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94. 도화선(1)
짧은 밤은 빠르게 지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먼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반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카이스는 창가에 걸터앉아 멍하니 하늘을 내다 보았다. 검은 어둠의 장막이 서서히 걷혀가며 별들이 사라지고 건물 위로 붉은빛의 손길이 조금씩 조금씩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똑똑. 정적을 깨는 노크 소리에 그는 고개를 들었다. 곧이어 밖에서 낯설지 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단주였다.
"곧 출발 시간입니다. 준비하시고 아래로 내려오시죠."
그는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던젔다. 소년의 무심한 듯한 검은 눈동자에 아침을 여는 첫번째 햍볓이 스며들었다. 후, 짧게 한숨을 내쉬고 카이스는 몸을 일으켰다.
"예. 알겠습니다."
그는 의자에 대충 걸쳐 둔 남루한 망토를 낚아채듯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지체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문을 왈칵 열어젖혔다.
반 강제로 빌려 숙소로 쓴 상단의 2층 손님방에서 내려온 그는 먼저 와있던 케빈과 오스카를 발견했다. 카이스는 무뚝뚝한 얼굴에서 눈썹을 살짝 휘는 것으로 의아함을 표현했다.
"두 분은 안 가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막내 나가는 건 봐야지. 형아들이 막내들 밖에 보내 놓고 퍼잘 수 있을 사람으로 보이냐."
케빈이 히죽 장난스레 웃으며 그에게 꿀밤 먹이는 시늉을 했다.
"그나저나 아침마다 정신 못 차리는 네놈이 새벽부터 움직이다니, 천지가 개벽할 일이네."
"이런 상황 아니면 절대로 못 볼 꼴이니까 눈도장이나 찍어 두라고."
오스카까지 놀리듯 빙글거렸지만 카이스는 못 들은 체 망토를 두르고 후드를 눌러 썼다. 상단 안은 후카덴 백작령으로 들여갈 물건들을 챙기는 상인들로 분주했다. 꽉꽉 눌러 담은 짐꾸러미를 마차에 싣는다며 바쁘게 안밖을 오가던 그들을 눈으로 쫓던 그는 곧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낯선 이를 발견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당신이 페리스 씨 입니까?"
"그렇습니다. 상단주님께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사정이 있으시다고요."
어렸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잃어버린 남동생을 찾아 여기까지 들어왔지만 혼자서는 찾을 길이 없어 잠깐 상단에 몸을 위탁한다. 참고로 고아지만 굉장한 후원자를 가진, 가엽지만 운 좋은 소년- 이라는 장황한 설정을 다시 한번 돌이킨 카이스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카이스라고 합니다."
"사정은 잘 들었습니다. 최대한 편하게 모실 테니 걱정 마시고 동생 분 찾는 것에만 집중해 주십시오."
과하게 깍듯한 태도에 카이스의 얼굴에 껄끄러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 굉장한 후원자라는 거, 별로 필요 없었던 거 아냐? 케빈이 오스카에게 작게 속삭였다. 편하게 움직이고 좋지 뭐. 오스카가 마찬가지로 조그만 소리로 대꾸했다.
"출발은 언제입니까?"
"이제 곧입니다. 부디 제 집처럼 편안하게-"
"됐으니까 출발이나 하시죠."
결국 카이스가 그의 입을 막자 페리스는 불만스럽게 입을 비죽이다 순순히 물러갔다. 대화 몇 마디에 순식간에 지친 표정이 된 카이스를 보며 케빈은 어이가 없어졌다.
"넌 귀족 나리가 이런 걸 불편해 해서 어쩌냐?"
"이런 걸 싫어하니까 집에서 뛰쳐 나왔죠. 그리고 셋째 아들이니 귀족 나리와는 거리가 멉니다."
카이스는 옷을 가다듬으며 불퉁하게 대꾸했다. 케빈은 끌끌 웃으며 그의 머리칼을 벅벅 헤집어 놓았다.
"어쨌든 잘 다녀와라. 무뚝뚝 곰탱이의 저력을 보여 주라고."
"무뚝뚝 곰탱이는 또 뭡니까..."
"자, 자. 부르잖아."
카이스가 뭐라 불평을 했지만 오스카는 무시하고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는 불만이 남은듯 개운치 않은 얼굴로 뒤를 잠깐 돌아보다 곧 바깥에서 목이 터져라 출발을 외치고 있는 페리스를 따라서 상단 건물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스카와 케빈은 그가 아예 문 밖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몸을 돌렸다.
"그럼 바깥 일은 귀여운 막내에게 맡겨 두고, 우리도 슬슬 움직여 볼까."
"경험 1년차도 안 된 애송이들한테 질 순 없으니까."
케빈이 히죽 웃으며 던진 말을 오스카가 가볍게 받았다. 둘은 개구쟁이같은 얼굴을 마주보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주먹을 들어 맞부딪혔다.
페리스의 안내를 받아 뒤의 공터로 가자마자 카이스는 눈에 들어온 행렬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수수한 옷차림의 상인들이 수많은 말과 마차에 짐을 싣고 내리며 출발 준비에 한창이었다. 카이스가 속으로 순수한 감탄을 흘리는 사이, 그의 눈치를 살피던 페리스는 난감해졌다. 카이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그의 얼굴은 시종일관 무표정이었으니 관심이 없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 출발 안 합니까?"
"아, 예."
자신만을 멀뚱멀뚱 바라보는 페리스의 의중을 모르는 것은 카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가 답답함에 재촉하자 페리스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님은 짐마차에 함께 오르십시오. 그럼 출발한다!"
그가 크게 외치자, 말과 마차, 그리고 상인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이스는 행렬의 가장 앞 마차에 발을 걸쳐 짐더미 위에 걸터앉았다. 곧 다른 상인에게 지휘를 맡긴 페리스가 그를 따라 마차 위로 기어 올라왔다.
"꽤 큰 규모입니다만 평소보다는 좀 적은 편이지요. 이번에는 백작의 성으로 들어가는 물건이 빠져서 평소의 3분의 2로 줄었습니다."
"... 백작의 성이라면 후카덴 백작 말씀이십니까?"
"예. 원래 백작령으로 들어갈 때 쯤에는 백작 성으로부터 필요한 물건에 대한 연락이 들어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필요 없다는 짤막한 전서구 뿐이라... 역시 상황이 뒤숭숭해서 그런 걸까요."
카이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후카덴 백작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모양이었으니 그가 직접 물품 공급을 끊어낼 리 없었다. 그 외에 직접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단 한 사람은.
'백작 부인인가.'
백작과 집사 외 모두가 지금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물자를 끊은 거라면. 그쪽도 이미 영지전을 준비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여러모로 골치 아프게 됐는데. 옆에서 주절주절 쓸데없늡 말을 늘어놓는 페리스를 완전히 무시하며 그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지금 가진 것은 애검과 통신용 목걸이, 그리고 머리. 혼자 남은 지금,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방으로 돌아온 케빈과 오스카는 한쪽에 모아 벗어 두었던 하얀 셔츠와 바지를 입었다. 한쪽에 걸린 거울 앞에서 머리도 말끔하게 빗어 넘기고 얼굴도 깨끗하게 닦았다. 한창 옷매무새를 다듬던 케빈이 입을 열었다.
"야. 우리가 지금 무슨 짓 하려고 하는진 알고 있지?"
"당연하지. 우리 귀여운 공주님 구출 작전 아냐?"
셔츠 단추를 잠그며 오스카가 대꾸했다. 케빈은 헹,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렇지. 그나저나 넌 그나마 우리 기사단에서 얌전한 편이었잖냐. 괜찮겠어?"
"뭐 어때. 공갈 협박 쯤이야 늘 하던 거고. 요는 그거잖아? 영지전에 대한 건 모두 셰단 후작한테 넘기는 거. 똥물은 그쪽에 다 뒤집어 씌우면 되는 거잖냐."
"그쪽 만이 아니지. 우리가 붙들고 똥물에 뛰어드는 거지."
"선배 된 도리로서 그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 스물도 안 된 꼬맹이가 그렇게나 고생하고 있는데."
오스카는 몸을 슥 일으키고 허름한 망토로 하얀 제복을 가렸다. 그리고는 케빈에게도 대강 걸쳐뒀던 수수한 겉옷을 던져주었다.
"우리도 슬슬 가자."
"꼬맹이들 패기에 질 수야 없지."
케빈은 낄낄 웃으며 허공에 붕 뜬 망토를 잡아채 어깨에 둘렀다.
"좀 둘러가긴 하겠지만, 진정한 꼴통이 뭔지 구경이나 시켜 주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