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26. 새로운 불씨(1)
우르르, 콰앙! 아슬아슬하게 형태를 유지하던 집이 이내 굉음을 내며 무너졌다. 재앙이라도 내린 듯 검붉은 하늘에 새카만 연기가 치솟았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도 아직 성에 차지 않았는지 꺼져가는 불길은 그나마 남은 나무들과 폐허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아시엘은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긋지긋한 풍경이, 모든 것이 죽어버린 그 참혹한 광경이 다시금 자신 앞에 펼쳐졌다는 것을 인지하자마자 소년은 흡, 하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또..."
수십, 아니 수백 번 보아 온 꿈이었다. 처참하게 난자당한 시신들이 거리를 나뒹굴고 마을은 완전히 파괴되어 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지독한 피비린내와 매캐한 연기의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숨이 턱턱 막혀 왔다. 도대체 뭐야, 왜 매번 나한테 이런 걸 보여주는 거야. 도대체 어째서- 호흡을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말을 듣지 않는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게 무너지는 그 곳의 주인인 그녀가 또다시 홀연히 나타났다.
"윽..."
"아시엘."
부르지 마. 내 이름을 부르지 마. 텅 비어버린 눈구멍이 소년을 똑바로 응시했다. 가로로 찢어진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아시엘은 저도 모르게 귀를 틀어막으려 양 손을 들었다. 하지만 그의 하얀 손은 어느새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어...?"
아시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입고 있는 제복의 소매도, 바짓단도 역시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주머니에서 언제부터 들어 있었는지도 모를 단도 하나가 땡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의 검날 역시 피에 젖어 번들번들하게 빛나고 있었다.
"누가 그랬게?"
그녀가 크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발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아, 아, 싫어. 이게 뭐야. 다리에 힘이 풀린 아시엘은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하얀 원피스 자락을 나풀거리며 그녀가 천천히 아이에게 다가갔다. 오지 마,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굳어버린 목에서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도망치고 싶어도 몸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몸을 숙여 아시엘과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손을 뻗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소년의 뺨을 감싸 쥐었다.
"아시엘."
지독하게 달콤한 목소리였다. 아시엘은 그 순간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고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소년의 얼굴을 부드럽게 끌어당겨 뒷가에 입술을 가져가 속삭였다-
"어째서 너는..."
"......!"
아시엘은 가까스로 눈을 떴다. 막 밝아진 하늘에서 쏟아진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아시엘은 한참 동안 흐릿한 눈으로 익숙한 천장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언젠가 가져다 둔 머리맡의 화분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자신의 책상. 언제나 봐 오던 것이었다.
그는 하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머리칼이 얼굴에 아무렇게나 달라붙어 왔다.
"미치겠네..."
한동안 뜸하더니 또 왜 이러는 거야, 누구에게라도 마구 따지며 화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럴 상대도 없었다. 그야 단순히 꿈일 뿐이니까. 그런다고 해결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지끈지끈 찾아드는 두통을 몰아내려 애쓰며 아시엘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식은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무언가가 똑, 구겨진 이불 위에 떨어졌다. 하아, 재차 한숨을 토해낸 그는 대강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잊어버려, 잊어버려. 자기 자신에게 세뇌라도 하듯 아시엘이 혼자 중얼거렸다. 그때 마침 달칵, 문이 열리더니 샤워를 마친 슌이 젖은 머리에 수건을 얹은 채 들어왔다.
"어라, 일어났네. 좀 더 자게 둘까 했더니.. 그런데 꼴이 왜 그래?"
"헤헤. 좋은 아침이에요, 선배."
아시엘이 어색하게 웃으며 그에게 손을 흔들자, 어째서인지 슌의 얼굴이 차차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엥? 하며 그가 고개를 갸웃하는 찰나, 어버버거리던 슌이 결국 비명을 질렀다.
"너 손! 손! 손!"
"네? 손이 뭐 어쨌다고-"
아시엘이 말을 끝내기도 전, 하얀 이불 위에 붉은 핏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어라? 그는 어리둥절해져 슌에게 흔들었던 손을 확인했고 곧 입 밖으로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엑."
손바닥이 줄줄 흐르는 피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구급상자! 슌이 소리를 질러대며 허둥지둥 바깥으로 뛰어 나갔다. 지저분해진 이불을 바라보던 아시엘은 푹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아침부터 이 모양 이 꼴이람. 이쯤 되면 슬슬 억울해질 지경이었다.
"넌 꿈을 얼마나 험하게 꾸는 거냐? 어떻게 손이 이 꼴이 되도록 모를 수가 있냐?"
"하하...."
슌이 더러워진 침구를 정리하러 간 뒤, 케빈이 황당하다는 목소리를 냈다. 차마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아시엘은 그저 웃기만 했다.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주먹을 어찌나 세게 쥐었던지 손바닥에는 피가 쏟아질 정도로 깊은 구멍이 나 있었다. 그런데도 눈치 채지 못하다니.
"아무리 피곤했어도 그렇지. 아픈 것도 못 느꼈어?"
그렇게 퉁바리를 주며 피를 닦아낸 헝겊을 대충 옆에 던진 아델레트는 상처에 꼼꼼히 소독약을 바른 후 붕대를 감아 주었다. 그제야 닥치는 따끔한 통증에 아시엘이 몸을 움츠렸다. 곁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루이카엔이 쯧 혀를 찼다.
"슌이 아침부터 기겁할 만도 하네. 악몽 자주 꾼다더니, 또 그런 거야?"
"그냥 뭐.... 그런 거죠."
아시엘은 대충 둘러댔다. 순간 머릿속에 수없이 보던 광경이 퍼뜩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도대체 그 여자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꿈속의 그녀가 귓가에 뭐라 속삭이려 하기 시작한 것은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직전부터였다. 언제나 그 뜨끈한 숨결과, 그녀에게서 풍기는 혈향은 지나칠 정도로 생생했지만-
거기까지 떠올린 아시엘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순식간에 안색이 더욱 파리해진 그를 보며 루이카엔이 에휴, 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됐어, 생각하기 싫으면. 그것보다 너 오늘 할 일 없으면 황자궁에 좀 가 봐."
"어제 치료 끝나자마자 다녀왔어요. 그런데 왜요?"
"발도 빠른 녀석. 황자님이 무슨 말씀 안 하시던?"
말? 영문 모를 물음에 아시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루이카엔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요즘 혼잣말 같은 걸 하신다던데. 폐하도 신경 쓰이시는 모양이야."
"아아, 그거요? 그거 혼잣말이 아니라 고양이였다나 봐요."
"고양이?"
루이카엔이 의아하게 물었다. 구급상자를 정리하던 아델레트와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던 케빈 역시 눈을 크게 떴다. 아시엘은 붕대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네, 고양이. 요즘 성에 고양이가 드나들었다나 봐요. 그래서 착각한 거 아니냐고 하던데요? 안 그래도 경비 서던 병사가 요즘 황자님이 혼잣말을 하는 것 같다면서 걱정하길래 여쭤 봤거든요."
"그 황자님이 고양이라니, 별 일이네."
"그러게나 말이야."
케빈의 말에 루이카엔 이 전적으로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엘도 처음 느낀 바는 다르지 않았기에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습관처럼 루이카엔은 그의 머리를 가볍게 짚었다.
"그러면 오늘은 황자님한텐 안 가려고? 어차피 3일 동안은 휴가니까 상관없긴 하지만."
"이따 오후에 갈 거예요. 지금은 잠깐 시내에 나갈까 해서요."
"시내? 안 쉬고? 살 거라도 있어?"
아델레트가 고개를 갸웃하자 아뇨, 하며 아시엘이 손사래를 쳤다.
"그런 건 아니고 잠깐 렌 씨한테 가려고요. 별 도움은 안 됐지만 그래도 감사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서."
"감사 인사?"
"그런 게 있어요."
케빈이 의아하게 눈썹을 휘었지만 그는 싱글벙글 웃기만 할 뿐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시엘은 붕대 감긴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움직임에 불편함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소파에서 폴짝 내려왔다.
"감사합니다. 그럼 전 잠시 나갔다 올게요."
"조심해서 다녀와. 또 이상한 아저씨한테 걸려서 싸움 내지 말고."
"그건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닌걸요."
곤란한 미소를 보이며 아시엘은 그대로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쪼그만 게 왜 저렇게 생각이 많은 거야. 그 중에서도 가장 착잡한 눈을 한 것은 단연 루이카엔이었다.
작은 품 안에 너무 많은 것을 떠안고 있었다, 그는. 하지만 덜어주는 것조차 불가능하니- 그저 거친 물살에 휩쓸리지 않기를 바라는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