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19. 결말(3)
콰앙! 갑작스레 문이 열리자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 몸을 홱 돌렸다. 늑대 두 마리에 이어 벌써 두 번째의 침입이었다. 잠시 상황파악을 하느라 멍하니 있던 이들은 곧 작은 침입자를 처리하려 한 걸음을 뗐다. 하지만 제대로 움직이기도 전, 그들의 얼굴에 철퇴같은 주먹이 꽂혀들었다.
"크허억!"
"아시엘, 달려!"
"알고 있어!"
카이스가 덤벼오는 병사들을 걷어차며 외치는 소리에 아시엘은 거칠게 대꾸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카이스가 채 막지 못한 적들이 칼을 빼들고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안으로는 못 들어간다! 아까 그 빌어먹을 짐승들도 아직 못 잡았는데-"
"닥치고 꺼져요!"
세 병사가 와락 달려들자 아시엘은 몸을 확 숙였다. 목표를 잃고 균형이 흐트러진 그들을 발을 걸어 넘어뜨린 아시엘은 곧장 달리기 시작했다. 바닥과 강렬한 키스를 나눈 병사들이 이를 부득 갈며 몸을 일으켰다.
"잡아! 저 애새끼 잡으라고!"
"잠깐, 같이 가!"
카이스는 황급히 아시엘을 따르려 했지만 한 병사가 손을 뻗어 그의 발을 와락 붙잡았다. 그는 이판사판 생각할 틈도 없이 냅다 남자를 걷어차 버렸다.
"끄허억!"
"같이 가자니까!"
카이스는 부러진 이빨과 함께 뒹구는 남자를 버려둔 채 이미 저만치 가버린 아시엘을 쫒았다. 먼저 들어간 두 사람의 흔적인지 어두운 복도에는 늑대에게 물어뜯긴 이들이 상처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을 그냥 지나치며, 아시엘은 카이스에게 물었다.
"지하실이 어디지?"
"복도 안쪽에서 계단을 본 것 같아!"
"알았어!"
그는 곧장 카이스의 말대로 방향을 틀었다. 탁탁탁탁, 빈 복도에 울려퍼지던 두 소년의 발소리에 달갑지 않은 자들의 것까지 섞여들기 시작했다. 치잇, 아시엘이 혀를 차는 것과 동시에 예정된 수순처럼 뒤에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어이, 멈춰!"
"뒈지고 싶지 않으면 서! 이 망할 애새끼들!"
"이쪽이다!"
때아닌 추격전이 벌어졌다. 아시엘은 뒤를 힐끗 확인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끼긱, 급하게 속도를 줄이고 뒤따르던 카이스를 앞으로 보냈다. 점점 병사들과 그의 사이가 좁혀지기 시작하자 아시엘은 실눈을 떴다. 병사들은 이제 다 잡았다! 는 얼굴로 그에게 손을 뻗었다. 자신의 옷자락에 그들의 손끝이 닿기 직전- 그는 동상 하나를 밀어 넘어뜨렸다.
"끄아악!"
꽈앙! 한 병사의 머리를 제대로 후려갈긴 여신상은 곧 쿠웅, 옆에 서있던 장군 동상에 부딪혔다. 휘청거리던 장군 역시 옆으로 넘어지며 소녀상을 쳤다. 차례차례 넘어지는 동상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크억, 우아악! 발이 걸린 자, 발에 제동을 걸려다 뒤에 따라오던 이와 부딪힌 자, 커다란 파편에 맞은 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아시엘은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유유히 그 자리를 떠나 카이스와 나란히 섰다.
"나중에 청구서는 기사단 앞으로 날리라고 하지, 뭐."
"하하..."
그 뻔뻔한 말에 카이스는 어색하게 웃었다. 차마 뭐라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은 탓이었다.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
"응."
베르칸의 말에 벨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감각을 곤두세운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병사들을 따돌리고 끝까지 따라붙는 녀석들은 사정없이 때려 눕힌 덕분인지 더 이상의 추격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지나치게 주변이 잠잠하니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벨킨은 공기 중에 흩어진 냄새를 다시 주의 깊게 맡았다.
"... 이런."
"왜 그래?"
"저쪽이 난리가 난 모양인데. 다른 녀석들이 들어왔나 봐. 아마도..."
그의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지만 베르칸은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무사히 탈출한 모양이네. 문제는 지금부터인 것 같지만."
"가보자. 어디 처박힌 백작을 찾는 것보다야 날뛰는 꼬마 둘을 따라가는 게 더 쉬울 테니까."
베르칸의 동의하기도 전 벨킨은 순식간에 거대한 늑대로 변해 방을 뛰쳐나갔다. 꽤 멀리까지 간 건지 느닷없이 다시 나타난 그의 모습에 근처에 있던 병사들이 기겁하며 비명을 내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르칸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곧장 그의 뒤를 따랐다.
"여기다!"
카이스가 반가움에 외쳤다. 드디어 지하로 갈 수 있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층 더 짙은 어둠을 품은 곳이었지만 아시엘은 서슴없이 발을 디뎠다. 쫓아오던 병사들은 아까의 일로 아직까지 잠잠했다. 카이스는 아시엘의 뒤를 바싹 따르며 주변을 경계했다. 지하 특유의 눅눅한 공기가 피부에 닿으며 서서히 지하에 보관되에 있다는 화약 냄새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발 조심해."
"알았어..."
아시엘은 불안하게 대답하면서도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슬슬 시간 제한이 다가오고 있었다. 발 밑은 어두웠지만 카이스는 검으로서 마력을 다루는 덕분에 시야에 큰 어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시엘은 아슬아슬하게 걸음을 옮기다 곧 발을 멈추고 말았다.
"안 되겠어, 카이. 미안한데 나 좀 잡아줄래? 아무것도 안 보여."
"뭐?"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기 전까진 무리야. 지금은 마력을 못 쓰니까. 빨리!"
답답함에 아시엘은 그를 재촉했다. 원래 밤눈이 밝은 편이니 이 칠흑같은 어둠에도 익숙해질 수 있겠지만 당장은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마력을 운용하려다 가슴의 둔탁한 느낌은 배가 되어 버렸다. 카이스는 그제야 그의 말을 이해하고 아시엘의 손을 잡았다. 그러면서도 핀잔을 주는 것은 잊지 않았다.
"넌 보이지도 않는데 무턱대고 먼저 내려간 거야?"
"어쩔 수 없잖아."
"발 밑을 조심하기는 개뿔."
그의 모난 음성에 아시엘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은 나선형 계단을 따라 최대한 빠르게 내려갔다. 하지만 아시엘이 시야에 한계가 있는 한 속도는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뚜벅뚜벅, 아시엘은 카이스에게 의지한 채 발소리에 주의하며 신중히 청각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얼굴에 낭패의 기색이 떠올랐다.
"아, 망할."
"왜?"
"또 쫒아오고 있어, 달려!"
아시엘의 다급한 외침에 카이스는 앞뒤 잴 것 없이 그를 잡아끌며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그의 귀에도 저 위에서부터 울려퍼지는 수많은 발소리들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앞으로 불안하게 쏠리는 몸에 휘청하면서도 아시엘은 간신히 균형을 잡아 카이스의 인도에 따라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점점 어둠에 익숙해지는 눈에 흐릿하게나마 계단의 윤곽이 보이게 된 것이 불행 중의 다행이었다.
"이거 수당은 제대로 받을 수 있나?"
"몰라!"
아시엘의 외침에 카이스가 대꾸했다. 점점 다가오는 발소리와 웅성거리는 목소리들이 점차 선명해지고 마침내 병사들의 횃불이 등 뒤로 나타났다. 갑자기 앞이 밝아지고 붉은 빛이 발 아래와 벽에 일렁이는 것을 본 아시엘이 쯧 혀를 찼다. 계단 끝의 무거운 철문이 모습을 드러낸 것도 마침 그 때였다.
"망할 애새끼들, 드디어 잡았다!"
"저 문은 잠겨 있다고!"
비웃음 섞인 말들이 지하의 공기 중에 왕왕 메아리쳤다. 아시엘은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방법이 없을까, 그때 그의 눈에 철문 위에 난 작은 환풍구가 포착되었다. 성인이 통과하기에는 무리일 크기였지만 덩치가 작은 그라면 가능했다. 아시엘은 곧장 외쳤다.
"카이, 저기로 올려줘!"
"알았어!"
두 소년은 속도를 높였다. 놓치지 않는다! 고함을 지르며 선두의 병사들이 우르르 쏟아져 둘을 바짝 따랐다. 카이스는 아시엘의 손을 놓고 계단 여러 칸을 한꺼번에 건너 뛰었다. 그가 자리를 잡는 것을 확인한 아시엘은 그대로 땅을 박차고 도약해, 카이스의 무릎과 어깨를 콱, 차례로 밟고 뛰어올랐다. 강한 힘에 카이스가 비틀거렸지만 아시엘은 무사히 환풍구를 붙잡아 팔을 걸칠 수 있었다. 그는 안간힘을 써 구멍에 다리를 올리고 몸을 밀어 넣었다. 내부로 들어가려는 찰나, 아시엘은 뒤를 돌아보지는 못했지만 적들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히죽 속으로 웃고는 문 안으로 뛰어내렸다.
밀려올 적들에 대비하며 카이스는 검을 뽑았다. 아시엘이 성공할 때까지만 혼자 버티면 돼, 그렇게 자신을 다잡으며 그는 굳은 얼굴로 일제히 자신을 노리고 달려드는 병사들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닥치는 검들에 맞서 그 역시 검을 치켜올린 순간, 뒤쪽에서 병사들의 쩌렁쩌렁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으아아아악! 괴물이다!"
"아아악! 으아아악!"
순식간에 대열이 흩어지고 병사들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공포에 질려 날뛰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기도 하고 무언가에 물렸다며 소란을 피우다 기절해 버리는 병사도 있었다. 카이스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린 그들을 바라보았다. 곧이어 고함을 쳐대는 이들을 헤치고 은회색의 털을 뽐내는 아름다운 늑대 한 마리가 튀어나와 카이스의 앞에 착지했다.
"베르칸... 선배님?"
"크르릉."
"죄송합니다, 벨킨 선배님."
당장에 그가 이를 드러내자 카이스가 재빨리 정정했다. 뒤이어 모습을 드러낸 베르칸은 입에 가여운 병사 하나를 물고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끄아아악! 고통보다 두려움에 패닉이 되어 비명을 질러대던 그는 베르칸이 던지듯 내려놓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놓았다. 카이스가 얼떨떨하게 입을 열었다.
"선배님들, 어떻게..."
"이쪽이 좀 시끄럽다고 벨킨이 말 해서요."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베르칸이 생글 웃었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는듯 벨킨이 목울대를 울리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덧붙였다.
"역시 아시엘은 아시엘이네요. 저 안에 뭔가 있나요?"
"예, 폭약이... 새벽 4시에 폭파시킨답니다."
"아아. 그래서."
베르칸은 납득한듯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레 사람으로 둔갑한 늑대 덕분에 병사들은 반쯤 혼이 나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경고하는 것처럼 그들에게 으르릉거린 벨킨 역시 인간으로 변해 몸을 일으켰다.
"저 녀석은, 아시엘은 우리가 오는 걸 알고 있었나?"
"왜 그러십니까?"
"분명 알고 있었을 걸요. 아시엘은 아무리 급하다 해도 카이스를 혼자 두고 갈 위인이 아니니까. 왜 그렇게 망설임 없이 움직이나 했어요."
카이스의 의문에 대꾸하며 푸흐흐, 베르칸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백작 수색을 포기하고 찾아온 가치는 충분한 것 같았다. 그가 척, 다시 병사들을 향해 몸을 틀자 병사들은 움찔하며 뒤로 크게 물러섰다. 벨킨 역시 쌍둥이 형을 따라 적들을 노려보았다. 베르칸이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괴물 취급이라니 너무하잖아요. 이래봬도 감수성 풍부한 반(半) 웨어울프랍니다. 우리 귀여운 후배들을 괴롭힌 대가는 톡톡히 치루게 해 드릴 테니 기대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