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81. 움직이다(3)
대충 예상했던 대로, 저녁 시간이 되자 세이라가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 방 한 구석에 처박혀 있던 책을 뒤적이던 아시엘은 그녀가 들어오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아, 세이라. 왔어?"
"네- 두통은 좀 괜찮아요?"
그에게 종종걸음으로 다가가던 세이라는 테이블 위에 그대로 남은 점심 식사를 발견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것을 알아챈 아시엘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책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니나다를까, 곧 세이라의 사나운 잔소리가 날아들었다.
"오빠! 아까 알아서 먹는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하나도 안 줄어 있어요!"
"입맛이 없어서..."
아시엘이 변명처럼 중얼거리자 그녀는 볼을 부풀리고 그를 집요하게 쏘아보았다. 그 시선에 못 이겨 결국 고개를 든 아시엘은 애써 그녀를 달랬다.
"한 끼 정도 먹지 않는다고 사람이 어떻게 되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정말 배가 안 고파서 그랬어. 이젠 안 그럴게."
"...정말이죠?"
"응."
아시엘이 단단히 약속하고 나서야 세이라는 조금 마음이 놓인듯 얼굴을 풀었다. 솔직히 그 말을 지킬지는 아시엘로사도 자신할 수 없었지만. 식사는 충분히 먹음직스러웠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그 안에 요리 재료 이외의 것이 들어가지 않았다고는 절대로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속으로 꿀꺽 삼킨 아시엘은 화제를 돌렸다.
"세이라, 저녁 집회는 언제부터야?"
"밤 10시에 영지 사람들이 다 모이면 시작해요. 오늘도 부교주 님이 대신 설교하신대요."
"교주님은 언제 돌아오신대? 혹시 알아?"
"음-"
세이라는 기억을 더듬는듯 눈을 깜빡거렸다.
"아마 이번 주 내로 오실 텐데...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자리를 비우실 때는 아무 말씀도 안 해주셔서."
"그래...? 아, 그런데 집회에는 영지 사람들이 전부 다 와?"
"거의요. 밤에 성문을 지켜야 하는 병사 아저씨들 말고는 잘 안 빠져요. 이번에 유령이 나타나면서 더 그렇게 됐어요."
유령 소동의 목적은 그거였나. 아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령이 돌아다닌다는 소문에 사람들이 불안해지면 그걸 이용해서 신도들을 더욱 결속시킨다. 꽤 효과가 좋은 방법이었다. 집회에도 꼬박꼬박 참석을 하도록 만들면 교단의 영향력도 꽤 커질 터였다. 누군지는 몰라도 참 영악한 발상이었다. 아시엘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세이라, 오늘부터 나도 저녁 집회에 참석해도 될까? 어젠 내 실수 때문에 미사가 엉망이 되버렸으니까 사과도 할 겸 해서."
"네?"
갑작스러운 그의 말이 제대로 머릿속에 들어가지 않은듯 세이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잠시 후, 그녀는 커다란 함박웃음을 지었다.
"당연하죠! 제스퍼 님도 기뻐하실 거에요!"
"그러면 좋겠는데."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말이야. 아시엘은 뒷말은 꿀꺽 삼키고 마주 미소 지어 주었다. 애 데리고 못할 짓 한다는 찜찜한 감각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으니까. 부디 바깥의 일행도 잘 움직여 주길 바라며 아시엘은 그렇게 다음 행보를 결정했다.
완전히 해가 저물고 난 시간. 백작의 성에서는 조촐한 만찬회가 시작되었다. 주빈은 셀레니스 기사단의 네 사람이었고 백작부인과 백작 그리고 백작을 도와 영지를 꾸려가는 관리 몇 명이 참석했다.
"바쁜 와중에도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조촐하나마 즐겨주시면 좋겠습니다."
백작이 와인글라스를 들고 하는 인삿말을 흘려들으며 케빈은 옆에 앉은 센을 힐끗 바라보았다. 엉성하게나마 맞는 아시엘의 제복을 입은 소년은 꼭 쥔 주먹을 무릎 위에 올린 채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부상을 핑계로 얼굴을 붕대로 가렸지만케빈은 그 속의 표정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이봐, 괜찮으니까 긴장 풀어."
"네, 네!"
보다 못한 오스카가 귓가에 대고 속삭이자 센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이미 단단히 얼어붙어버린 근육은 다시 펴지지 않았다. 이러면 안 되는거 아냐, 일단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센은 도무지 몸에서 힘을 뺄 수가 없었다. 으아아, 어떻게 해! 그는 반쯤 패닉 상태에 빠져버렸다.
황성에 비해서는 소박하기 그지없었지만 센의 눈에는 모든게 다 휘양찬란해 보였다. 생전 처음 보는 샹들리에와 깔끔한 카펫, 꽤 고급스러운 식기들과 이걸 먹어도 되나 싶은 요리들과 시중을 들어주는 하인들. 거기다 귀족과의 동석. 평소에는 누가 행차라도 했다면 허리를 90도로 숙이기 바빴던 그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이 상황을 예상해야 했는데- 오스카는 이마를 짚었다. 소심한 평민 꼬마가 이런 자리에 오면 과하게 긴장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제발 수상하게 보이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때 맞은편에서 식사를 하던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유령 소동의 범인이 히스 씨였다니. 그와 꽤 가까이 지내던 저로서는 꽤 충격이군요. 도대체 뭐 때문에 그런 일을 했다고 합니까?"
"아-"
그는 잽싸게 케빈과 시선을 교환하고 태연하게 미소지으며 대꾸했다.
"단순한 장난이었다고 합니다. 최근에 힘든 일이 있었다고 했으니 아마 스트레스 해소가 아니었을까요."
"그렇습니까... 그나저나 실례가 안 된다면 저 분의 얼굴은 어떻게 된 일인지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에, 네?"
자신에게 화살이 날아들자 센은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무릎 위에 놓인 그의 손등이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쯧, 짧게 혀를 찬 케빈은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이 녀석이 조심성 없게 길바닥에서 엎어졌지 뭐야? 덕분에 얼굴이 엉망진창이 되버렸죠."
"아, 예..."
다행스럽게도 그는 순순히 납득했다. 케빈과 오스카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리고 오스카의 옆에 앉아서 혼자 묵묵히 식사만 하는 카이스에게 사나운 시선을 보냈다. 선배들이 애를 태우든 말든 그는 관계 없다는듯 초연하게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포기한 오스카는 고개를 내젓고 홀을 둘러보았다. 겉보기엔 큰 문제는 보이지 않았다. 상석은 백작과 백작 부인이 자리를 잡았고 긴 테이블의 오른쪽은 셀레니스가, 그 맞은편에 초대된 손님들이 앉아 있었다. 깨끗하게 옷을 차려입은 하인들은 베스토의 지휘 아래에 요리들을 나르고 시중을 들며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니까 여기에 있는 사람들 전원이 교단의 편이란 말이지. 하지만 딱히 이상하게 보이는 이는 없었다. 제일 수상한 사람은 옆에서 덜덜 떨고 있는 센이었고. 그는 포크로 스테이크를 찍으며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피다 불안한 기색의 백작과 눈이 마주쳤다. 평생을 바쳐 위해온 영지민들에게 배신당하고 옆의 부인조차 믿을 수 없다니 안쓰러운 노릇이었다.
"오스카 경이라고 하셨던가요?"
"네? 아, 아아 네."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오스카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의 바로 앞에 앉은 사람이-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말을 이었다.
"저희 영지 일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군요. 히스 님을 체포하신 게 경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닙니다. 이것이 황제 폐하의 의지이자 저희 일이니까요."
폐하는 무슨. 케빈이 작게 투덜거리는 소리에 백번 공감하며 오스카는 뿌듯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남자는 그러십니까, 하고 애매하게 답했다.
"그런데... 정말 히스 님이 범인이 맞는 겁니까? 오스카 님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착오가 있는게 아닌가 싶어서요."
"아아- 선생님의 기분은 이해하지만 확실합니다. 현장에서 검거했고 증거품도 있으니까요."
오스카의 대답에도 그는 만족하지 못한듯 음, 하는 소리를 냈다. 대놓고 따지지는 않았지만 역시 영지민들은 히스의 범행을 믿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케빈과 카이스의 얼굴도 조금 굳어졌다. 그때, 백작의 곁에 조용히 앉아 있던 부인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 분은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저 역시도 쉽게 믿지는 못하겠어요."
"부인!"
"하지만 그 분은 주위 어려운 사람들도 많이 도와주시고... 선행을 많이 하시는 분이란 말이에요."
백작이 눈치를 줬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난감해진 오스카는 케빈과 카이스에게 구원해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마음같아선 당신이 철썩같이 믿는 교단도 사기꾼 집단입니다, 하고 쏘아붙여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카이스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포크를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원래 사람 속은 아무도 모르니까요. 어떤 사람이 착한 일을 많이 하고 다닌대도 사실은 뒤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은 단면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흠! 부인! 우리 영지를 위해서 달려와 주신 분들께 실례요. 그만하세요."
보다 못한 백작이 핀잔을 주자 그녀는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기사들은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아무래도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