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88. 실마리(3)
아시엘은 젊은 청년의 곁에서 나뒹구는 꾸러미를 밀어놓고 열쇠가 꽂힌 문고리를 돌렸다. 잠금은 이미 풀려 문은 별 저항 없이 열렸다. 다시 한번 주변을 살펴 기절한 둘 외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잠겼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순간 훅 끼쳐오는 향에 눈살을 찌푸렸다.
"윽... 뭐야?"
콜록, 그는 마른 기침을 뱉고 앞을 확인했다. 불빛 없이 어두침침한 내부에 마치 창고처럼 나무 상자들이 질서 정연하게 쌓여 있었다. 넓이는 다른 방들과 비슷했지만 이곳의 벽은 회칠만 되어 있을 뿐, 천장까지 닿도록 모인 상자들과 또 따로 정리되어 있는 장작으로만 가득 차있었다.
가면 갈수록 영문을 모르겠네. 아시엘은 두리번거리며 안으로 깊숙히 들어갔다. 이상하게 건조한 공기와 미묘한 향이 어우러져 뇌를 쿡쿡 쑤시는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곧 천장에 박힌 마정석을 발견했다.
"건조 마법이 걸린 건가..."
마력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상황이지만 아시엘은 대충 짐작했다. 그렇다면 공기가 이렇게 매말라 있는 것도 이해는 갔다. 아시엘은 마정석에서 시선을 떼고 상자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 예상이 맞다면- 그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상자 위의 천을 살짝 들췄다.
아니나다를까, 바삭바삭하게 잘 말려진 약초들이 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서 건조시켜서 내다 파는 걸까. 아시엘은 고개를 갸웃하고 약초 한 조각을 집어 냄새를 킁킁 맡았다. 처음 느끼는 독특한 향이 코로 스며들었다.
"제대로 찾은것 같은데... 영락없는 도둑놈 꼴이긴 하지만."
도대체 누가 말했어, 기사는 명예와 주군을 지키는 신념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불사해야 한다고. 아시엘은 약초를 주머니에 쑤셔넣으며 투덜거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명예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역시 인생은 실전- 애초에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는 셀레니스와 아시엘이었기에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이지 고지식한 기사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적에게 사로잡힌 순간부터 자결을 결심했을지도 몰랐다.
아시엘은 다른 상자들의 천도 열어보고 별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조심스레 방에서 나갔다. 그런 그를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여전히 바닥에 쓰러져 있는 두 남자였다. 그가 그들의 면전에서 손을 휘휘 내저었지만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의 기척 역시 없었다. 아시엘은 안심하고 그들 곁에 주저앉아 청년이 옮기던 짐을 풀어헤쳤다.
"역시..."
건조되기 전이라 아직까지 파릇파릇한 약초들이 한가득 고개를 내밀었다. 아시엘은 약초들을 뒤적거려 가장 온전한 잎 몇 개를 챙겨 주머니에 잘 넣고 다시 꾸러미를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이제 남은 건-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한 두 사람. 이걸 어쩐다, 아시엘은 그들을 내려다보며 벽에 몸을 기댔다. 잠깐 생각에 빠져있던 그 때.
"일은 다 끝났나요?"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고운 목소리에, 온몸의 털이 오싹 곤두서는게 느껴졌다. 아시엘은 숨을 들이켰다. 왜 여기에?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통제를 잃은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떨렸다. 뒤늦게 들려오는 기척의 주인은 이제 코너만 돌면 아시엘과 바로 맞닥뜨릴 터였다. 곧바로 자신의 방을 향해 뛴다 해도 이미 늦었다. 어쩌지, 어쩌지, 아시엘은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라."
에쉬리아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의아한 소리를 냈다. 평소 믿을 만하다 판단해 일을 맡겨둔 두 남자가 창고의 문 앞에 쓰러져 있었다. 청년의 옆에는 아마도 약초가 들어 있을 보따리가 아무렇게나 뒹굴었다. 진한 립스틱이 발린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녀는 기절한 수하를 내버려 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열쇠가 꽂혀 있는 창고 문이었다.
"흐음."
그녀는 시선을 떼고 다시 주변을 둘러보며 감각을 조금 일깨웠다. 오묘한 빛의 눈동자가 녹색으로 반짝였다. 근처에는 당연히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눈꼬리가 고혹적으로 휘었다. 무언가를 찾아낸 듯했다.
"도둑고양이가 있나 보군요."
사락, 에쉬리아의 긴 드레스 자락이 끌렸다. 그녀는 널부러진 청년을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굽 높은 구두가 붉은 카펫을 밟았다. 그렇게 그녀가 다시 멈추어 선 곳은 창고 바로 옆의 객실 앞이었다. 잠깐 문고리를 만지작대던 에쉬리아는 서슴없이 문을 활짝 밀어젖혔다.
콰앙! 거칠게 열린 문이 반대편의 벽과 세게 부딪히며 파열음을 냈지만 그녀는 신경쓰지 않았다. 불 꺼진 고급스러운 방은 별다를 것 없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였다. 아름다운 카펫과 화려한 샹들리에, 사치스러운 가구. 그녀가 꾸며놓은 그대로였다. 에쉬리아는 망설이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천천히 여유롭게, 마치 한 마리의 여우처럼.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아시엘은 몸을 바닥에 더더욱 밀착시켰다. 혹시 숨소리라도 들릴 새라 입까지 틀어막은 채였다. 체구가 작은 게 이토록 다행인 적은 없었다. 카이스 정도의 덩치만 되도 침대 아래에 숨는 짓은 하지 못할 테니까. 아시엘은 두려움 섞인 눈으로 손을 뻗으면 바로 잡힐 거리까지 다가온 에쉬리아의 발목을 노려보았다.
멍청이, 어째서 기척도 느끼지 못한 거야. 호흡이 점점 더 가빠졌다. 시야에서 에쉬리아의 다리가 사라졌지만 그녀의 움직임은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직 방 안에 있어. 마치 구석에 몰린 사냥감이 된 기분이었다. 얼굴도 몸짓도 전혀 볼 수 없었지만 아시엘은 쉽게 알아차렸다. 에쉬리아는 지금 즐기고 있는 거라고.
"흡..."
그녀의 드레스 자락이 끌리는 소리 때문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머릿속은 끝없이 물음표로 가득 찼다. 어째서 다가오는 낌새조차 놓치고 있었을까. 약초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고 해도 청각은 평소보다 열어 둔 상태였다. 사람이라면 아무리 노력해도 그의 예리한 감각은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가 바로 가까이까지 접근했음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쿵. 쿵. 쿵. 쿵. 제발, 들키지 마라. 기도하는 심정으로 미친듯이 뛰는 심장을 달래려 애쓰며 아시엘은 숨을 죽였다.
에쉬리아는 방을 한 바퀴 천천히 걸었다. 마치 산책하는 것 마냥 느긋하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예리한 감각에 걸리는 묘한 향기를. 노래하듯 작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고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당돌한 꼬마는 싫지 않아요. 하지만-"
이윽고 그녀가 발걸음을 딱 멈춘 것은, 한 소년이 납작 엎드려 있는 침대의 앞이었다. 좁은 틈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발목에 아시엘은 숨을 들이켰다.
"과한 장난은 삼가해 주세요."
말을 끝마친 에쉬리아는 웃음기가 깃든 눈으로 침대 아래쪽을 눈여겨보고는 빙글 몸을 돌려 방을 나가버렸다. 쾅! 다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아시엘의 귀를 때렸지만 그는 좀처럼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알고 있었어. 에쉬리아는 그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은 물론 위치까지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아시엘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까슬한 카펫의 털이 손가락에 감겨들었다. 차갑게 식은 땀이 이마에서 주륵 흘러내렸다. 침대와 바닥의 어두운 틈 사이에서 아시엘은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도 없던 그는 곧 픽 웃음을 터뜨렸다.
"어째도 당신 손바닥 안이란 말이지? 웃기시네."
곧 손바닥 채로 작살내 주지. 아시엘은 이를 까득 악물었다. 말아쥔 그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 파르르 떨렸다.
"여기야?"
케빈은 제복을 가린 망토를 추스렸다. 성문을 몰래 빠져나와 2시간여를 걸은 후 그들은 옆 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기사 셋을 안내해 온 센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후카덴 백작령이랑 여기가 제일 가까워요. 셰단 후작의 영지인데, 상업이 꽤 발달해 있어서 여러 상단이 상주하고 있어요."
"우리가 몰래 숨어들기는 최적이네."
오스카의 말에 카이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한 후카덴 영지와는 반대로, 이곳은 외곽을 벗어나자 마자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중심부로 갈수록 장사치들이 늘어가며 마치 시장통을 연상케 했다. 하지만 많은 것은 상인들만이 아니었다. 케빈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치안 문제 때문이야? 왜 이렇게 군사가 많이 돌아다녀."
"상단이 많아서 그런 걸까요."
카이스도 조용히 맞장구를 쳤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무장한 병사들이 드물지 않게 보였다. 센 역시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게요. 무슨 일이 생겼나?"
"뭐... 일단 물어나 볼까."
그들이 잡을 새도 없이 케빈이 사람들을 헤치고 한 병사를 향해 거침없이 다가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어이, 형씨. 우리 여행잔데 말이야, 영지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 왜 이렇게 병사가 깔렸어?"
"어? 소식 못 들었어? 여기 영주님이 어제부터 사병을 더 모으기 시작했어. 영지전을 준비하고 계신다나 뭐래나."
"뭐라고?"
케빈이 황당하게 되묻자 그는 들고 있던 종이를 디밀었다. 케빈은 재빨리 그것을 낚아채 읽었다. 병사 모집 중. 높은 급료 보장. 위험수당 있음. 사망시 유족들에게 유공자 자격으로 포상.
"...... 영지전 상대는?"
"모르지. 우리 후작님이야 워낙에 욕심이 많으신데다 속꿍꿍이를 알 수가 없거든. 그래도 대충 예상하자면- 후카덴 백작령이 아닐까."
"뭐?"
케빈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그들이 모르는 곳에서도 이미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커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