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25. 폭풍전야(4)
무료하게 황자성의 경비를 서던 병사는 문득 멀리서 걸어오는 한 인영에 눈을 크게 떴다. 하얀 제복, 멀리서도 눈에 띄는 금발. 설마, 설마! 그는 저도 모르게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
"아시엘 아르셰인 경! 돌아오신 겁니까!"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나요?"
가까이 다가온 아시엘이 생긋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병사는 세상을 다 얻은 듯한 얼굴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큰일에 휘말리셨다고 들었는데..."
"괜찮아요. 전하는요?"
눈부셔! 화사해! 아시엘의 고운 미소에 병사는 순간 진심으로 울음을 터뜨릴 뻔 한 것을 가까스로 눌러 담았다. 2주일 동안 제멋대로 고집불통 황자님 비위 맞추는 데 시달리다 보니 아시엘이 거의 구세주로 보일 지경이었다.
"전하는 안쪽에... 하지만 오늘 돌아오셨지 않습니까. 좀 더 쉬지 않으시고요."
"그럴려고 했는데 그래도 얼굴은 비추는 게 나을것 같아서요. 그동안 별 일은 없었죠?"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병사에게 아시엘이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이렇게만 보면 꼭 작은 다람쥐같은데- 그런 생각을 꿀꺽 삼키고 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딱히... 그런데 요즘 황자전하께서 이상한 버릇이 생기신 것 같습니다. 새로운 놀이인가, 하고 다들 생각은 합니다만..."
"버릇이요?"
"그, 이따금 혼잣말을 하신다고 합니다. 그냥 지나가는 새나 작은 동물한테 말을 거는 건가 하긴 하는데.."
동물? 아시엘은 눈을 가늘게 떴다. 농담이죠, 하고 묻는 듯 한 표정이 여과없이 얼굴에 드러나자 병사가 찔끔했다.
"그렇죠, 전하께서 동물에게 말을 건다거나 하는 귀여운 행동을 하실 리가 없죠..."
"일단 직접 물어보는 게 제일 빠르겠네요. 그럼 들어가 볼게요."
아시엘은 살짝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익숙하게 황자궁 안으로 들어갔다. 도대체 어떻게 굴었길래 병사가 저 꼴이야, 하고 툴툴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겨우 반쯤 사람으로 만들어 놨나 하고 조금 뿌듯해했는데 조금 일렀던 모양이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잠시 고민하던 아시엘은 곧 뒤뜰로 걸음을 옮겼다. 유트리안은 오늘처럼 날씨가 좋은 낮에는 으레 정원의 티테이블에서 차와 과자를 즐기곤 했으니. 그리고 그 추측은 역시 틀리지 않았다.
편안하게 잔디밭에 놓인 의자에 기대, 시종이 든 커다란 양산 아래에서 그늘을 즐기는 유트리안이 눈에 들어오자 아시엘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기척을 숨기지도 않고 타박타박 그에게 다가갔다.
"나무 그늘은 장식이 아닐 텐데요?"
"오자마자 잔소리냐, 넌."
유트리안은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아시엘은 그의 앞에 삐딱하게 팔짱을 끼고 섰다.
"일광욕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굳이 땡볕 아래에 자리를 잡은 건 무슨 심보에요? 좋은 나무 그늘 두고."
"하여튼 쫑알쫑알... 그러는 넌 뭐 하다가 이제야 얼굴 들이미는데? 며칠이 지난 지 알기나 아냐?"
"뼈 빠지게 일하다 온 사람한테 그게 할 소리에요? 진짜 죽는 줄 알았는데. 목 그대로 붙어서 돌아온 걸 다행으로 생각하라구요."
"별로 돌아오라고 하진 않았는데."
유트리안이 밉살맞게 대꾸하자 아시엘은 다른 말 없이 시종의 손에서 양산을 빼앗아 던져버렸다. 시종은 얼떨떨하게 서 있다가 눈치를 보다 잽싸게 안으로 도망쳤다. 곧 직사광선의 공격을 받은 유트리안의 고함이 터져나왔다.
"무슨 짓이야, 이 땅꼬마가!"
"키 작은 데 전하가 뭐 보태준 거 있어요? 손발 멀쩡하게 붙어 있으면 직접 움직여요!"
아시엘 역시 지지 않고 바락바락 쏘아붙였다. 바야흐로 두 사람이 말다툼을 시작하자 멀찍이 지켜만 보던 병사들과 하인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시엘이 저렇게 상대하며 유트리안의 힘을 빼 주면 일 하기가 훨씬 수월했으니 황자궁에서 아시엘의 방문을 반기지 않을 이는 없었다. 유트리안이 쏘아붙였다.
"내 하인 내가 쓰겠다는데 왜 네놈이 난리야?"
"전하가 하루 종일 하는 일이 뭐가 있어요! 뒹구는 거랑 먹고 자고 하인들한테 떽떽거리는 것 밖에 없잖아요. 그 에너지를 좀 더 생산적인 곳에 쓰란 말이에요. 이 황성에서 놀고먹는 건 당신밖에 없거든요?"
"놀고먹... 야, 너 내가 누군지 자꾸만 까먹는 거 아냐?"
"누구긴 누구에요, 세튼 제국의 황위 계승자 1순위 황자 전하시죠!"
아시엘의 고함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씩씩거리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동시에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유트리안이 고개를 내저었다.
"됐고, 넌 왜 온 거야? 오늘 돌아왔다면서. 얼굴색도 엉망인데 들어가서 잠이나 자."
"치료사한테 갔다가 들러봤어요. 그나저나 제가 안 와서 외로웠던 거예요? 왜 혼잣말 같은 걸 하고 그래요?"
"뭐?"
순간 유트리안의 얼굴이 어리둥절하게 변했다. 아시엘은 그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잔디밭에 편히 주저앉았다.
"갑자기 혼잣말을 해 댔다면서요? 심심하면 강아지라도 키우는 게 어때요?"
"혼잣말? 나 혼잣말 한 적 없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것보다 그 녀석들도 봤을 텐데. 네가 없는 동안 여길 드나들었던-"
"네? 누가 여길 드나들었다고요?"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뭐야, 뭐야? 이상함을 깨달은 유트리안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아시엘 역시 아귀가 안 맞는 상황이 슬슬 혼란스러워졌다.
"잠깐만, 잠깐만요. 혼잣말을 한 게 아니란 말이에요?"
"내가 미쳤어? 혼잣말 같은 걸 하게."
"그럼 누가 왔었는데요? 파슬렌 공작님이에요?"
"아니. 그것보다 내가 혼잣말은 했다는 건 도대체 누구한테 들은 거야?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하는 거냐고."
"앞의 병사가... 하지만 그 사람이 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았어요. 전하도 그래요, 도대체 누가 왔다는 거예요? 물어봤는데 그런 얘긴 전혀 없었는데."
두 소년은 영문을 몰라 서로 마주보며 눈을 꿈뻑였다. 유트리안이 멍하니 입을 열었다. 그 때- 문득 앳된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정말로 그 기사님이 황자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런 의문을 보이기가 바보 같을 정도로 눈앞의 소년은 티끌 하나 없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
"혼잣말..."
그 녀석, 에스테반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건가. 그래서 경비도 손쉽게 뚫고 궁 안으로 불쑥불쑥 나타났던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유트리안은 가슴 한 구석이 섬뜩해지는 것을 느꼈다.
"... 뭐야, 그건."
"황자님?"
갑자기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자 아시엘이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유트리안은 답하지 않았다. 난 요정님이니까, 주구장창 농담처럼 해 오던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눈치 없기는.]
순간 웃음기 섞인 속삭임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에스테반의 것이었다. 유트리안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황자님?"
"........"
아시엘이 다시 걱정스레 불렀지만 유트리안은 답하지 않고 한숨을 참 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방금 목소리는 자신에게만 들렸다고,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다시금 속삭였다.
[난 황자님 편이야. 날 믿어. 지금 네 앞의 아이는 네 편이라고 확신할 수 없잖아? 아직은. 네 아버지가 보낸 사람일 뿐이야.]
"황자님?"
아시엘의 목소리와 에스테반의 속삭임이 겹쳤다. 유트리안은 짧게 심호흡했다.
"... 고, 고양이."
"네?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아시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유트리안은 별 일 아니라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아아, 정원으로 하얀 고양이가 찾아 왔거든. 그 녀석한테 말 건 걸 혼잣말한다고 착각했겠지. 그러니까 혼자 떠든 게 아니야."
"아... 네. 고양이..."
아시엘은 미심쩍게 눈썹을 휘면서도 납득했다.
"그나저나 황자님도 사람이긴 하네요. 방금 병사님이랑 얘기했는데. 황자전하가 동물한테 말 걸고 그런 귀여운 짓을 할 분이 아니라고."
"그 말은 뭐야, 이 자식아. 들어가서 잠이나 자. 안 그래도 허여멀건 면상이 백짓장이라고. 그나마 얼굴은 봐줄 만 했는데."
"그거 그대로 반사입니다. 쓸데없이 잘생긴 얼굴을 낭비하지 마세요."
아시엘이 쏘아붙이자 유트리안은 황당해졌다. 네놈 거울은 보고 사는 거냐, 란 말이 턱 끝까지 치솟았다가 가라앉았다. 이렇게 아옹다옹 싸우는 와중에도 가끔 넋 놓게 만드는 얼굴의 소유자 주제에 자각이 없다는 것도 죄였다.
"어쨌든 얼른 꺼져버려. 내일 오던지 말던지 알아서 하고."
"네네, 하여튼 성질 더럽다니까. 어쨌든 복귀 신고는 했으니까 내일 올게요."
아시엘은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없는 동안 고생했을 병사들에게는 불쌍하지만 오늘 하루만 더 수고하라고 부탁하는 수밖에. 실제로 피로가 엄청나게 쌓여 있기도 했으니. 그렇게 걸음을 옮기려던 아시엘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다시 유트리안에게 시선을 주었다.
"내일은 좀 늦을 거예요. 어디 들를 데가 있어서요."
"허락 구하는 게 아니라 통보냐? 상관은 없지만."
퉁명스러운 답이 돌아왔다. 아시엘은 고개를 까닥 숙이는 것으로 짧게 감사를 표하고는 그대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뒤뜰을 벗어나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유트리안은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잘 한 거야?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갑자기 땀이 솟아올랐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정말로 그에게 말 하지 않아도 되었던 건가- 아시엘의 혼란스러워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귓가에, 아까 들렸던 소년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굉장히 부드럽고 기묘할 정도로 친절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잘했어. 아주 잘했어.
그리고 그 한 마디에 황자의 어지럽던 마음이 급속도로 정리되었다. 이런 걸 일일히 그 녀석에게 보고할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명령으로 붙어 있는 호위 기사일 뿐이니까. 유트리안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