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40화 (240/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27. 새로운 불씨(2)

가슴에 가득 찬 답답함은 아무리 떨쳐내려 애써도 사라지지 않았다. 살짝 아려오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아시엘은 거리를 걸었다. 반복되는 꿈에 의미는 있을까. 언젠가부터 나타난 그녀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에쉬리아가 한 말의 의미는 도대체 뭘까- 생각을 이어가던 아시엘은 이내 고개를 세차게 털어냈다.

고민해 봤자 해결되지 않을 일은 잊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것보다 지금은 그 지긋지긋한 지하실에서 죽지 않고 빠져나왔다는 사실에 감사하자.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타이르면서도 어째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 그 의문이 다시금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특별한 존재, 그 분이 그렇게 하길 원했다. 에쉬리아가 부드럽게 속삭이던 말들이 귓전에 웅웅 울렸다. 아아- 아시엘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차라리..."

무의식중에 중얼거리던 그는 화들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내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아시엘은 굳어버린 얼굴 근육을 빨개질 정도로 탁 탁 때렸다.

"정신 차려, 아직도 피곤한 거야?"

"맞아요. 그 어떤 경우에도 살아남은 걸 후회하면 안 된다고요?"

그 때, 문득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아시엘은 고개를 돌렸다. 막 여관으로 돌아가던 참인지 한쪽 손에 식재료를 가득 든 렌이 언제나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장바구니를 흔들며 아시엘에게 느긋하게 다가갔다.

"아..."

"아직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니까요, 아시엘은. 그런 생각을 하면 무책임해요."

렌은 가볍게 꾸짖으며 그의 이마를 톡, 아프지 않게 때렸다. 아시엘은 멍하니 렌의 손가락이 닿았던 곳을 매만졌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렌 씨는 자꾸만 뜬금없이 나타나시네요..."

"아시엘이 여기로 올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절 만나러 오는 길이었죠? 여관으로 가요. 무사히 돌아온 기사님한테 차라도 대접해야죠."

렌은 빙긋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아시엘을 이끌었다. 아- 잠시 거절할 명분을 찾으려 눈을 굴렸지만 아시엘은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그에게 섯부른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앞선 경험에서부터 조금씩 느껴 오던 참이었으니.

언제나 붐비는 여관이었지만 오늘은 웬일로 텅 비어 있었다. 렌은 아시엘을 의자에 앉히고 안쪽에서 달콤한 코코아를 가지고 나와 그의 맞은편에 자리잡았다.

"이번 파견은 어땠어요? 상당히 정신 없었죠?"

"이미 다 알고 계신 거 아니에요? 제가 그쪽으로 가기 전에 예언까지 해 주셨으면서."

아시엘이 그가 내미는 머그컵을 받으며 픽 웃자 렌이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본인 입으로 듣는 것과는 다르죠. 그리고 전 대략적인 것만 볼 수 있지 자세한 건 모르니까요. 다른 곳에 이야기하면 안 되는 게 아니라면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 코코아 값으로요."

"아..."

장난스러운 제안에 아시엘은 잠시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코코아를 내려보다, 곧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의 이야기가 풀어지기 시작하자 렌은 테이블에 기대 주의 깊게 경청했다. 세이라를 만난 것 부터 영지에 숨어 있던 이상한 무리를 발견해 기지에 숨어들었다 동료들에게 버림 받고 잡힌 일-렌은 배를 잡고 웃어댔다- 그리고 마지막엔 훌륭하게 탈출해 제때 도착한 지원군과 힘을 합해 나쁜 녀석들을 혼내주었다는 것으로 대장정이 끝나자 렌은 짝짝 박수를 쳤다.

"정말 멋진 모험을 했네요, 아시엘은. 훌륭해요. 매번 파견이 이런 식인가요?"

"대부분은 대형 사고에요... 이번은 좀 더 심했고. 그리고 까뒤집어 보면 그리 멋지지도 않고."

후카덴 백작이 박살난 자신의 영지와 성은  스스로 영지민들과 복구하겠다고 해 줘서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셰단 후작의 영지를 몰수하고 그 일가를 모두 벌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비어버린 영지에 대공은 자신의 사람을 밀어 넣으려 할 터였고 황제는 그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새로운 영주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눈 앞에 떨어진 고깃덩어리를 모른 척 할 귀족은 없었다. 치열한 공방이 이어질 게 눈에 선했다.

그리고- 이런저런 문제를 치우더라도 아시엘은 입단 후 이때까지 감봉당하지 않고 월급을 고스란히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하하..."

"너무 우울해하지 말아요. 잘 해결된다고 말하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될 테니까요."

"전혀 위로가 안 되는데요...?"

렌의 위로 아닌 위로에 아시엘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그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렌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아직 살아남은 걸 후회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어요?"

"아... 아까 그건 너무 피곤해서 엉뚱한 말이 튀어 나온 걸 거예요. 신경쓰지 말아요."

"아니, 아니에요."

뜻밖에 그가 단호히 고개를 내젓자 아시엘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렌은 답지 않게 다소 굳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무의식이란 건 가장 큰 진심을 반영하는 것과 같아요. 묻어만 둔다면 자기도 모르는 새 새카맣게 상해버려요."

"아..."

아시엘은 멍청히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한 사람 같은데 왜 이런 곳에서만 바보같은 걸까- 렌은 쓰게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지금 이 길에서 도망치게 된다면 나중에 아시엘이 후회하게 될 테니까요."

"네? 무슨 말이에요?"

"그냥 그렇다고요. 아시엘이 만에 하나 어디로 멀리 떠나버린다거나- 아니면 목숨을 잃는다거나. 어느 쪽이라도, 설령 죽은 뒤에라도 후회하게 될 거란 이야기였어요. 하지만 살아있지 못한다면 그것조차 불가능 할테니까요."

"아..."

아시엘은 다소 복잡해진 눈으로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언제 정색을 했냐는듯 렌은 평소의 온화한 미소로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이내 아시엘은 헤실 순진한 눈웃음을 만들었다.

"설마 그것도 예언이에요?"

"글쎄요. 그것보다 아시엘, 절 찾아오려고 한 이유 있잖아요."

렌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아시엘은 잠시 눈을 또로록 굴리다 아, 하고 손뼉을 짝 쳤다.

"예언이 잘 맞아서요. 그래도 그나마 일할 때 힘을 덜 뺀 것 같아서 감사 인사 드리려고 왔어요. 설마 그것도 알고 있었어요?"

"잘 맞았다고요?"

재미있다는 듯 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들었다. 그의 물음에 아시엘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아까 들으셨잖아요. 역시 렌 씨는 굉장해요! 이정도 예지 능력은 처음이에요. 어지간한 점성술사나 예언가들이랑은 비교도 안되잖아요?"

"하하, 아시엘. 그거야말로 조금 착각한 것 같아요."

렌이 손사래를 치며 드물게도 소리내어 웃자 아시엘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그를 멀뚱멀뚱 바라보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따져 물었다.

"무슨 말이에요? 렌 씨의 예지가 맞지 않다는 거에요?"

"아니, 아니에요. 제 예지는 보이지 않을지언정 언제나 정확하답니다. 하지만 이번엔 아시엘이 틀렸어요."

점점 알 수 없는 말의 연속이었다. 아무리 애써봐도  아시엘로선 렌의 이야기는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그가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부루퉁하게 볼을 부풀리자 렌이 달래듯 아시엘의 머리에 손을 살짝 올렸다.

"감사 인사는 넣어 둬요. 이런 것 때문이 아니라도 아시엘은 언제든지 찾아와도 환영이랍니다. 전 항상 당신의 편이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꼭 기억해요."

"그 이야기 자주 하시는 것 같아요. 무슨 의미라도 있어요?"

소년이 미심쩍게 묻는 말에 그는 글쎄요, 하고 또다시 모호한 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건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너무 토라지지 말아요."

"... 그렇게까지 말하신다면..."

아시엘은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흐릿하게나마 다시 미소가 돌아와 있었다. 렌은 기특한 아이를 칭찬하는 것처럼 그런 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마치 새끼 고양이라도 된 양 아시엘은 저도 모르게 눈을 살짝 감았다. 편안하다- 그에겐 이야기하기 싫은 것도 자연스레 전해지는 탓인지 마음이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기사단의 선배들과 카이스, 그리고 아버지 루이스에게서 받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아시엘은 다시 눈을 뜨고 장난스레 웃었다.

"렌 씨, 예전에 저한테 그러셨죠. 많은 것을 보지는 못 한다고. 가끔 그게 거짓말인 것 같다고 생각해요."

"글쎄, 어떨까요."

렌은 미소 지으며 그에게서 손을 뗐다. 이윽고 아시엘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거의 마시지 않은 코코아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럼 가 볼게요. 너무 시간 빼앗기도 죄송하고. 다음에 또 뵐게요."

"네. 약 챙겨 먹는 것, 잊지 말아요."

막 돌아서려던 아시엘은 움찔하더니 곧 히히, 하며 멋쩍은 웃음을 남기고 바깥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렌은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착각이라..."

그건 정말 우연이었으니 착각이라고 말하는 게 옳았다. 그는 천천히 팔을 내리고 몸을 의자에 편안히 기댔다. 혼자 남은 가게는 조용했다. 주인 아주머니도, 일을 도와주는 누나도 없었다. 그는 등을 쭉 뒤로 젖히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이미 떠나버린 상대를 향해 중얼거렸다.

"예언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감사 인사는 보류해 두는 걸로. 모든 게 이루어지고 나면 소년에게 멱살을 잡힐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렌의 수수한 감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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