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16. 새벽의 불꽃 (6)
카이스와 케빈은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 되어 방금까지 에쉬리아가 서 있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아시엘의 레이피어와 이제는 옅어진 검은 연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곧 그들은 의구심 섞인 시선을 아시엘에게로 돌려야 했다. 그는 그 자리에 못 박힌듯 서서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바닥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꽉 쥐어진 작은 주먹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
도대체 뭘 알고 있는 거야. 그 여자가 한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붉은 눈의 사람이 뭔지. 그렇게 묻고 싶은 것을 케빈은 가까스로 눌러 담았다. 지금 그에게 뭔가 자극적인 말을 한 마디라도 한다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간신히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었지만 당장 주저앉지 않는 것만 해도 기적인 듯했다. 케빈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아시엘은 비밀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은 그것을 깨달아 버렸다고.
"... 가요."
"뭐?"
"백작성으로 가자고요. 어서 다른 선배들한테도 알려야 해요."
아시엘은 비틀거리면서도 간신히 한 걸음을 뗐다. 카이스가 달려가 그의 한쪽 팔을 잡아 주었다. 평소의 그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여유가 사라진 얼굴이었다. 항상 맴돌던 미소는 사라지고 초조함만이 담겨 있었다. 심지를 잃어 다소 흔들리는 목소리였지만, 그 붉은 눈동자는 여전히 올곧았다. 하지만 그 시선의 끝에는 자기 자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 곳을 향하는 것 같지만 그 목적지는 없었다. 케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넌 쉬면서 세이라랑 같이 기다려. 우리가 갈 테니까."
"...싫어요. 같이 갈래요. 빨리 여기서 나가고 싶어요... 바깥 공기랑 못 만난지 며칠 째라구요. 거기다 지체할 시간도 없잖아요."
아시엘은 다시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표정 관리가 허술해졌군- 결국 케빈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알았어. 여긴 슌한테 맡기고 가자. 달릴 수 있겠어?"
"할 수 있어요."
아시엘이 고집이 느껴질 정도로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덜덜 떨리던 그의 손은 어느덧 안정을 찾은듯 잠잠해졌다. 케빈은 잠시 복잡한 눈으로 그를 내려보다 거칠게 금발을 헤집어 주는 걸로 다른 말을 대신했다.
"여, 다 끝났-"
"넌 여길 지켜! 안에 잔당들이 남아 있으니까 잘 감시하고, 내려가서 여자애나 좀 돌봐줘! 우린 백작성으로 간다!"
슌의 말이 끝나기도 전 케빈의 외침이 날아들었다. 슌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순식간에 문으로 달려 나가는 그들을 멍청히 바라보았다. 콰아앙! 문 열 시간도 아까웠는지 케빈은 몸으로 문을 밀치고 바깥으로 튀어 나갔다. 카이스와 아시엘 역시 그의 뒤를 따랐다. 슌은 잠시 황당하게 그들을 바라보다 곧 다시 첩첩히 쌓여 기절한 이들의 위에 풀썩 앉아 버렸다.
"또 헛짓을 한 것 같군."
슌을 뒤로하고 세 사람은 어두운 숲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동 트기 전의 새벽 특유의 공기가 그들의 폐에 가득 차올랐다. 바깥 공기를 만끽할 틈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아시엘은 크게 심호흡을 몇 번 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어지러운 것들을 모조리 압축해 구석에 밀어버리고 그는 정신을 차렸다. 안에서 썩든 말든 알 바 아니었다. 눈 앞에 있는 것에 집중하고 쓰레기는 나중에 치우면 될 터였다.
"성으로 가려면 숲을 가로지르는 게 빨라! 지금 길 찾는건 무리야!"
"일단 산부터 내려가요!"
케빈의 외침에 아시엘이 그렇게 대꾸했다. 이슬 때문에 비탈길이 미끌거렸다. 일일히 중심을 잡으며 내려갈 여유는 없었다. 콰드드득! 케빈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미끄러지듯 아래로 빠르게 내려갔다. 카이스와 아시엘 역시 몸을 던졌다. 점점 몰골이 엉망진창이 되어 가고 있었지만 그들은 신경쓰지 않았다. 새벽 4시까지 채 1시간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기사들을 처치하러 간 부하들이 돌아오지 않았다. 후작은 초조하게 손톱을 뜯었다. 간간히 오던 연락마저 세 군데 모두 끊기니 셰단 후작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어차피 셋 뿐이었잖아. 그마저도 다 따로 떼어 놓았다고! 게다가 하나는 애새끼였고. 그런데 왜 여태까지 소식이 없는 거야?"
만에 하나라도 그들이 살아서 영지 밖으로 나갔다면 감당 못할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그 가능성 때문에 그는 그들을 철저히 말살하려 병력을 아끼지 않았다. 무려 병사와 용병의 반을 그들에게 쏟아부었다. 거기에서 탈출하리란 아무리 사나운 맹수라도 불가능할 터였다. 이미 후작의 나머지 병사들은 후카덴 백작의 성을 샅샅히 뒤지는 중이었다. 백작을 찾아내 죽이기만 하면 이곳의 영지를 차지할 뿐더러 이그니스 교단을 등에 없고 막대한 부를 누릴 수 있을 터였다. 그는 자신을 호위하는 용병들 사이에 서서 바쁘게 성 이곳저곳을 수색하는 병사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든 횃불들이 어둠 속에서 바쁘게 오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백작의 병사며 하인들은 모조리 교단에 있을 테니 방해될 것은 없었다.
"쳇... 신경을 끄는 수밖에 없겠군."
같이 사이좋게 지옥으로 떨어졌겠지. 후작은 그렇게 생각해 버리기로 했다. 쾅, 콰앙! 안에서 물건을 부수는듯 간간히 성 안에서 거친 소음들이 들려왔다. 뒤지는 김에 마음에 드는 물건은 가져도 상관 없다고 해 줬으니 아마 모두 다 매우 열정적으로 내부를 들쑤실 터였다. 백작이 혼자서라도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이미 성벽을 따라 병사들을 배치해 쥐새끼도 들락거리지 못하게 지키라고 명령을 내려 둔 상태였다.
"후작님! 후작님!"
"음?"
흐뭇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그는 누군가가 숨을 헐떡이며 다급히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다리를 질질 끌면서 달려오는 인영이 보였다. 오오, 드디어 온 건가. 후작은 씨익 입가에 곡선을 그렸다.
"어서 이리 오게! 어떻게 됐나!"
"헉, 헉..."
후작의 앞에 멈춰선 병사는 숨을 고르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횃불 아래에 드러난 병사의 모습은 처참했다. 피투성이의 제복에 투구 역시 엉망으로 깨어져 뒤통수의 연갈색 머리칼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처음 보는 녀석인데, 후작은 그렇게 생각하다 곧 고개를 내저었다. 이번 일을 위해 고용한 병사의 수는 원래 있던 수보다도 더 많았다. 낯선 이가 있는 것이 당연했다. 한참동안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던 병사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처, 처치했습니다."
"오오! 잘 했네, 잘 했어! 셋 다 확실히 죽은 것 맞지? 내가 자네에게 큰 포상을 내릴 걸세! 살아남은 것은 자네 혼자 뿐인가?"
"포상은 거절하겠습니다."
"응?"
후작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했다. 언제 숨을 헐떡였냐는 듯, 병사는 투구 아래로 히죽 심상찮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에서 검이 뽑혀 나온 것도 한 순간이었다. 철컥, 갑작스레 목 바로 아래 들이밀어진 차가운 검날에 후작은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주위에서 그를 지키던 용병들이 곧바로 무기를 꺼내려 했지만 퍽, 퍽! 하는 간단한 소리와 함께 모두 그 자리에 스르륵 쓰러져 버렸다. 후작은 악을 쓰기 시작했다.
"뭐, 뭐야! 네놈은 뭐야!"
"이렇게 뵈니 반갑네요, 후작님."
병사는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하며 투구를 휙 벗어 던졌다. 우당탕탕, 철투구가 바닥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갈색빛의 결 좋은 머리칼과 준수한 얼굴, 회색 눈동자가 그대로 어른거리는 횃불에 비쳤다. 그는 히죽 웃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찾아오는 서비스,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의 단장 루이카엔입니다. 어라, 표정이 왜 그러세요. 후작님께서는 제가 별로 반갑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친히 제 귀여운 부하들을 죽이라고 명령까지 하셨다구요? 이거 저랑 할 얘기가 꽤 많으실 텐데요."
"이런 미친... 이건 거짓말이야! 그놈들이 어떻게, 어떻게....!"
"이게 현실이란 거지. 설마 세상이 네놈 계산대로 잘 굴러갈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죠, 후작님?"
루이카엔은 빙글빙글 웃으며 검 끝으로 후작의 목을 꾹꾹 눌렀다. 기절한 용병들을 꽁꽁 묶어 포박하던 제르닌은 그에게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그만 놀고 어서 백작이나 찾아."
"지각생 주제에 말이 많다, 제르닌 군. 벨킨, 베르칸!"
루이카엔은 툴툴거리면서도 두 사람을 불렀다. 쌍둥이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늑대로 변신해 성 안으로 후다닥 뛰어들었다. 제르닌이 결박한 용병들을 발로 아무렇게나 구석으로 밀어둔 아델레트는 자신의 옷 위에 대충 걸치고 온 병사들의 제복을 던져버렸다.
"옷 바꿔 입는 거, 흔한 방법이긴 하지만 나름 괜찮았어. 덕분에 포위망도 쉽게 지나왔고. 하여튼 잔머리 하난 죽인다니까."
"그렇지? 조금 기분 나쁘긴 하지만 말이야."
루이카엔은 어깨를 으쓱했다. 완전히 무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후작의 얼굴이 차차 일그러졌다. 하지만 차마 큰 소리를 낼 용기는 없었다. 후작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려 할 때마다 귀신같이 알아차린 루이카엔이 검을 더욱 깊숙히 들이민 탓이었다. 루이카엔은 다시 시선을 후작에게로 옮겨 은근히 말했다.
"자, 병사들을 물려 주실까. 그게 싫다면 그냥 여기서 죽는거고. 네가 사로잡혔단 걸 알면 병사들이 날뛸 테니까 그냥 조용히 철수 명령만 내리는 거야. 그렇게 한다면 그냥 조용히 황성으로 압송해서 재판은 받게 해 주지. 뭐, 어차피 사형이겠지만."
"헹, 그렇게는 못 하지."
"단장!"
후작이 코웃음을 치는 것과 동시에 오스카가 비명을 질렀다. 어느새 성벽 밖을 지키던 병사들이 꾸물꾸물 그들 쪽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또 이런 전개인가. 루이카엔은 쯧 혀를 찼다. 오전 3시 05분. 시간은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