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22. 폭풍전야(1)
것보기에는 완전히 정신이 나간 듯 했지만 아시엘의 계산은 정확했다. 파이어 스피어를 시전해 병사들 사이사이에 불의 창을 박아 넣고 순차적으로 폭파시키는, 소비하는 마력을 최소화한 수법으로 그는 끈질기게 병사들을 괴롭혔다. 그 와중에도 폭발의 세기를 조절해 사망자가 단 한명도 없았다는 것 역시 기사들을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폭발하는 불길을 피해 방방 뛰던 병사들이 기진맥진해 죄다 뻗었을 때 쯤에는 이래저래 한계에 다다라 있던 아시엘 역시 더 이상 서 있기도 힘들 지경이 되어 버렸다. 그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휘청거리자 카이스가 재빨리 달려가 부축했다.
"야, 괜찮아?"
"헉, 헉..."
아시엘은 대꾸하지 않고 숨을 몰아쉬기만 했다. 마력의 급격한 소비로 뒤늦게며칠 동안 거의 먹지도 자지도 못한 피로가 물밀듯이 쏟아져 왔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앙다물고 카이스를 밀어냈다.
"오스카 선배."
"네, 네네?"
순식간에 앞마당에 쌓인 잿더미들과 널부러진 병사들을 멍청히 바라보던 오스카가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경어를 내뱉었다. 아시엘은 비틀비틀 그에게 다가갔다. 원래도 하얀 얼굴은 백짓장이 따로 없을 정도로 탈색되어 있었지만 눈만은 붉은 인광을 뿜고 있었다. 오스카는 긴장해 꿀꺽 침을 삼켰다. 아시엘은 후, 하고 길게 숨을 내쉬고 생긋 웃었다. 앳된 얼굴에 잘 어울리는 귀여운 미소였지만-
"한 대만 맞아줘요."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전혀 예쁘지 않았다. 곧 빠아악! 오스카로서는 처음 맛보는 아시엘의 정강이 발차기가 이어졌다. 그는 끄읍- 하며 신음을 삼켜야 했다. 비로소 할 일을 다 마쳤다는듯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소년은 그제야 다리에 힘을 풀고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루이카엔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 독한 녀석."
"네? 정신이 없어서 뭐라고 하는지도 못 듣겠어요."
아시엘은 완전히 진 빠진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용케 누구의 음성인지는 알아차렸는지 그는 루이카엔을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루이카엔은 물끄러미 다소 초점이 흐려진 그의 적안을 내려다 보았다. 힘은 없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금가루를 뿌린 루비와 같은 색을 띠고 있었다.
그는 병사들을 상대하던 소년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작은 어깨는 분노를 마음껏 내지르고 있었지만 결국 그 누구도 죽이지 못했다. 그게 아시엘의 천성이었다. 벽에 가로막힌 상황에서 과감하게, 과격하게 온몸으로 부딪히고 숨김없이 웃고, 화내지만 결국 그는 누군가를 진정으로 해치지는-물론 죽기 직전까지 두들기는 것은 예외인 듯 하지만- 못했다.
폐하, 당신이 틀렸습니다. 루이카엔은 피식 입술을 말아 올렸다. 어차피 이리로 오기 전에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는 거기에 더욱 확신을 둘 수 있었다. 아시엘이 무엇인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런 녀석 앞에서 그런 고민을 한다면 자신만 우스워질 뿐이었다.
루이카엔은 몸을 숙여 아시엘과 시선을 맞추었다. 방금 병사들을 마구 굴려먹고 선배에게 호된 응징을 내리던 때의 살벌함은 어느새 지워버린 아시엘은 어린애다운 의아함을 담아 그를 마주보았다. 안색이 나쁜 얼굴에는 방금의 영향으로 지저분한 검댕이 묻어 있었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아시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요?"
"아니다, 아무것도."
단장은 킥킥 웃으며 그의 머리에 손을 턱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언제나 하던 것처럼 지저분해져 엉망이 되어 버린 금발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수고했어, 꼬맹이."
"으아아앗! 하지 말라니까요!"
아시엘이 기겁하며 손을 쳐냈지만 이미 머리칼은 산발이 된 지 오래였다. 루이카엔은 씨익 미소짓고는 몸을 일으켰다.
"뒷일은 우리한테 맡겨. 시작은 너네가 했고, 방금까지 같이 날뛰었으니 뒤처리는 우리가 해야지."
그의 호언장담대로 해가 뜨자마자 일은 착착 진행되었다. 해독제에 기절했다 깨어나 어리둥절해하며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던 후카덴 영지민들과 병사들은 백작과의 극적인 상봉을 이루어 냈다. 아델레트는 아직까지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해 눈만 꿈뻑이는 이들을 한 곳에 모아 백작에게 떠넘겼다. 교단에 넘어가기 전 이 사람들이 가장 신뢰했던 사람은 당신이야. 그녀의 말에 감명받은 백작은 당장에 그 자리에서 이그니스 교단의 간악함에 대한 강연 아닌 강연을 시작했다.
제스퍼와 후작, 그리고 그의 병사들은 포박해 백작의 화약고에 가두고 베르칸과 벨킨이 그들을 감시했다. 그리고 제르닌과 루이카엔, 신전을 지키던 슌은 교단 내부 조사에 착수했다.
"그나저나 해독약의 효과가 대단하지 않습니까. 전 갑자기 안에 쓰러져 있던 사람들이 움직이길래 식겁했다고요. 다시 덤벼들까 봐."
"당장에 완전 제정신으로 돌리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이성을 찾게는 해 주는 약이었으니까. 원래 전쟁같은 거랑은 관계 없이 평화롭게 살던 사람들이야. 그런데 교단은 전쟁을 부추겼고. 그것만으로도 지금 자신들이 하던 행동이 이상하다는 걸 알아 차렸겠지. 아시엘이 안에서 헤집고 다닌 것도 꽤 영향을 끼쳤을 테고."
슌이 감탄하자 제스퍼의 방에 보관되어 있던 서류를 대충 눈으로 훑으며 루이카엔이 대꾸했다. 대충 납득한 슌은 고개를 끄덕이며 책장을 뒤졌다. 무슨 백작과 약초 거래, 어디어디의 후작에게 뇌물. 상당히 복잡한 뒷돈 거래 내역이 정리된 장부가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마약에 교단을 만드는 데 썼던 약초의 효과를 홍보해 팔아치우기도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찾는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찾았어."
에쉬리아의 방을 뒤지던 제르닌이 가죽끈으로 묶인 두터운 종이 뭉치를 들고 들어왔다. 루이카엔과 슌은 그에게 다가가 그것을 확인하고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이그니스 교단, 에쉬리아의 주 장사 수단이었을 것의 기록이 정갈한 글씨로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인신매매 장부네."
루이카엔이 덤덤하게 말했다. 팔린 사람의 이름, 나이, 구입한 사람과 그 증명서, 서명. 아무래도 교단이 영지를 지배하는 동안 팔려나간 사람은 한 둘이 아닌 듯 싶었다. 거의 20대 이하의 소년과 소녀, 특히 10대 내외의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구매자들은 대부분 이름만 들어도 누구인지 알 만한 거부와 황도에서 꽤 잘 나가는 귀족, 한창 이름을 날려 부를 축적한 연구자와 정치가 등등, 이 사건이 바깥으로 터졌다 하면 여러모로 대형 사고로 이어질 만 한 이들이 수두룩했다.
"이거 한동안 꽤 시끄럽겠네요. 아무래도 팔려간 건 영지민들 뿐만이 아닌 것 같은데."
"납치를 하거나 고아를 끌고 오거나 했겠지."
슌의 말에 제르닌이 덧붙였다. 불경신자를 가두는 데 사용한다고 하던 감옥은 아마 팔리기 직전의 사람들을 넣어 두었던 것이고 지하 2층의 호화로운 객실들은 노예를 고르러 온 고객들을 머물게 한 모양이었다. 감옥이나 객실이나 신도들은 허락 없이 드나들지 못하게 했으니 그들의 눈을 피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을 터였다. 그때 제르닌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노예라고 하니까 생각났는데, 그 여자애는 완전히 정신이 나간 모양이던데."
"세이라라고 했던가? 제스퍼란 놈 말대로라면 그 애를 셰단 후작이나 그 아들에게 넘겨 줄 모양이었나 봐. 일단 성에 데려다 놨어. 내부 손상은 심하지 않다고 했으니까 약의 독성만 잘 처리하면 조만간 눈을 뜰거야."
"아시엘이 기뻐하겠네요."
루이카엔이 어깨를 으쓱하자 슌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겠지, 가볍게 대꾸한 단장은 손을 툭툭 털고 기지개를 쭉 켰다. 꽤 오랜 시간동안 자료들을 뒤지느라 굳었던 근육들이 우드득, 하고 비명을 질렀다.
"빨리빨리 하고 나머지 잡일은 경비대한테 맡겨버리자. 이거 찾았으면 됐어."
오스카, 케빈, 카이스 그리고 아시엘 네 사람이 택한 것은 수면보다 식사였다. 강렬한 배고픔이 엄습하긴 했지만 무엇보다 당장이라도 피곤해 죽을 것 같던 아시엘의 배에서 꼬르륵, 하는 우렁찬 소리가 울려퍼진 덕분이었다. 허기진 배를 움켜잡으며 드물게도 아시엘이 공복감을 호소했고 성의 식당에는 급한 대로 카이스의 손에 의해 푸짐한 한 상이 차려졌다.
"너 정말 거기에 있으면서 거의 못 먹은 거야?"
허겁지겁 접시를 비우는 아시엘을 바라보며 케빈이 어이없이 물었다. 아시엘은 입 안에 있던 빵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 끼는 어떻게든 넘겼지만요. 그래도 거의 못 먹었어요."
"어이고... 그래, 많이 먹어라. 많이 먹어."
오스카는 그에게 스프 접시를 밀어 주었다. 거기다 카이스가 부엌에서 따뜻한 초콜렛 우유를 만들어 가져오자 아시엘은 더 이상 행복할 수는 없다는 눈빛을 하고 컵을 받아 들었다. 자신 몫의 스프와 빵, 샐러드와 스테이크를 먹어 치운 아시엘은 오스카가 내민 스프 역시 한번에 뱃속에 밀어 넣고 마지막으로 초코 우유를 한꺼번에 마셨다.
"후아아! 눈이 좀 뜨이네... 그나저나 선배들이랑 카이는 상처 괜찮아요?"
"옆 동네 치료사한테서 대충 응급 처치는 받았으니까. 나중에 돌아가서 영감한테 가는 수밖에."
새삼 눈앞에 닥친 현실을 깨달은 케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야 말로 살해당할거야,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단체로 이 꼴로 치료사 노인의 앞에 서는 순간 그들은 철저히 말살당할 게 틀림없었다. 노인의 독사같은 욕설로.
오스카와 카이스의 얼굴 역시 일순간에 어두워지자 아시엘은 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지만 함부로 기뻐할 수 없는 게 쓰게 아팠다. 마침 그 때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백작이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어디서 뭘 하고 왔는지 그의 두 눈은 시뻘겋게 퉁퉁 부어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누구보다도 밝았다.
"기사님들, 죄인들을 압송할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황성으로 옮겨져 재판을 받는 것은 제스퍼와 셰단 후작, 그리고 베스토였다. 살아남은 후작의 사병들은 백작령에서 죄의 대가로 노동력을 바치며 징역살이를 하기로 결정되었다. 아직까지 몇몇 영지민들 역시 잠시동안 황도에 격리해 둘 것을 아델레트가 권했지만 백작은 거절했다. 자신의 선 안에서 해 보겠다며 그는 그들을 친이 성에 들여 오랫동안 이야기 해 보겠다고 말했다.
에쉬리아는 끝내 잡히지 않았다. 제정신으로 돌아온 백작의 병사들이 영지를 이 잡듯이 뒤졌지만 기사들이 돌아갈 시간이 되었어도 마치 증발한 듯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가 사라지는 것을 직접 본 케빈과 카이스로서도 에쉬리아의 행방은 추측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다.
백작은 그녀를 잡기 위해 대대적인 수사를 펼치자고 주장했고, 루이카엔 역시 그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곧 아시엘에게서 무어라 귀뜸을 듣고는 영지에서의 철수를 결정했다. 잡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백작의 강력한 의지로 인해 전국적으로 수배를 내리기로 했다.
그리고 셀레니스 기사단은 모든 일을 단 8시간만에 정리한 뒤, 죄인들을 압송마차에 싣고 퇴근길에 올랐다.
덜커덩, 덜커덩. 흔들리는 마차 안, 가만히 배를 깔고 누워 있던 늑대 벨킨이 게슴츠레 눈을 떴다. 익숙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푸우- 마치 한숨을 내쉬는 듯 크게 호흡을 뱉는 그를, 맞은편에 앉은 루이카엔은 안쓰러움과 웃음이 반씩 뒤섞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죄인 호송용 마차 외에도 특별히 백작의 배려로 이동용 마차 하나를 더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기사들은 만장일치로 아시엘을 마차에 억지로 타게 했다. 너 말 타지 마! 반박할 수 없는 말에 소년은 시무룩해져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그 뒤를 벨킨이 따랐고 루이카엔과 아델레트가 함께 탔다.그리고 그 뒤로 2시간여.
아시엘은 벨킨을 베개 삼아 푹 잠들어 있었다. 덕분에 벨킨은 행여나 그가 깰세라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을 표출하듯 그가 꼬리를 붕붕 두어 번 휘저었다. 하지만 색색 고른 숨을 내쉬며 너무 평화롭게 곯아떨어진 아시엘 덕분에 무시무시한 웨어울프도 대형견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아델레트는 킥킥거리며 아시엘의 머리칼을 대충 정리해 주고는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제부터가 큰일이네."
"그렇지, 뭐."
루이카엔이 간단하게 수긍했다. 황성으로 돌아가 이그니스 교단과 거래한 이들의 명단을 공개하면 곧장 수사가 진행될 터였다. 셀레니스 기사단이 한꺼번에 명령 없이 자리를 이탈했고, 황제는 자신의 직속 기사단인 그들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질 필요가 있었다.
원래라면 처벌을 내려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단장과 부단장, 참모를 비롯한 주요 인원이 최소 근신 처분을 받게 되고 라이펜은 너무 많은 전력을 한꺼번에 잃게 될 터였다.
그렇게 되면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단 한가지. 셀레니스 기사단이 이탈한 이유를 특수한 상황이라고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루이카엔이 제출한 서류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여야 했다. 루이카엔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수사가 시작되겠지. 싫든 좋든. 셰단 후작부터가 폐하의 자금줄 중 하나였으니... 난리가 나겠군."
"어. 그리고 안팎으로 공격받게 될거야. 대공 쪽도 적잖은 타격을 받겠지만 이쪽도 마찬가지겠지. 그건 충분히 각오한 일이었겠지, 루이카엔?"
"당연한 말을."
그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슬아슬한 살얼음판에 금이 쫙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잠시 침묵하던 아델레트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여자는? 교주였다던 그 여자. 도망쳤다고 해도 너라면 집요하게 찾아내려고 할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있어."
루이카엔은 대충 얼버무렸다. 아델레트의 의혹 서린 눈이 장시간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지만 그는 입을 꾹 다물고 딴청을 피웠다. 그렇게 잠시 기싸움을 하던 두 사람은 아시엘이 우, 소리를 내며 뒤척이는 바람에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아델레트가 못마땅하게 시선을 돌리는 것을 느낀 루이카엔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마차는 쉬지 않고 굴러갔다. 그리고 3일 후, 그들은 다시 황도에 다다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