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06. 모든 일은 밤에 일어난다.(2)
"으아아아악!"
우드득! 케빈의 손에 잡힌 병사의 손이 이상한 방향으로 사정없이 뒤틀리는 것과 동시에 엄청난 비명이 터져나왔다. 땡그랑, 엉망이 된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몇 개의 단도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손버릇이 영 나쁘네, 형씨는. 아무한테나 삿대질 하면 안 된다고 누가 안 가르쳐 주던?"
"크으윽- 이, 자식이!"
병사는 눈을 홉뜨고 자유로운 손으로 칼을 뽑아들어 기습을 감행했다. 하지만 케빈은 그것보다도 더 빠르게 그의 명치에 무릎을 꽂아 넣었다. 뻐억! 갈비뼈라도 부러지는 듯한 타격음이 울려퍼지고 병사는 신음도 흘리지 못한 채 스륵 쓰러져 버렸다.
우두둑, 케빈은 목을 꺾으며 순식간에 적이 되어 버린 자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정확히 몇 명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혼자서 다 처리할 수 있는 숫자는 아니었다. 하여튼 기분 나쁜 새끼, 그는 혀를 쯧 차며 욕설을 툭 뱉었다.
"그럼 어쩐다. 이거 명백히 반역죄인데... 황제의 기사에게 먼저 손을 대다니 말이야."
"......."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거잖아?"
케빈이 킥킥 웃었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병사들은 잔뜩 굳은 눈으로 살기를 피워내며 오로지 죽일 생각만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케빈 역시 답을 바랬던 것은 아니었는지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요즘 조금 몸이 근질거린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어. 최근엔 계속 애들만 데리고 다녀서 힘 조절한다고 솔직히 좀 애먹었어. 죽이지 말라고 이야기는 했지만 너네들한텐 해당 사항 없는 이야기겠지? 아무렴 어때."
자신을 포위한 병사들에게 한 발짝 성큼 다가가며 케빈은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병사들과 기사들은 움찔하며 더욱 경계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키들키들 웃음을 터뜨렸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순간적으로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꼈다.
완전히 어두워진 밤하늘에 차가운 달빛이 한 줄기 스며들어 그의 얼굴을 씻어내렸다. 케빈은 큭큭거리며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식은 밤공기가 전운이 감도는 그들의 사이를 서늘하게 감싸안았다. 케빈의 눈이 호기와 살기로 번뜩였다.
"그러니까 네놈들 목숨 보장은 못 하겠다. 알아서 살아남아."
".....!"
콰드드득! 무언가가 박살나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케빈과 가장 가까이 서 있던 갑옷의 기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경악했다. 후두둑! 후둑! 부서진 그의 상체 갑주가 바닥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으아아악! 갑옷이!"
"그딴 걸 두르고 있으니까 제대로 대처를 못 하는 거지."
케빈은 이죽거리며 검을 내렸다. 칼등으로 강하게 맞았을 뿐인 갑옷은 유리라도 된 양 힘없이 깨져버렸다. 기사는 경악하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케빈은 굳이 붙잡지 않았다. 그는 히죽거리며 갑옷의 파편을 하나 주워 들고 한 손으로 던졌다가 탁, 다시 받았다.
"마지막 기회다. 여기서 순순히 물러나면 나도 그냥 얌전히 내 할일이나 하러 갈게. 어차피 돈으로 고용된 거잖아? 잘 판단해. 물론 네놈들이 대가리 숫자는 많다만 호락호락하게 목을 내어 주진 않을 거야. 암살자도 제대로 못 죽이는 우리 꼬맹이만큼 무른 인간도 아니고."
어쩔래-? 히죽, 케빈은 짓궂게 웃었다. 병사들은 저마다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곧 살기를 띄우며 저마다의 무기를 다잡은 것이었다. 대답으로는 충분했다.
"-죽여!"
"와아아아!"
분에 찬 목소리로 갑주가 반파된 기사가 악을 쓰자 그것을 신호로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가 일제히 케빈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올 줄 알았어. 케빈 역시 검을 가볍게 쥐고 땅을 박차 돌진했다.
-일대는 순식간에 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서걱, 케빈은 조롱당한 노여움을 숨기지 못하고 달려드는 예의 그 기사를 서슴없이 베었다. 크헉, 짧은 단말마를 내지른 그는 그대로 피를 뿜어내며 차가운 바닥에 쓰러졌다. 그런 그의 시신을 밟고 수많은 병사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채애앵! 케빈은 옆면에서 쇄도하는 검날을 간단하게 쳐냈다. 그리고 그 괴력에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는 병사의 몸뚱이를 양단했다. 촤아악!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어 그의 하얀 제복에 흔적을 남겼다. 남자는 입도 뻥긋하지 못한 채 절명했다. 그가 쓰러지는 것도 보지 않고 케빈은 곧바로 몸을 비틀어 뒤에서 단도로 공격을 감행하는 자의 심장을 꽤뚫었다. 푸우욱, 유쾌하지 못한 소리와 함께 병사는 충격으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그의 얼굴이 고통으로 물들어 비명을 쏟아내려 했지만 케빈은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냈다. 울컥, 남자는 한 움큼 피를 토해내고 쓰러졌다. 케빈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감히."
뻐어억! 그는 무식하게 돌진해 오는 남자의 얼굴을 걷어찼다. 크어억! 그는 그대로 흙바닥에 쓰러져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두개골이 박살난 것이었다. 케빈의 말이 이어졌다.
"누구를."
그의 얼굴은 한없이 냉정했다. 이번에는 은빛 갑옷의 기사 하나가 커다란 검을 치켜들고 달려들어왔다. 케빈은 검기를 일으켰다. 붉은 액체로 번들거리는 그의 도신이 주황색의 빛에 감싸였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기사의 몸통을 갑옷 채로 베어냈다.
"으아아아악!"
툭, 정확히 상반신과 하반신으로 갈라진 몸뚱이는 자신이 죽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비명을 질러대다 축 처졌다. 절단면에서 혈액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자세를 다잡던 케빈은 문득 발 밑이 축축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시선을 아래로 두었다. 가여운 젊은 기사들의 시신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의 부츠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그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고, 병사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죽어라아아아!"
케빈은 움직이지 않았다. 끈적한 바닥에서는 이미 시선을 거두었지만 그는 자신에게 공격을 가해오는 병사들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그렇다고 확신했다. 미처 피할 틈이 없을 거라고. 그렇기에 병사들은 크게 도약했다. 이대로 머리통을 갈라놓자! 그렇게 생각하며 그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케빈과 눈을 마주치기 전까지는.
"인질로 삼았다고?"
인광이 서린 그의 눈동자는 어느새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안돼, 위험하다. 병사들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케빈의 검이 움직이고 있었다. 은빛과 붉은색이 섞인 호선이 밤하늘에 그려졌다. 촤악! 피로 물든 하얀 제복은 이제 거의 제 색깔을 잃어 가고 있었다. 달빛을 받아 하얗게 탈색된 그의 얼굴 역시 튄 살점과 혈흔으로 엉망진창이었다.
켁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고깃덩어리가 되어 버린 이들의 육체가 투둑, 툭 바닥에 떨어졌다. 케빈은 피가 덕지덕지 붙은 검을 털어내며 자신을 에워싸듯 포위한 이들을 마주보았다. 겉보기에는 무방비한 상태 같았지만 병사들은 섯불리 덤빌 생각을 하지 못했다. 붉게 젖은 머리칼과 제복, 바닥으로 늘어진 검, 형형히 빛나는 눈. 어느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황제의 기사를 뭘로 보는 거냐, 멍청이들아."
케빈은 고개를 젖히고 툭 내뱉았다. 자세히 보면 그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그건 웃는 게 아니었다. 분노와 투지가 뒤섞인 무언가였다. 마치 야수같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맹수 이상의 야수, 풀려난 괴물이었다. 거대한 발톱과 이빨을 가진 그는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이 자리에 살아 숨쉬는 모든 이들의 목을 물어뜯고 사지를 찢어 발길 것만 같았다.
그는 죽은 자들의 체액으로 미끌거리는 부츠를 바닥에 문댔다. 얼굴에 튀어 흘러내리는 피도 소매로 대충 훔쳤다. 이미 푹 젖어 있었던 터라 별 도움은 되지 않았지만. 최대한 빨리 성 안으로 돌입한다. 그것이 케빈의 유일한 작전이었다. 아마 저 동문은 굳게 잠겨있을 터였다. 그것은 아마 오스카와 카이스 쪽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일단은 영지 안으로 진입한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게 최우선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숫자를 최대한 줄여 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