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76. 불의 지배자(3)
루이카엔과의 통신이 막 끝났을 때, 똑똑 하고 두어번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세이라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빠, 잘 잤어요? 어제 돌아오니까 자고 있길래 그냥 갔어요."
"아, 응..."
그녀는 전날과 변함없이 밝은 얼굴로 사뿐사뿐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은 아시엘에게 가지고 온 쟁반을 내밀었다. 따끈따끈 김이 오르는 스프와 빵, 익힌 고기같은 간단한 식사였다. 음식 냄새가 코에 들어오자 아시엘은 속이 거북해졌다.
"미안. 별로 먹고싶지 않은데."
"안 돼요! 벌써 점심때라구요. 식사는 제대로 챙겨야죠."
세이라는 억지로 그에게 식사를 디밀었다. 별 수 없이 받아 무릎 위에 올려놓았지만 아시엘은 도무지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속만 더 불편해지는 기분이었다. 아시엘이 난처한 것을 보듯 음식을 노려보자 세이라는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요? 아까부터 안색이 안 좋은데. 괜찮아요?"
"괜찮아. 근데 입맛이 없네. 그러니까 이건 좀 있다가 먹을게."
안 괜찮다, 란 말이 목끝까지 치솟았지만 아시엘은 미소지으며 달래듯 말하고 접시를 테이블 위로 밀어놓았다. 불만스럽게 입술을 비죽 내민 세이라는 미심쩍게 물었다.
"곧 식어버릴 텐데요?"
"난 마법사야. 식은 음식 정도는 금방 따뜻하게 할 수 있어."
그녀는 대충은 납득한듯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엘은 미소를 띄우고 세이라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신경 써주는 것은 고마웠지만 역시 감시당한다는 느낌이 떨쳐내 지지가 않았다. 세이라에게 자각은 없을 테지만서도.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천진하게 눈을 반짝이는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강아지처럼 아시엘을 멀뚱멀뚱 마주보던 세이라가 입을 열었다.
"오빠는 정말 신님의 사제에요? 그런데 왜 제스퍼 님이 화가 나신 거에요?"
"제스퍼 님?"
"그, 새벽에 기도를 주관하시던 분이요. 평소에는 에쉬리아 님이 제단에서 설교를 하시는데 자리를 비우셨대요. 그래서 제스퍼 님이 대신 하신 거에요."
"흐음... 그랬구나."
아시엘은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히스가 말했던 것도 같았다. 교주는 여자이고 그녀가 거의 모든 일을 처리한다고.
"에쉬리아 님은 어떤 분이야?"
"음... 엄청 예뻐요. 솔직히 제스퍼 님은 전혀 잘생기지 않았는데 교주님은 굉장히 아름다워요. 아시엘 오빠도 엄청엄청 예쁘지만 조금 달라요."
조금 울적해졌지만 아시엘은 얌전히 세이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음... 솔직히 조금 어려워요. 무섭기도 하고."
"왜?"
"사람들을 무섭게 혼내는 건 제스퍼 님인데 이상하게 제스퍼 님보다 에쉬리아 님이 더 무서워요. 화도 잘 안 내시는데. 그것보다 오빠, 제가 먼저 물었잖아요?"
은근슬쩍 넘어가려 한 것을 눈치챘는지 세이라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아시엘은 쳇 짧게 혀를 차고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글쎄. 네 생각엔 어때? 내가 진짜 신을 믿는것같아?"
"처음에는 아니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생각해요! 신의 제단 앞에서 말했잖아요. 이그니스 님이 보시는데 거짓말하면 벌 받으니까 거짓말일 리가 없어요."
"으음..."
그렇게 말하는 세이라의 얼굴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차마 정면으로 반박할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어이가 없어져 아시엘은 힘빠진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만약에 신의 벌 같은걸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으으음...."
이번에는 어려운 질문이었는지 세이라는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데굴 굴렸다. 아시엘은 차분하게 기다렸다. 잠시 후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인간인데, 신에게 거역할 수 있어요? 하지만 오빠는 커다란 불덩어리를 만들어 냈잖아요. 밖에서 사람들도 이야기하고 있어요. 오빠가 기적을 가지고 온 신의 사자라고. 근데 제스퍼 님은 화가 났고... 음..."
"하하..."
그야 사기꾼 앞에서 사기를 쳤으니까 화가 났겠지, 하고 모순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꼬마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을 아시엘은 웃음으로 대충 얼버무렸다.
"그런데 그 사람이 화를 냈어? 네 앞에서?"
"아뇨. 그런데 아까 오빠 검을 가져다 달라고 하셔서 갔을때 엄청엄청 화난 얼굴이었어요. 말씀도 퉁명스럽게 하시고."
그의 표정을 따라하는듯 세이라는 작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썹을 치켜올려 보였다. 아시엘은 다시 묘한 기분에 떨떠름한 미소를 띄워야만 했다. 검을 가져갔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면서 세이라는 뭐가 잘못됐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아시엘은 도리질을 쳐 잡생각을 털어내고 다시 물었다.
"그럼 그 사람은 어디에 있는데?"
"지하 3층이요! 전 거기까지 들어갈 수 있어요. 가끔 심부름하러 가요."
"넌 들어갈 수 있다는건 다른 사람은 못 들어가?"
"네. 저만 갈 수 있어요!"
세이라는 뿌듯한 얼굴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두고 아시엘은 다시 고민에 빠져들었다. 출입을 제한한다면 나름의 기준이 있을 텐데. 지금까지의 대화를 봐서 세이라의 신앙이 절대적이라고 해도 절대로 입이 무거운 편은 아니었다.
"어째서 너만 갈 수 있는거야?"
"꼭 저만이라고 할 순 없어요. 가끔 히스 님도 허락 받고 들어가시거든요! 그런데 어제 집회에는 어째선지 안 오셨더라구요. 따로 무슨 일을 하신다고 언제나 집회 마무리 쯤에 들어오시는데. 어젠 오빠때문에 엉망진창이 되서 못 본건가?"
"아... 하하하. 그럼 세이라는 그 두 사람 방에 언제든지 드나들 수 있는거야?"
아시엘은 애써 말머리를 돌렸다. 다행히 세이라는 히스의 부재에 대해서 더 이야기하지 않고 순순히 대답했다.
"아뇨. 저도 허락이 있어야 가능해요. 2층 안쪽의 창고는 들어갈 수 없고... 근데 왜 이런 걸 물어요?"
"그냥 재미있어서."
속으로 뜨끔했지만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는지 세이라는 토라진듯 부- 볼을 부풀리고 아시엘의 옆에 털썩 주저앉아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있잖아요, 오빠는 나쁜 사람이에요?"
"어?"
아시엘은 당황해 저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어린아이다운 순수함이 배여있는 소녀의 말간 눈동자는 생각보다 마주보기 어려웠다. 아마 그 스스로도 그녀에게 못 할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일 터였다. 세이라는 팩 고개를 도로 돌려버리고 말을 이었다.
"그치만- 오빠는 계속 이상한 걸 묻고 있잖아요. 내 말엔 제대로 대답도 안 해주면서. 그리고 부교주 제스퍼 님이 그랬어요. 셀레니스 기사단은 신을 믿지 않는 못된 집단이라고. 영지에 와 있는데 절대로 아는 척 하지 말라고 했어요. 나갈 때까지. 근데 오빠들은 날 도와줬잖아요? 그것도 분명 신의 이끌림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제스퍼 님 말씀이 틀릴 리는 없고. 모르겠어요."
"음... 어렵네."
아시엘은 뒷통수를 벅벅 긁었다. 그녀의 말에서 '신' 의 존재만 들어낸다면 의문들이 조금이나마 풀릴 텐데. 짧게 한숨을 내쉰 그는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시엘은 세이라의 불안해 보이는 얼굴을 힐끗 곁눈질로 보고 곧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난 좋은 사람은 아냐. 세이라의 말대로라면 나쁜 사람이겠지. 거짓말을 했으니까."
"하지만..."
세이라는 납득하지 못한듯 웅얼거렸다. 잠깐 머리를 굴리며 턱을 쓰다듬던 아시엘은 말을 이었다.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을 정하는 건 따로 잣대가 있는 게 아냐.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내세운 잣대에 모든 걸 맞추다 보면 큰 실수를 하게 될수도 있어. 어쩌면 그 기준을 정한 사람이 틀렸을지도 모르잖아?"
"음..."
어려웠는지 세이라는 신음을 흘렸다. 아시엘은 킥킥 소리를 냈다.
"있잖아, 혹시 그 제스퍼 님한테 내가 셀레니스의 기사라는 거 말했어?"
"아뇨. 제스퍼 님이 너무 무서운 얼굴로 셀레니스는 나쁜 집단이라고 하셔서 말 못했어요."
세이라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녀는 이그니스 교가 설립된 이후 최초로 그 집단의 모순됨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는 것일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아시엘은 세이라의 머리에 손을 턱 올려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그거면 된거야. 부탁이 있는데, 당분간은 그거 교주님이나 다른 사람들한테도 말하지 말아 줄래?"
"네? 왜요?"
"그럼 이 오빠가 좀 곤란해지거든."
그가 정말로 난처하다는듯 눈썹을 휘자 세이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천진한 모습에 아시엘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한가지 걱정은 일단 던 셈이었지만 가슴 속 한켠이 묵직해지는 것은 그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