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31화 (231/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18. 결말 (2)

간신히 산을 다 내려오자 달빛에 젖은 고요한 마을이 나타났다. 인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곳에서 움직이는 것은 길고양이 몇 마리 뿐이었다. 어디, 어디로 가야 해! 하며 잠시 우왕좌왕하던 그들은 곧 카이스가 찾아낸 길을 향해 다시 달려가기 시작했다.

"젠장, 이게 무슨 바보짓이냐고! 그 여자, 나중에 잡히면 흠씬 두들겨 주겠어!"

"동감입니다."

케빈이 바락 바락 소리 지르자 카이스가 조용히 동의를 표했다. 아시엘은 칫, 짧게 혀를 차고 엉뚱한 곳으로 가려는 그들의 뒷덜미를 잡아채 방향을 바꿔주었다.

"켁, 야!"

"이쪽이라구요. 지금은 딴 생각 하지 말고 일단 달려요! 거기서 대형 폭발이 일어나기라도 하면 진짜 대 참사라고요!"

"알았어, 알았어! 하여튼 성깔 하고는."

볼멘소리를 터뜨린 케빈은 힐끗 뒤에서 달리는 그를 곁눈질했다. 방금 신전에서 크게 동요하던 얼굴은 어느새 안정을 찾은 듯 했지만 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이 넣어둔 무언가를 꾹 누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어린애 주제에 뭘 담고 있는거야, 케빈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말을 삼켰다. 묵묵히 그들을 따르던 카이스가 입을 열었다.

"... 일단 끝나면. 이야기 해 줄거지?"

"아니. 미안해."

단호할 정도로 딱 잘라서 아시엘이 대꾸했다. 케빈과 카이스가 조금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그는 히죽 미소지었다. 그 특유의  천진한 듯 보이면서도 어른스러운, 눈에 보이는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을 듯한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오묘한 웃음. 언제나 보는 것 같으면서도 일순간 그를 낯설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두 사람이 흠칫하자 아시엘이 사뭇 가볍게 덧붙이며 속도를 높여 그들보다 앞서나갔다.

"이거 복수 대신이에요. 나 혼자 그런 데 던져뒀던 거 잊어버리진 않았죠?"

"너 말이야...!"

"됐어요. 별 일 아니에요. 범죄자 헛소리에 놀아날 틈은 없다구요."

케빈이 사납게 으르렁거렸지만 아시엘은 그의 말을 끊어 버렸다.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말을 찾지 못한 케빈은 그대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카이스는 조금 가라앉은 눈빛으로 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에도 그의 화사한 금발은 뿌옇게 빛을 내는 것 같았다. 멍청이, 그가 작게 중얼거리기 무섭게 아시엘이 고개를 휙 돌렸다.

"뭐라고?"

"아니야, 아무것도."

카이스가 시치미를 떼자 아시엘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곧 화제를 돌렸다.

"그것보다 가면 어쩔 건데요? 작전이라도 있어요?"

"내가 어떻게 아냐? 나도 만난 건 루이카엔 뿐이라서 사실 상황도 제대로 모른다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전 부단장과 제르닌 선배님을 만났습니다만, 바로 교단으로 간 거라서..."

케빈의 말에 카이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까지 갇혀있다 나온 아시엘도 바깥일을 제대로 알고 있을 리 없었다.

"일단 폭발을 막는 것 외엔 방법이 없겠네요. 거기에서 사람들을 다 대피시킨다고 해도 시간이 부족할 테니까요."

"좋았어, 지하실이랬지? 백작성 내부는 대충 알고 있으니까...!"

케빈이 씨익 웃었다. 그리고 3시 30분, 그들은 백작성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곳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셋은 약속이나 한 듯 발에 급격히 제동을 걸었다. 끼기긱! 휘청하면서도 가까스로 멈춰선 아시엘은 턱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며 중얼거렸다.

'헉, 헉...! 뭐에요, 저거..."

"후... 역시 조용히 넘어가긴 글렀나 보네. 결국 싸우는 중인가 보군."

케빈이 냉정히 말했다. 어둠 속에서 횃불들이 어지럽게 얽히는 것이 세 사람의 눈에 들어왔다. 아시엘은 희미하게 들려오는 쇳소리와 비명소리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옆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카이스가 입을 열었다.

"문제는 지금 저 사람들이 막고 있는 게 성문이라는 거겠죠. 정문 앞에서 싸움이 벌어진 것 같아요."

"미치겠네. 돌아갈 시간은 없는데..."

케빈이 초조하게 입술을 뜯었다. 이러는 와중에도 시간은 점점 흐르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 후 아시엘이 결단을 내렸다.

"별 수 있나요, 뚫고 가야지. 가요!"

"뭐? 잠깐ㅡ"

차마 붙잡기도 전, 아시엘이 먼저 땅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케빈은 혀를 차며 그의 뒤를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백작의 침실에 다다른 벨킨은 코에 감각을 집중하며 공기의 냄새를 맡았다. 하지만 그는 곧 인상을 찌푸리며 두 손으로 코를 막아 버렸다. 의식을 잃은 병사를 내던지며 베르칸이 의아하게 물었다.

"왜 그래?"

"백작의 냄새가 어딘가에 있긴 한데... 너무 지독해. 피 냄새, 땀 냄새... 형은 모르겠어?"

"냄새가 나긴 하지만 난 너보다 감각이 둔하니까."

베르칸이 어깨를 으쓱하자 벨킨이 끙, 신음을 흘리면서 코에서 손을 치우며 다시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어쨌든 백작은 성 안에 있는 것 같아. 근데 추적은 무리군. 그리고... 이건 화약 냄새인가? 엄청 진해. 아까 성에 들어올 때부터 났는데."

"아아, 그건 나도 느꼈어. 아마 성 어딘가에 저장해 둔것 같은데?"

베르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벨킨은 화약 냄새가 거슬리는지 언짢은 표정을 했지만 곧 신경을 꺼버렸다.

"끝이 없네, 젠장맞을!"

결국 제르닌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의 검에 베인 병사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하지만 안심할 틈조차 없이 뒤에서 날아드는 기척을 피해 그는 급히 몸을 비틀었다. 제르닌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단도가 퍽, 둔탁한 소리를 내며 나무에 박혔다.

"뭐 어때, 한동안 운동도 못 했겠다! 아닌 밤중에 운동도 괜찮잖아!"

"누구 때문인... 루이카엔!"

짜증스레 단장의 말에 쏘아붙이려던 제르닌은 문득 그에게 쇄도하는 검을 발견하고 고함을 쳤다. 루이카엔이 뒤늦게 이변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지만 이미 늦은 듯했다. 제르닌이나 다른 이들이 달려가기에도 너무 멀었다. 루이카엔은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노리는 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광기 어린 병사의 입에 히죽 커다란 미소가 걸렸다. 1초가 10분처럼 흘러갔고 루이카엔은 닥쳐올 통증을 대비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카앙!

"왜 얼이 빠졌냐, 이 멍청아!"

차가운 검날 대신 그를 파고든 것은 욕설이었다. 루이카엔은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하려 눈을 크게 떴다. 사나운 얼굴의 지긋지긋하게 익숙한 악우가 검을 빼들고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케빈? 어떻게-"

"이걸로 빚은 갚은 거다."

그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케빈이 잘라 말했다. 루이카엔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오냐. 마음 넓은 내가 봐줘야지."

"아시엘?"

그때 오스카에게서 놀란 외침이 튀어나왔다. 병사들이 주춤한 틈을 타 작은 인영 하나가 그들을 돌파해 성 쪽으로 전력을 다해 달렸다. 병사들은 그를 막기 위해 뒤쫒았지만 곧 한 어둠에서 난데없이 나타난 한 소년에 의해 저지당했다. 카이스였다.

"뭐야, 너희들! 무슨 일이야?"

"성이 폭발할 겁니다! 성의 지하실에 폭약이 있대요. 그걸 새벽 네 시에 폭파하라고 에쉬리아가 신도에게 지시를 내렸답니다."

아델레트가 놀라 묻자 카이스가 아시엘을 뒤따르며 외쳤다. 그에게 달려드는 적들을 베어낸 오스카는 까득 이를 악물었다.

"끝까지 성가시게 하는군. 그래서 잡았어?"

"놓쳤어. 일단 슌이 신전을 지키고 있고. 자세한 건 나중에! 여기서 아시엘이랑 카이스가 폭발을 막지 못한다면 체포고 뭐고 우리 몽땅 다 가루가 된다고!"

케빈이 호통을 치자 그들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듯 얼굴을 경악으로 물들였다. 그가 다시 루이카엔에게 재우쳐 물었다.

"백작은, 백작은 찾았어?"

"아직! 베르칸이랑 벨킨이 들어가서 찾고 있어. 후작의 병사들도 아직 못 찾은 모양이고."

"미치겠네."

마음 같아서는 따라 들어가고 싶었지만 처음 두 사람이 돌입한 타이밍을 놓친 뒤로는 병사들의 방해 때문에 성 쪽으로 접근이 힘들었다.

"폭약이라니, 그딴 말에 속을까보냐!"

"나도 몰라! 그래도 사이좋게 황천길 걷고 싶진 않으니까 너네는 좀 꺼져!"

대치하던 병사가 코웃음치는 말에 케빈이 쏘아붙였다. 남은 시간은 대략 15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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