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93. 향기 뒤에 감춰진 것(4)
"-신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니 모든 악한 것을 막아주시고..."
소년의 낭랑한 목소리가 회장 안을 가득 채우자 사람들은 얼른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아시엘은 주의 깊게 신도들을 다시 살핀 후 천천히 화로 쪽으로 다가갔다. 물론 입으로는 계속 알 수 없는 기도문을 중얼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믿음이 있다면 그 어떤 장애물도 없다. 악신의 저주도 스스로와 이그니스 님을 믿는 마음에는 통하지 않는다."
새빨간 장작 사이에 놓인 약초 꾸러미는 어느새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이거 위험한데, 아시엘은 속으로 쯧 혀를 찼다. 이걸 어떻게 꺼내면 좋을까. 주변에 부지깽이나 쌓아둔 장작 정도만 있어도 좋을 텐데 어찌 된 노릇인지 쓸만한 게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마력을 운용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곧 심장이 꽉 막히는 듯한 느낌에 흡, 하고 숨을 크게 들이켜야 했다.
"... 항상 나는 나를 믿고...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할 것이다. 그게 바로 신의 뜻."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시엘은 스스로에게 자문했다. 이걸 지금 꺼내지 못해도 나중에 선배들이 구해 온 해독제라면 사람들을 제정신으로 돌려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이상 상황이 악화되는 건 막아야 하니까.
"눈앞에 주어진 일은 피하지 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서 눈을 돌리지 마라."
"어떻게 됐어? 성공했어?"
[네... 어떻게든. 약초에 대해선 좀 더 자세히 알아 보셨어요?]
케빈은 무릎 위에 놓아둔 종이를 집어들었다. 대충 휘갈겨 쓴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어어. 그 약초, 생각보다 독성이 강하지는 않나 봐. 주기적으로 접촉하지 않으면 곧 약 기운이 떨어져서 정상으로 돌아온대. 하지만 완전히 제정신으로 만들려면 해독초가 꼭 필요한 것 같아. 그동안 세뇌당한 것도 있을 테니까."
[그래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해독초는 어쩌기로 했어요?]
"일단 주변에서 긁어모으는 중인데, 아무래도 루이카엔한테 부탁하는 게 나을것 같아. 그것 때문에 말이야... 일단 후카덴 백작령으로는 염탐할 겸 카이스만 가기로 했어. 오스카랑 나는 여기서 상황을 좀 더 지켜보려고."
[그게 좋겠네요. 당장 넷이서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으니까...]
그렇게 답하는 아시엘의 목소리는 조금 지친듯 했다. 케빈은 일부러 쾌활하게 말했다.
"괜찮아. 이미 충분히 잘 해내고 있으니까. 자신 없는 소리는 너답지 않잖아? 우리 족칠 날을 고대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
[뭐... 그렇죠. 그리고 제가 걱정하는 건 선배네 쪽이거든요? 사고 치지 마시라구요.]
"켁, 너한테만큼은 듣고 싶지 않거든. 애초에 너무 얌전하면 우리 기사단 답지 않다고."
[그런 걸로 정체성 찾지 마세요, 서글프게.]
"사실인데 어쩌라고."
에휴, 하고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저쪽에서 들려왔다. 케빈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쪼그만 게 한숨은."
[영지전 건은 어떻게 됐어요?]
"셰단 후작이 후카덴 백작을 노리는 건 확실한 것 같다. 낮에 알아봤거든."
[골치 아프게 됐네요.]
"동감."
어쨌든 이번 파견의 궁극적인 목표는 후카덴 백작령을 지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별 이상한 사이비 교가 속을 좀먹어 들어가고 있고 밖에서는 늙은 너구리가 속이 텅 빈 나무를 차지하려 노리고 있었다.
[3파전이 되겠네요. 뭐, 이쪽 사람들이 타이밍 좋게 제정신만 차려 준다면야 괜찮겠지만.]
"그렇지... 넌 너무 무리하지 말고 기다려. 우리가 곧 데리러 갈게."
[아... 네.]
아시엘의 애매한 웃음소리를 끝으로 통신은 끊겨버렸다. 뭐야, 이 녀석. 케빈은 고개를 갸웃하다 곧 카이스에게 손짓해 목걸이를 돌려주었다.
"자. 잘 썼어."
"녀석이 뭐라고 했습니까?"
카이스가 목걸이를 다시 걸며 묻는 말에 케빈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약초 가로채는 거 성공했다고. 그나저나 어떻게 했는지 물어보는 걸 깜빡했네. 뭐 상관 없지만."
"... 저도 준비 끝마쳤습니다. 그런데 정말 저 혼자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괜찮아, 괜찮아. 동향만 살피고 다시 나와. 일단 정보가 있어야 작전을 짜니까. 그것보다 네가 더 의외인데. 당장이라도 아시엘을 구하고 싶어서 초조해할 줄 알았더니."
케빈의 물음에 카이스는 잠깐 말을 고르는듯 눈을 꿈뻑거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그러고야 싶습니다만... 현실적으로는 힘드니까요. 그러다 일을 훼방 놓으면 더 큰일이 되지 않습니까."
"캬! 다 컸네. 그런 생각도 할 줄 알고."
"적어도 어린애라고 불릴 때는 지난 것 같습니다."
그가 무뚝뚝한 얼굴에 불만을 담아 대꾸하자 케빈은 킬킬 웃으며 그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그래, 그래. 오스카는?"
"해독초 찾으러 가셨습니다. 그래도 이미 밤이 늦어서 힘들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케빈은 찌뿌듯한 몸으로 기지개를 쭉 켰다. 끄응차, 하며 이리저리 몸을 비틀던 그는 곧 깍지를 풀고 자신의 뺨을 탁, 쳤다.
"머리 쓰는 건 취미가 아니지만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지."
"그리고 나중에는 아시엘에게 한 대씩 걷어차이면 되는 거군요."
"그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게?"
카이스의 조용한 말에 케빈이 어색하게 웃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그 성질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케빈과 카이스는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변 상단을 모두 돌고 돌아온 참인지 지친 기색의 오스카가 방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케빈은 손을 슥 들었다.
"수고. 좀 알아봤냐?"
"알아는 봤지. 그리고 완전히 공 쳤다. 이 근방에는 그 풀을 취급 안 하나 봐. 이름이 뭐랬지, 세넥 이라고 했던가. 잘 쓰이는 약초도 아니고 거의 잡초 취급이나 마찬가지니까."
터덜터덜 걸음을 옮긴 오스카는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다.
"역시 루이카엔한테 부탁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은데."
"하아..."
그의 말에 케빈은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가만히 지켜보던 카이스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황도에 알아봐 달라고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게... 좀 문제가 있어서."
오스카는 케빈의 눈치를 보았다. 케빈 역시 오스카를 힐끗 곁눈질했다. 답답함에 카이스는 눈썹을 휘었다.
"왜 그러십니까?"
"으음.... 그게, 셰단 후작은 섣불리 건드릴 수가 없어서. 영지전을 저지하려면 그에게도 어떤 조취를 해야 하는데. 후작은 황제 폐하 쪽 사람이거든."
"자금줄이지, 심지어."
오스카와 케빈이 꺼림직하게 설명을 늘어놓았지만 카이스는 여전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어차피 하기로 하신 거 아닙니까? 그게 어째서 문제가 되는 겁니까?"
"황성에서 휘젓고 다니면 폐하 귀에 들어갈 거 아냐, 바보야. 우리한테 제약이 걸릴 수도 있다고, 그러면."
케빈이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카이스는 여전히 변화 없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단장님께 부탁하면 되지 않습니까. 비밀로 해달라고 하면 충분히 가능할 텐데요. 엿 먹이신다면서요. 그럴 거면 아예 다 끌어들이는 게 더 좋지 않습니까."
과묵한 소년이 드물게 입 밖으로 낸 긴 말이 끝나자, 케빈과 오스카는 저도 모르게 황당해져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왜 저러시지, 카이스가 멀뚱멀뚱 자신들을 바라보기만 하자 두 사람은 이마를 짚었다.
"...... 야, 카이스."
"예?"
"너 아시엘이랑 놀지 마."
누가 먼저랄 것 없는 선배들의 말에 카이스는 뭐 어떠냐는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 무뚝뚝한 얼굴이 묘하게 천진한 것처럼 보여 케빈과 오스카는 어이없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악의가 없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그 녀석과는 다르게 말이야."
귀걸이를 놓은 아시엘은 문득 손끝에서 찌릿 올라오는 통증에 인상을 썼다. 애써 아픔을 무시하고 그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반쯤 타다 남은 천에 싸인 약초 꾸러미를 내려다 보았다.
"어떻게든... 성공했네."
이런 미친 짓은 두번 다시 안 할테다. 아시엘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멀쩡한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쥐었다. 다시금 윽 소리가 날 정도의 아픔이 밀려 올라왔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에쉬리아와 제스퍼가 약초가 탈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 교묘히 장작을 쌓아 준 덕분에, 약초 쪽에는 불길이 세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혼날텐데."
아시엘은 새삼 왼손을 내려다 보았다. 하얗지만 군데 군데 굳은살이 박힌 작은 손은 약간의 그을음과 함께 화상으로 부어올라 있었다. 최대한 태연한 척 방으로 돌아오자 마자 찬물을 들이부어 식혔지만 그래도 아픔은 가실 줄을 몰랐다.
하아, 어째 늘어가는 한숨을 삼키며 아시엘은 꾸러미를 풀고 약초를 쌌던 천을 북 찢어 붕대처럼 손을 감쌌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스스로에게 물어도 답은 없었다. 아시엘은 쓴웃음을 삼키며 바닥에 흩어진 말린 약초들을 침대 아래로 밀어넣었다.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면목이 없습니다만 하루만 더 휴재하겠습니다ㅠㅜ
오티 다녀와서 운전학원 가고 회지 준비하고 수강신청 하느라 혼이 쏙 빠졌네요...ㅜㅡ 어떻게든 오늘 안에 업데이트 해 보려 했는데 아무래도 무리인것 같아서 죄송스럽지만 공지를 남깁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
죄송합니다!! 목요일에 풀로 분량 채워서 돌아오겠습니다!!! 언제나 기다려 주시는 독자님들 감사하고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