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82. 움직이다(4)
"사제님! 나오셨습니까!"
"사제님, 언제쯤 다시 뵐까 하고 있었습니다!"
세이라와 함께 아시엘이 집회장에 들어서자 마자 숱한 환영들이 쏟아졌다.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둘라쌓인 아시엘은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역시! 전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감히 저희같은 것들이 성인을 몰라뵈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외모에 불꽃같은 눈동자라니- 이런 분께 침입자라니!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신도들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이는 눈들을 하고 아시엘에게 선망의 시선을 퍼부었다. 집에 가고싶어. 진짜로 집에 가고 싶어. 황자님 보고싶어. 아시엘은 어색하게 미소지으며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중얼거렸다.
10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이미 홀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전날과 비슷한 인원의 사람들이 저마다 자리를 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달려드는 신도들을 겨우 뿌리친 아시엘은 세이라와 함께 계단식으로 된 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들 오해가 풀렸나봐요! 오빠가 나쁜 사람이 아닌걸 알아줬어요."
"하하... 그러게."
대신에 더 성가신 다른 오해가 쌓였지만. 아시엘은 대충 웃어넘기고 주변을 살폈다. 지하였지만 천장에 달린 화려하고 커다란 샹들리에가 내부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환풍 시설도 있는 모양인지 사람들이 이만큼 모여 있어도 갑갑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바닥에는 고급스러운 카펫, 벽자제 역시 꽤 좋아 보이는 것이었다. 좌석은 차가운 나무였지만 이마저도 말끔하게 마감 처리가 되어 있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서인지 난간으로 빙 둘러싸인 2층도 있었다. 그리고 그 역시 당연하게도 사람들로 가득가득 찼다. 도대체 돈을 얼마나 퍼부은 건지. 아시엘은 속으로 툴툴거렸다. 제스퍼가 서서 설교를 하던 단상 옆에는 거대한 화로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아무래도 신상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 같았다. 못마땅하게 볼을 긁적이고 있는데 아시엘의 예민한 귀에 조금 떨어진 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대화소리가 잡혔다.
"히스 님이 체포되셨다고?"
"그래요. 그 유령 사건을 일으켰다고 하고 셀레니스 기사단이 잡아갔어요."
"......."
아시엘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체포됐다고? 그가 기억하는 바로는 비밀리에 창고에 가둬둔 게 끝이었다. 공개적으로 잡혀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들린다면- 바깥의 셋이 움직인 게 틀림 없었다. 군데군데 따로 모인 사람들의 대화 주제는 거의 다 비슷한듯 했다. 아시엘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두 여성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정말? 히스 사제님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 그리고 유령은 신의 벌이라고 제스퍼 님이 말씀하셨고."
"그게 히스 님이 속임수를 썼다고 해요. 증거도 있다고 하는데..."
여자는 말꼬리를 흐렸다. 아예 공개적으로 체포해버린 건가, 아시엘은 턱을 톡톡 두드리며 고민에 빠졌다. 아무 생각 없이 그럴 리는 없을 테니. 그때 그녀가 말을 이었다.
"오늘 그래서 성에서 만찬을 열었다고 해요. 유령 소동을 잠재워준 감사의 의미로."
"영주님이 참 지혜로우신 분이었는데... 어쩌다 이단이 되셨는지. 백작 부인이 설득하려 해도 잘 안되나 봐."
이단, 이라는 단어에 아시엘의 미간이 꿈틀했다. 그는 세이라에게 짧게 양해를 구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두 여인에게 다가갔다.
"저기, 끼어들어서 죄송한데요. 재미있는 이야기 같아서요."
"아...!"
두 여자는 눈을 크게 뜨고 뒤로 후다닥 물러섰다. 아시엘이 헤실 웃으며 살짝 손을 흔들어 보이자 그녀들은 입을 커다랗게 벌렸다.
"어머나, 사제님! 나오셨군요!"
"이렇게 가까이에서 뵙게 되다니... 영광이에요! 어제는 정말-"
"아니, 아니에요. 그것보다 아까 하시던 이야기나 자세히 들려 주시겠어요?"
서론이 길어질것 같은 분위기에 아시엘은 재빨리 손을 내저어 그녀의 이야기를 막았다. 그들은 의아하게 시선을 교환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라면 셀레니스 기사단 말씀이신가요?"
"네, 뭐. 이것저것. 저도 히스 님이랑 약간 친분이 있어서요. 그 분이 체포되셨다는 게 사실이에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시엘이 늘어놓는 말에 두 여성은 심각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다고 하더라구요."
"뭔가 착오가 있을 거라고 믿지만... 그게 아니라면 영주님이 아예 맛이 가버린거죠."
역시 교단 사람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은 영주에 대한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한 모양이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쓴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시엘은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방금 한 발언에 대한 망설임 따윈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성자로 인식된 자신에 대한 신뢰도 아마 올랐을 터였다. 아시엘은 살짝 그녀들을 떠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나 신을 모독하는 자는 있는 법이니까요. 히스 님이 정말로 잘못을 저질렀을 가능성도 있죠."
"음.... 확실히 그렇긴 하죠. 하지만 제스퍼 님이 유령 소동은 이그니스 님을 믿지 않는 영주님에 대한 벌이라고 하셨고... 그렇다면 히스 님이 속임수를 썼을 리 없는데... 그렇죠?"
"네."
한쪽 여자가 동의를 구하자 나머지 역시 수긍했다. 이 정도인가. 아시엘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렇죠... 그럼 셀레니스 기사단은 어쩐대요?"
"그 사람들은 영주님이 만찬을 베푸셨대요. 그리고 오늘 밤에 돌아간다고 했어요."
"흐음- 그렇구나. 한 일도 없으면서 만찬이라니, 참 뻔뻔하다. 그렇지 않아요?"
아시엘이 밝게 웃으면서 가볍게 던진 말에 그녀들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소년의 말 속에 뼈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 리가 없었다. 그녀들이 다시 떠드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그는 머리를 굴렸다. 만찬도 그렇고 철수한다는 이야기도 무슨 의도인지 대충 파악했다. 나중에 연락을 해보면 확실해 지겠지만. 그때, 단상 쪽에서 콰앙! 하는 충격음이 터져나왔다. 아시엘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전날과 똑같은 휘양찬란한 천을 감은 제스퍼가 눈을 사납게 치뜨고 있었다.
"잡담은 그만! 이제 그만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아....!"
대화를 하던 두 여성은 물론이고 여기저기에 뭉쳐 웅성대던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흩어져 각자 자리에 앉았다. 잠깐 제스퍼를 가라앉은 눈으로 응시하던 아시엘 역시 몸을 팩 돌려 세이라의 곁으로 돌아갔다.
"오늘도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시네요."
"그러게."
좋을 리가 없었다. 사람들이 히스와 셀레니스에 대해 떠들고 있을 정도면 제스퍼 역시 그 정보를 알고 있을 터였다. 같이 일을 꾸미는 사람 중 하나인 히스가 공개적으로 체포되고 그에 따라 '유령 소동은 신의 벌' 이라는 주장이 위태롭게 되었다. 누군가가 진지하게 의심을 품는다면 당장에 교단의 사기극이 들통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시엘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제스퍼의 날이 선 눈초리가 자신을 향하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노려봐서 뭘 어쩌려고. 아시엘은 턱을 괴고 시선을 돌려버렸다. 아무리 봐도 제스퍼는 이 정도로 큰 일을 주도적으로 벌일 만큼 그릇이 큰 인물은 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진짜 거물은 지금 자리를 비운 교주라는 여자일 터였다.
탁, 탁, 화르륵! 마른 장작이 가득 들어간 화로 위에 남자 신도 하나가 부싯돌을 몇 번 맞부딪히자 금세 불꽃이 일었다. 탄성을 터뜨린 신도들은 곧장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후 눈을 감았다. 아시엘 역시 세이라를 따라 고개를 숙이고 살짝 실눈을 떴다. 괴이하게 생긴 지팡이를 땅에 쾅, 짚은 제스퍼가 크게 말했다.
"믿는 자는 보답을 받으리라. 우리는 충실한 불의 종, 이그니스 님의 백성이다."
"믿는 자는 보답을 받으리라. 우리는 충실한 불의 종, 이그니스 님의 백성이다."
신도들은 경건하게 그 구절을 따라 읊었다. 아시엘은 헛웃음을 삼켰다. 보답을 받는다니- 이 정도로 보답받지 못할 신앙은 아마 이 제국, 아니 세상에 둘도 없을 텐데. 좋은 일에 쓰라며 바친 헌금은 고스란히 교주와 부교주의 주머니에 들어가고 그 믿음은 받을 이 없이 허공으로 흩어질 터였다.
진실을 깨달은 후의 주민들은, 자신들이 단지 속았을 뿐이라는 것을 안 후의 사람들의 분노는 어디로 향할까. 아시엘은 도리질을 쳐 잡념을 떨쳐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