녔다. 덕분에 그는 그동안 황실 도서관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을 뿐더러 돌봐야 하는 애가 둘이 된 기분을 아주 제대로 맛볼 수 있었다. 과묵한 카이스가 유트리안과 대놓고 다투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째서인지 아시엘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기싸움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전하는 이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면 굳이 곁에 두지 않아도 될 텐데요."

"이 녀석은 내 호위 기사야. 싫지만 아바마마께서 명하셨으니 따를 수 밖에 없다고."

휴가 마지막 날의 티 타임, 카이스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어조로 건네는 차가운 한 마디에 유트리안이 날카롭게 대꾸했다. 아시엘은 이제 달관한 태도로 아삭 아삭 쿠키를 입으로 밀어 넣었다. 카이스의 말이 이어졌다.

"정 그렇다면 그냥 내버려두면 될 것 아닙니까. 서로 없는 사람 취급 하면 되지."

"네놈도 지금 내가 누군지 헷갈리는 거 아냐?"

그가 작게 덧붙인 말에 유트리안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터뜨렸다.

"황자를 없는 사람 취급한다는 게 말이 돼? 그것도 황가를 모신다는 기사가!"

"저희만큼 험하게 구르는 기사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러십시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카이스의 여전히 무덤덤한 응수에 결국 황자가 분통을 터뜨리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지만 두 소년 기사는 여전히 별 반응이 없었다. 카이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차를 홀짝였고 모든 상황에 달관한 아시엘은 새로운 쿠키의 맛에 흠뻑 빠져 있었다. 그 태평한 꼴에 유트리안은 부아가 치밀어 꽥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 도대체 뭐야!"

"카이스 루 메르티스입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한없이 태평한 얼굴로, 입가에 쿠키 부스러기까지 묻힌 채 입을 오물거리는 아시엘이 괜히 더 얄미웠다. 유트리안은 머리를 짜증스레 마구 헤집었다.

"아아악! 젠장, 이 자식이 너보다 더 성질 더러운 거 아냐? 야! 뭐라고 말 좀 해 봐!"

"이거 참 맛있네요. 아까 여기 하녀장님이 새로 들여온 거라고 하시더니."

"역시 네놈이 제일 싫어!"

유트리안이 펄펄 뛰며 성질을 냈지만 아시엘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내일 대전회의에 우리 기사단 두 명이 참여한다고 하던데."

"야! 내 말 들어!"

"아아. 그랬었지?"

중간에 섞여든 소음은 당연히 무시하고 카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딱 한 번 참석했었던 대전 회의의 분위기를 떠올리며 아시엘은 흥흥 의미심장한 웃음을 터뜨렸다.

"구경가고 싶다.."

"너 제정신이냐?"

유트리안이 황당하게 물었다. 하지만 아시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부투룽하게 툴툴거렸다.

"왜요! 재밌을것 같지 않아요? 솔직히 우리 선배들은 평소엔 다들 나사 하나쯤 빠진 사람들 뿐이잖아요. 얼마나 물고 뜯을지 궁금한데."

"다른 건 다 제쳐 두고 내가 할 말도 아니지만 선배를 대하는 태도에 문제 있는 거 아냐, 너?"

"직접 같이 살아 보면 그런 말 안 나올걸요."

아시엘은 차를 호로록 들이키다 앗뜨뜨, 하며 급하게 잔을 내려놓았다. 그가 울상을 지으며 빨개진 혀를 베 빼물자  카이스가 손수건을 건네 주었다.

"고마워... 어쨌든 궁금하지 않아요? 셀레니스 기사단의 사람이 참석하는 건 드문 일이잖아요."

"농담할 때가 아냐. 나도 얼핏 들었는데 꽤 사안이 심각하다면서?"

유트리안이 사뭇 심각하게 중얼거리는 말에 아시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이스 역시 흠칫하며 무뚝뚝한 얼굴에 놀라움을 담아 황자를 바라보았다. 묘하게 기분이 나빠진 유트리안이 뭐, 하며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아시엘의 벌어진 입 사이로 어벙벙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와... 황자님, 드디어 머리란 걸 그쪽으로 쓸 수 있게 된 거예요?"

"진짜 죽고 싶냐!"

예정된 대로 터져나온 유트리안의 노성이 정원을 쩌렁쩌렁 울리고 곧 깔깔깔 자지러지는 아시엘의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어지러운 정세 속, 소년들의 평화로운 한 때였다.

케빈의 서식지(?) 앞에 선 루이카엔은 바짝 긴장했다. 일전에 한 번 다 같이 손을 걷어 붙이고 대청소를 감행하긴 했지만 여전히 그의 방문에서는 요사스러운 기운이라도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후...."

깊게 심호흡을 한 그는 굳게 마음을 먹고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달칵, 문을 열었다. 조명조차 밝히지 않은 방 안은 어두컴컴했다. 안에서 풍겨오는 퀴퀴한 냄새에 그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야, 케빈! 거기 있냐? 나와 봐."

"엉?"

결국 들어설 엄두는 내지 못하고 문가에서 목소리를 높이자 안쪽에서 익숙한 대꾸가 돌아왔다. 곧 부스럭, 부스럭 하는 기척과 함께 무언가가 와르르, 쿵! 쾅! 하는 소음이 들려왔다. 도대체 어떤 꼴로 살아가는 거야, 루이카엔이 헛웃음을 흘리고 있을 때 케빈이 저 심연의 안쪽에서 꿈틀꿈틀 기어 나와 얼굴을 쑥 내밀었다.

"왜?"

"... 그런 데서 잘도 살아있구나."

"아앙?"

욕인지 뭔지 모를 말에 케빈이 왕창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루이카엔은 고개를 내저어 보이고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제대로 보이지 않는 저 방 안이 두려울 뿐더러 케빈의 목에 감긴 앤과 이름 모를 작은 뱀 한 마리가 쉭쉭거리며 화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일 대전 회의 좀 나가주라. 물론 나도 갈 거고."

"뭐어? 대전 회의에? 내가 왜?"

그가 노골적으로 싫다는 표정을 가득 띄웠다. 하지만 루이카엔은 차분하게 그를 타이르기 시작했다.

"나라고 너 데려 가고 싶겠어? 그런데 너랑 같이 처음 파견 나갔던 게 아시엘이랑 카이스인데 어떻게 하라고. 설마 그 애들을 대신 보낼 생각은 아니겠지?"

"끄응... 너 혼자 가면 안 되는 거냐?"

케빈은 떡진 머리를 북북 긁으며 신음을 흘렸다. 그 모습에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것 같아 조금 안타까워졌지만 단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난 정황을 제대로 모른다고. 처음부터 가 있던 사람이 필요해."

"아아아- 젠장. 가면 엄청 까일 텐데. 그래도 내가 가는게 낫긴 낫겠지..."

투덜투덜대며 케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생각보다 그가 고집을 쉽게 꺾어준 게 조금 의아했지만 그래도 루이카엔은 대충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역시 아시엘과 카이스를 끔찍이 아끼는 터였고 작금의 상황 역시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루이카엔은 쓰게 웃었다.

"그래서, 잠깐 얘기할 게 있어."

"뭔지 대충 알겠어... 젠장, 별로 유쾌하지 못하군. 또 뭔가 사정 있는 이야기지? 이따 네놈 집무실로 갈 테니까 기다려."

그렇게 말을 남긴 케빈은 다시 탁, 문을 닫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하여튼 제멋대로인 인간- 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루이카엔은 다음 순간 또다시 들려온 우당탕, 쿵! 콰앙! 하는 소리에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돌아간 후, 혼자 남은 유트리안은 자신의 방의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다. 하여튼 열받는 자식들, 어쩌고 욕을 중얼거리면서도 그의 손에는 낮에 아시엘이 추천해 준 책이 소중하게 들려 있었다.

그래도 내일부터 메르티스 녀석은 오지 못한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자기 위로를 하며 유트리안은 무의식중에 책을 꼭 쥐었다. 그 때 머릿속에 불만스러운 음성이 울려 퍼졌다.

[한심하긴.]

".......!"

유트리안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지만 침소 바깥에 경비병이 두 명 서 있을 뿐 그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녀석이다. 그는 바깥으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주의하며 입을 열었다.

"뭐야, 너. 왜 그래?"

[뭐가 그렇게 좋다고 히히덕거리고 있어? 그 꼬마 기사님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경계하라고 했잖아.]

"그 녀석은 내 사람이야. 그럴 필요 없어."

유트리안은 전에 없이 단호히 대꾸했다. 머리 속의 목소리- 에스테반은 잠시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얼마 후 그가 작게 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믿을 수 있어?]

"애초에 황자를 바보 취급하는 간 큰 녀석들이야. 그런 놈이 꿍꿍이를 꾸밀 리 없지."

[꿍꿍이를 꾸민다는 게 아냐.]

에스테반의 짧은 한 마디에 그는 의아하게 눈썹을 휘었다.

"무슨 소리야?"

[애초에 접근할 때부터 뭔가를 노리고 온 걸지도 모르지. 잘 생각해 봐, 그는 네 아버지의 명을 받고 온 거잖아.]

이번에는 유트리안이 입을 다물 차례였다. 그것 봐, 하며 에스테반이 킥킥 소리를 냈다.

[황자님은 그를 계속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안심하겠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잖아. 언제야? 그 애가 당신의 시야 밖으로 벗어날 때가.]

황자의 표정이 차차 굳어져갔다. 그가 내 시야를 벗어날 때, 내가 그의 행동을 제대로 관찰할 수 없을 때. 알지 못하는 시간- 그 시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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