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10. 모든 일은 밤에 일어난다.(6)
"잘 있었냐, 멍청아."
루이카엔은 만신창이의 케빈에게 눈길을 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자욱한 연기는 아직까지 가실 생각이 없는듯 뭉게뭉게 끊임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케빈은 얼빠진 얼굴로 멍하니 입을 열었다.
"네놈이 여긴 어떻게?"
"통신 받고 바로 날아왔지. 생활관에 남이 있는 녀석들 싸그리 데리고. 아슬아슬했어. 설마 일정이 하루 당겨질 줄이야."
루이카엔은 그렇게 대꾸하며 어깨의 작은 가방에서 꾸러미 두 개를 꺼내 케빈에게 던져주었다. 얼결에 그것을 받아든 그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루이카엔은 설명을 이어갔다.
"해독초를 동그랗게 압축해서 폭발하도록 개조한 거라더라. 중독된 사람이 마시면 바로 의식을 잃었다가 제정신으로 깨어난대. 그래도 기본적으로 박힌 생각이 바로 없어지지는 않으니까 그건 네가 알아서 하고. 적어도 몸에 축적된 약은 어느 정도 중화되니까 그걸로 위안이나 삼아. 몇 개 없으니까 아껴 쓰고. 시간 없으니까 넌 얼른 교단으로 가서 카이스랑 합류해."
"뭐? 하지만 그 녀석 쪽에도-"
"아델이랑 제르닌 세트로 보냈으니까 걱정 마셔. 오스카한테도 지금쯤 벨킨이랑 베르칸이 갔을 거야. 여긴 나한테 맡기고."
케빈은 잠시 말 없이 그를 응시하다 곧 픽 웃음을 터뜨렸다.
"이 케빈 님께서도 고전을 면치 못하셨다고. 네놈 혼자서 되겠냐?"
"해독제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그리고 너 지금 단장 무시하냐? 아니면 설마 나 걱정해?"
"웃기시네! 내가 네놈 걱정 따위를 왜 해? 엉망진창이나 되버려라, 마음껏 비웃어 주마."
"나도 아시엘이랑 카이스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안 왔거든? 네놈이 뭐가 예쁘다고."
서서히 연기가 흐려지고 있었다. 루이카엔은 키들키들 웃으며 검을 바로 잡았다. 희뿌연 시야 사이로 보이는 병사들은 우왕좌왕하면서도 다시 대열을 갖추고 있었다. 처음의 반으로 수가 줄어 있었지만 여전히 벅찬 숫자임은 두말할 것 없었다.
"얼른 꺼져버려, 약골. 거치적거려."
"헹, 남말하네."
코웃음을 친 케빈은 해독초 꾸러미를 허리춤에 단단히 매달았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던 루이카엔은 곧 무언가를 알아차리고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너 제복 코트는 어디다 갖다 버렸냐?"
"똥개들이 하도 물어 뜯어서."
툭 대꾸한 케빈은 다시 검자루를 양 손으로 쥐고 루이카엔을 등지고 섰다. 가도 그냥은 사라지지 않겠다는 그 말 없는 의지에 단장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대충 포위망 뚫고 나가. 백작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오냐. 아시엘은 맡겨 둬."
휘이잉,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고여 있던 연기가 한꺼번에 밀려났다. 아니나다를까 바닥에 쓰러진 병사들은 모두 후카덴 백작 측의 사람들이었다. 틈을 주지 않을 생각인지 후작의 사병들은 이를 악물고 곧장 덤벼왔다. 루이카엔과 케빈 역시 동시에 화살처럼 튀어나갔다.
갑작스러운 늑대들의 출현에 병사들은 벙찐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여유롭게 오스카 쪽으로 다가간 두 마리는 순식간에 다시 검을 지닌 쌍둥이의 모습으로 변했다.
"오스카, 괜찮아요? 다치친 않았어요?"
"괜찮습니다, 베르칸. 두 분 덕분에 살았어요."
오스카는 자신보다 체구가 작은 그를 와락 껴안아 주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누르며 벅차게 말했다. 어느새 가까이 온 벨킨이 그를 노려보며 까칠하게 툭 내뱉었다.
"썩을 사고뭉치들."
"하, 하하... 하지만-"
"시끄러."
벨킨은 변명은 들을 생각도 없는지 등을 홱 돌려버렸다. 오스카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다 곧 문득 깨달은 사실에 퍼뜩 물었다.
"그런데 지원 요청도 안 했는데 어떻게- 셀레니스의 파병은 폐하의 허가가 있어야만 가능하잖아요."
"우리 단장님이 그런 거 신경 쓸 위인인가요. 그냥 단체로 튀었어요. 물론 주도는 단장님이고 아델레트랑 제르닌도 왔답니다. 아무래도 여러분들 만으로는 뼈도 못 추릴 것 같다고-"
".... 네?"
무시무시한 라인업에 오스카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눈앞이 깜깜해졌다. 이거 살아 돌아가도 되는 건가. 진심으로 걱정이 되는 부분이었다. 이만한 인원의 황성 대 탈주극이라니 미치지 않고서야 불가능했다. 복귀 후 날아들 수많은 문책들이 벌써부터 눈앞에 선한 느낌이었다. 그 생각을 대충이나마 읽어냈는지 베르칸이 무책임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요. 아델레트한테 혼날 각오는 해야 겠지만. 애초에 그녀가 따라온 것도 우리가 더 큰 대형 사고를 치지 않게 막으려는 거였으니까요."
"글쎄- 아델레트도 의외로 스위치 나가면 무시무시한데."
벨킨이 조용히 딴죽을 걸었다. 그렇다, 그의 말대로 이 조합은 통제 불능이었다. 오스카는 침울하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일단 여기부터 정리하고 우린 바로 백작성으로 간다. 케빈이랑 카이스는 교단이란 곳에 가서 아시엘과 합류해 교주를 붙잡을 거고."
"해독제도 루이카엔이 케빈에게 전달했을 테니 걱정 안 해도 괜찮아요. 아, 빼먹을 뻔 했네."
베르칸의 마지막 말에 오스카는 의아하게 눈을 꿈뻑였다. 그는 생긋 웃으며 덧붙였다.
"슌도 왔어요. 다른 쪽으로 들어가서 한 발 먼저 바로 교단으로 간다고 했으니 슬슬 산기슭 쪽에는 도착하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슬슬 카이스랑 만났을지도 모르겠네요."
카이스는 정신없이 달렸다. 간간히 뒤쪽에서 아델레트와 제르닌이 쳐내지 못한 단도 따위가 날아들었지만 그는 손쉽게 피했고, 어느새 그것마저 뜸해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일전에 갔던 산에 다다를 수 있었다. 어둠에 뒤덮힌 시커먼 산은 혼자라 그런지 그 때보다 훨씬 어두워 보였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카이스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바사삭, 바삭, 최대한 기척을 죽이려고 애썼지만 마른 낙엽이 밟히는 소리는 어둠 속에서 지나치게 생생했다. 카이스는 몸을 긴장시켰다. 기묘한 정적 속 찌르르, 하는 벌레의 울음이 이상하게도 기분 나빴다.
분명 교단 근처에는 경비가 쫙 깔려 있을 터였다. 그는 다시 검을 뽑았다. 스릉, 하는 쇳소리가 조용히 울러퍼졌다. 빽빽한 나뭇가지 사이로 희미하게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방향을 잡고는 다시 신중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한밤중의 숲이 주는 압박감은 생각보다 강했다. 그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아직 없었다. 길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며 그는 산기슭을 올랐다. 혼자인데다 아무도 마주치지 않은 덕분인지 카이스는 처음보다 더 빨리 교단의 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멀찍이 신전이 보이자 그는 나무 그늘 뒤에 몸을 숨기고 더욱 신중하게 접근했다.
"어?"
어째서, 란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그는 간신히 눌러 담았다. 교단 앞은 텅 비어있었다. 오늘 같은 날 아무런 방비가 없는 상태라니 이상했다. 평소에도 꼬박 꼬박 경비를 세워 놓는 치밀함을 보이던 그 교주가. 안심하기보다 먼저 의심이 들었다. 부스럭! 자신의 것이 아닌 기척이 느껴진 것은 그 때였다. 쭈뼛 온 몸의 털이 섰다. 카이스는 급하게 검을 다잡고 소리가 들린 쪽으로 몸을 홱 돌렸다.
"아- 미안, 놀랐어?"
다행히도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달빛 아래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슌이었다. 카이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검을 내렸다. 슌 역시 태연하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들의 30걸음쯤 떨어진 나무 뒤에 방금 카이스를 노리며 접근하던 병사의 시신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 밖에 없었다. 이 산의 이곳 저곳 보이지 않는 곳에 카이스가 만나지 못한 숱한 병사들이 바닥을 뒹굴고 있다는 것 역시.
"오셨습니까."
"개구멍으로 들어오긴 했는데 길을 잃어버려서. 한참 헤맸어. 그래도 어떻게든 잘 찾았나 보네."
슌은 어색하게 웃었다. 카이스는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두운 데다가 찾기 힘든 곳에 숨겨져 있으니 충분히 그럴 만 했다. 그때 마침 옆에서 또 다른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이서 뭐 해? 슌 너도 왔었냐?"
"아, 케빈 선배."
카이스는 살짝 몸을 당겨 자리를 내 주었다. 케빈은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그의 옆에 가까이 앉았다.
"그나저나 왜 보초가 아무도 없냐? 전력을 모조리 다 바깥에 퍼부었을 리는 없는데."
"그러게요. 저도 못 만났습니다."
카이스가 맞장구치며 답을 구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슌은 어깨만 으쓱했다.
"그런 것 보다 지금 저길 어떻게 들어가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아? 분명 안쪽에 득시글거릴 텐데."
"흠-"
케빈은 신음을 흘리며 두 번째로 마주하는 거대한 신전의 문을 응시했다. 숨어들까, 하지만 오늘은 아마 무리일 터였다. 그렇다면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마침 카이스도 같은 의견인듯 케빈에게 의미 있는 시선을 주었다. 케빈은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슌이 의아하게 눈을 깜빡였다.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 거야?"
"물론이지. 최고의 작전이야."
케빈은 의기양양하게 대꾸했다. 슌은 조금 불안해졌다. 이 인간들이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인가.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짐작조차 하지 못한 것이었다. 설마 그 '작전' 이라는게 당당하게 '발' 로 노크해 문을 박살내고 당당하게 뛰어 들어가는 것일 줄은. 하지만 대략 3분 후 슌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 작전에 동참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