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08화 (208/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95. 도화선(2)

"이 앞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

후작의 휘양찬란한 성 앞에 다가서자 마자, 문지기 병사가 케빈과 오스카의 앞을 막아섰다. 두 사람은 시선을 교환하며 실실 미소를 흘렸다. 기분이 나빠진 병사가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리기가 무섭게, 오스카는 망토를 살짝 들춰 안의 제복을 슬쩍 보여주었다. 병사의 얼굴이 흙빛이 되는 것 역시 순식간이었다.

"뭔지 알지? 그만 떠들고 안내해라. 최대한 조용히."

"예, 예!"

케빈이 덧붙이며 위협적으로 씨익 웃자 그는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카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것을 신호로, 돌덩이마냥 뻣뻣하게 굳은 병사가 삐걱 삐걱 억지로 다리를 움직여 두 기사를 성 안으로 안내했다. 오스카와 케빈은 병사의 등 뒤에서 가볍게 서로의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긴 행렬은 얼마 지나지 않아 후카덴 백작령의 입구에 다다랐다. 흔들리는 짐마차의 꼭대기에 앉아 먼발치부터 보이기 시작하는 백작령을 지켜보던 카이스는 눈부신 아침 햇살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곧 상단은 멈춰서서 병사들의 간단한 검열을 받았다. 행여나 들킬까 카이스는 몸을 움츠리고 후드를 눌러 썼지만 성문은 싱거울 정도로 쉽게 열렸다.

다시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상인들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린 페리스가 다시 카이스의 옆으로 올라왔다. 카이스는 그에게 자리를 살짝 비켜주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움직일 겁니까?"

"상점들을 돌며 물건을 공급합니다. 보통이면 평범하게 시장에서 도매 거래를 하는데... 이곳 영주님이 부탁하시는 바람에 일일히 주문받은 물품을 상점에 배달하는 거죠."

영주의 부탁이 아니라, 교주의 명령을 받은 백작부인의 소행이겠지. 속으로만 웅얼거린 카이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짐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페리스가 당황해 뒤를 따르려 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가로막았다.

"저는 그냥 사람들 사이에 끼여 있겠습니다. 괜히 눈에 띄였다간 곤란하니 페리스 씨도 아무 말 하지 말아 주십시오."

"아, 예..."

그는 석연찮은 얼굴로 수긍했다. 그러는 중에도 짐마차는 계속해서 움직였고, 이제 카이스에게도 낯설지 않은 길에 접어들어 곧 첫 번째 가게 앞에 멈춰 섰다. 미리 나와 있던 가게 주인이 그들을 맞이하자 상인들은 우르르 내려 물건을 옮기기 시작했다. 카이스는 조금 떨어진 자리까지 물러서 그들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일부러 저렇게 성가신 방법을 취한다는 건-'

최대한 마을 사람들과의 접촉을 막으려는 의도인가. 저 페리스란 자도 이 이상한 거래에 위화감을 느끼고는 있는 것 같지만 그 여자- 에쉬리아는 상단에도 압박을 넣어 잠자코 만들었을 터였다. 그게 아니라면 교단과 은밀히 통하는 것처럼 보이는 셰단 후작이 직접 입단속을 시켰다던가.

"이 영지와 거래를 하는 건 이 상단 뿐입니까?"

"저희 상단 안에서도 이 팀 뿐이지요. 의도한 건 아닙니다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어느새 다가온 페리스가 답해주자 카이스는 음, 하고 신음을 흘렸다.

"이런 식으로 거래한다는 점, 상단주도 알고 있습니까?"

"예. 하지만 잘못 발설했다간 거래가 끊길 수도 있으니까요. 공자님도 부디 부탁드립니다."

뭘 부탁한다는 건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카이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제야 페리스는 안심한듯 히죽 웃었다.

"공자님은 과묵하신 분 같으니 걱정 없습니다."

"예..."

카이스는 건성으로 넘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딱히 상가랄 것도 없는 작은 동네라도 식당과 악세사리점, 옷가게 등 있을 것들은 다 있었다. 그때 그는 양지바른 곳마다 펼쳐진 보자기를 발견하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보자기 위에 곱게 깔린 것은 푸르스름한 풀들. 분명 유령 사냥을 할 때만 해도 보지 못했던 것들 이었다.

사람들의 이목이 자신에게 쏠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페리스까지 한눈을 판 사이를 틈타 카이스는 슬그머니 무리에서 벗어나 그쪽으로 다가가 잘 마르고 있는 약초들 중 형체가 제일 고스란히 남아 있는 잎 하나를 집어 들었다.

사슴뿔과 비슷한 모양. 어찌 보면 날개와도 닮은 것 같은. 카이스는 자연스럽게 전날 아시엘이 전해 줬다는 약초의 모양에 대한 설명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이게 그 약초인 건가. 잎을 빙글빙글 돌리며 찬찬히 뜯어보던 카이스는 그것을 짜부라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품 속에 넣었다.

"앗, 그쪽으로 가면 안 됩니다!"

"아-"

타이밍 좋게도 물건 거래에 정신이 없던 가게 주인이 카이스에게 제지를 걸자 그는 순순히 한 걸음 물러섰다.

"이게 무슨 약초입니까?"

"기를 복돋우는 거요."

퉁명스레 대꾸한 남자는 카이스의 옷깃을 붙잡아 끌어 아예 약초와 멀리 떼놓고 나서야 다시 일터로 돌아갔다. 그에게 잡혔던 옷을 툭툭 털며 카이스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 눈으로 좇았다. 이런 과민반응이라면 역시 정답이라는 뜻.

'아시엘 말로는 교단에도 한가득 쌓여 있다고 했는데...'

어쩌면 교단에서 흡입하는 것 외에도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이 독초를 주기적으로 섭취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교단에 바치는 것 이상으로 약초를 채취하고 가정에서 이용한다면- 아시엘이 교단 내에서 빼돌리는 것 만으로는 사람들을 제정신으로 돌리기엔 무리였다.

나름의 판단을 내린 카이스는 통신 목걸이를 품에서 꺼냈다가 곧 아차, 하며 다시 집어 넣었다. 지금 그쪽 상황이 어떨지 모르니 섯불리 연락했다가는 아시엘이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결국 아시엘로부터의 통신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케빈과 오스카는 병사에게 안내받아 들어간 내성 앞에서, 밖의 연락을 받고 급하게 모인 하인들에게 행패(?)를 부려 집사까지 나오게 했다. 결국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셰단 후작의 집무실 앞까지 온 두 사람은, 아직 방문 소식을 듣지 못한-워낙 빠르게 진격해 온 터라 연락도 받지 못했다- 아직까지 곁에 있는 하인들과 집사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혹시라도 엿듣거나 하면 죽여버린다."

"알아 들었으면 얼른 꺼져!"

케빈의 호통에, 예상했던 대로 하인들은 곧장 줄행랑을 놓았다. 그렇게 텅 빈 복도에서 그들은 눈빛을 교환했다.

"그럼 간다."

"오케이."

오스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신호로 두 사람은 뒤로 몇 발짝 물러섰다. 그리고- 콰아아앙! 있는 힘껏 두꺼운 집무실의 문짝을 걷어찼다. 엄청난 파열음과 함께 경칩과 문고리가 박살 나 너덜해진 문 뒤로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항의 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눈만 동그랗게 뜬 후작의 모습이 드러났다.

"뭐, 뭐야?"

"뭐고 자시고,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소속 기사다! 당장 예를 갖추지 못해?"

케빈이 고함을 내지르자 후작은 허둥지둥 의자에서 일어나 두 사람 앞으로 달려갔다. 셀레니스의 증표인 하얀 제복에 가슴의 금빛 태양을 확인한 이상 망설일 리 없었다. 꼬부랑 갈색 수염과 반쯤 벗겨진 머리, 그리고 창백한 볼. 볼품 없는 외모였지만 그래도 터질 것 같은 뱃살을 감싼 옷은 굉장한 고급이었다.

"무, 무, 무슨 일로 이 누추한 곳까지...? 그 전에 성함을 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셀레니스 기사단 소속의 오빈과 케스카다. 불법으로 영지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신고를 받아서 말이야."

오스카는 거드름을 피우며 앞으로 슥 나섰다. 하지만 케빈과는 눈으로 열심히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누가 오빈이고 누가 케스카야? 몰라, 알 게 뭐냐. 케빈, 네가 오빈 해! 알았으니까 하던 거나 마저 하라고.

그는 다시 후작에게 힐끗 곁눈질했다. 켕키는 곳을 정확히 찔린 셰단 후작의 얼굴은 완전히 백짓장이 되어 있었다. 반쯤 걸려 들었나- 오스카는 씨익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어쩔까, 이대로 연행해 버릴까? 응? 오빈."

"하, 하, 하지만! 저는 황제 폐하께 충성을 바치는데..."

"아앙? 그딴 거 알 게 뭐야. 중요한 건 네가 폐하가 제정하신 법을 어겼단 거지. 혹시나 해서 말 해두는데, 두 명만 왔다고 안심해서 허튼 수작은 안 부리는게 좋을 거다. 우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황성에선 널 반역자로 판단, 즉시 처형당할 테니까."

케빈까지 험상궂게 윽박지르자 셰단 후작의 낯빛은 점점 더 새파랗게 질려 갔다. 슬슬 넘어온 건가. 케빈은 그의 얼굴을 살피고 선심쓰듯 한 마디를 툭 뱉았다.

"하지만- 지금 그만 둔다면 특별히 없던 일로 하고 넘어가 주지."

"그, 그건 안 됩니다!"

대충 예상했던 대로 후작이 다급하게 외치자, 이번에는 오스카가 눈썹을 휘었다.

"어째서지? 폐하의 명령보다 우위인 게 있는 건가?"

"아, 아무튼 그것만은 안 됩니다! 제발!"

아예 셰단 후작은 애걸 복걸을 하기 시작했다. 오스카와 케빈은 서로를 힐끗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쪽도 교단에 무언가가 잡힌 게 틀림 없었다. 케빈은 다시 운을 뗐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또 있지."

후작이 의아하게 고개를 들자, 오스카는 그에게 바싹 다가서서 그만이 들을 수 있도록 작게 속삭였다.

"이번 전쟁을 통해 얻는 금전적 수익을 우리 둘한테 줘. 그렇다면 폐하께도 보고하지 않고 넘어가는 건 물론, 적을 공격하는 데에도 힘을 보탤 테니까. 대신 작전과 현 상황에 대해서 빠짐없이 우리에게 보고 해. 네놈이 허튼 짓을 꾸미지 않는지 감시할 필요가 있으니까."

셰단 후작은 급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스카는 히죽 웃으며 케빈에게 엄지를 세워 보였다. 케빈 역시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1단계는 성공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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