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83화 (183/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72. 의외의 전개(3)

누군가가 자신의 팔을 거칠게 낚아채는 느낌에 아시엘은 간신히 지금 상황을 자각했다. 그는 서둘러 자신을 붙잡은 이를 떨쳐냈지만 곧 또 다른 사람이 그의 옷깃을 잡고 늘어졌다.

"잡아라! 잡아서 족쳐라!"

이미 몇 대 얻어맞은 몸이 욱씬거려 왔고 두서 없는 함성 때문에 머리가 왕왕 울렸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이거 위험한데,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거짓말 쏙 빼고라도 상황이 굉장히 안 좋았다. 그렇다고 민간인들을 상대로 마법을 시전하거나 검을 빼들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이 무법지를 탈출할까 그가 초조하게 궁리하고 있는 도중, 빠악! 어디선가 날아온 주먹이 후드를 뒤집어 쓴 아시엘의 얼굴을 세게 후려쳤다.

"큭!"

눈앞에 불이 번쩍했다. 결국 아시엘이 신음을 흘리며 쓰러지자 신도들이 기다렸다는듯 일제히 달려들었다.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후드를 왈칵 벗겨내고 머리채를 억세게 움켜쥐었다. 빌어먹을, 아프잖아! 그가 속으로 욕설을 내뱉고 있는데 뜻밖의 곳에서 구원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잠깐, 잠깐만요!"

갑자기 한 소녀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에 신도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아시엘 역시 어디에선가 들어본 음성이었다. 아시엘은 온 몸이 쑤시는 것을 무시하려 애쓰며 사람들 사이로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그리고, 얼빠진 소리가 그의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세이라?"

파란색 원피스를 입은 예쁘장한 소녀, 세이라가 이쪽으로 황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이때까지 자리에 앉아서 상황을 지켜보다 침입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리고 저도 모르게 끼어든 것이었다.

"세이라, 왜 그래? 무슨 문제 있어?"

"잠깐만 비켜주세요. 잠깐만..."

그녀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아시엘에게 다가왔다. 아시엘은 멍하니 세이라를 바라보았다.

"세이라...."

"아시엘 오빠, 괜찮아요?"

그녀는 그의 곁에 꿇어앉아 걱정스럽게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아시엘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세이라는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아직까지도 불의 제단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남자가 험악하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설마 한 패는 아니겠지?"

"아니에요!"

세이라가 단호하게 외치자 사람들의 눈이 의외라는듯 휘둥그렇게 변했다. 그녀는 발딱 작은 몸을 일으켜 얼이 빠진 채 주저앉아 있는 아시엘의 앞을 방어하듯 두 팔을 벌리고 섰다.

"이 사람은 이그니스 님의 사랑을 받는 분이에요! 제가 죽을 뻔 했을때 오빠가 이그니스 님의 힘으로 절 구해주신 거라구요!"

"뭐? 그게 정말이야?"

무슨 말을 하는거야! 아시엘이 소리 없이 기겁했지만 그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진 신도들의 눈이 다시 아시엘에게로 향했다.

분위기가 어색하게 가라앉고, 어이없이 돌아가는 상황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지팡이의 남자, 눈치를 보는 일반 신도들, 그리과 아시엘과 믿음에 찬 세이라 사이에 이상한 대치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제단 옆의 남자였다.

"신의 노여움을 받고 싶은 건가! 어디서 거짓말을! 이 곳은 이그니스 님의 신전이다! 세이라, 넌 마귀에게 홀린 것이다! 내가 모르는 사도가 있을 리 없다!"

"......."

하아. 아시엘은 깊은 곳에서부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신님이든 진짜로 나 미워하는 거면 좀 봐주세요, 믿지도 않는 신에게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그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평소 행실에서부터 문제가 있으니까 별 수 없나. 그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세우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은 아시엘이라고 합니다. 조금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저는 침입자 같은게 아니에요."

"그러면?"

지팡이를 든 남자의 눈꼬리가 위로 치솟았다. 눈을 살짝 감고 마음을 단단히 먹은 그는 곧 뻔뻔한 얼굴로 남자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이그니스 교를 이끄는 여러분의 이야기를 듣고 타지에서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 저는 신의 사제, 불의 사제입니다."

웅성웅성. 이제 진짜로 동요한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세이라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이를 으득 악문 남자는 긴 옷자락을 휘두르며 지팡이로 바닥을 타앙! 때렸다. 그러자 사위가 다시 조용해졌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모두들 저 꼬맹이 마귀의 말은 듣지 마라!"

"헛소리인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 알죠."

아시엘은 세이라를 뒤로 물리고 앞으로 나섰다.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이 자꾸만 비져나왔다.

렌은 불 계열 마법을 쓰지 말라고 했지만 이미 그렇게 해 버렸고. 애초에 세이라에게 사제라고 오해받지 않았다면 이런 상황까지는 오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등 뒤를 좀 더 조심했다면 이 꼴은 되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선배들과 카이스는 도망쳤고 아시엘은 혼자 이 막장의 상황에 놓여버렸다. 하하하... 나도 이제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었다. 아시엘은 홀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시동어를 외쳤다.

"이그니스 렌 테이란 아만. 파이어 볼!"

허공에 붉은빛 마법진이 떠올랐다 사라지고 그 위에 새빨간 불꽃이 서서히 응집되기 시작했다. 마치 눈덩이가 커지는 것처럼 소용돌이치며 서서히 몸집을 키우던 불덩어리가 마침내 머리 위에서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2서클의 기본 마법이었지만 4서클 수준에 육박하는 양의 마력을 퍼부어 구현해 낸 불의 구였다.

신도들은 경악했다. 제단의 남자 역시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표정을 수습하지 못했다. 아시엘은 의기양양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갑자기 많은 양의 마력이 빠져나가 속이 뒤집어지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아아- 렌 씨. 기껏 충고해 줬는데. 아시엘은 실소했다. 결국은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해 이렇게 제 발로 곤경 안에 기어들어가는 꼴이 되버렸다.

"불이다...! 이그니스 님의 힘이야! 기적이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갑자기 불이..!"

놀란 신도들의 말들이 예리한 귀에 들어왔다. 팔자에도 없는 사제 노릇이라니- 아시엘은 웃었다. 웃기로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더욱 스스로가 한심해지고 새삼 서러워질 뿐이니. 어쨌든 아시엘 아르셰인 일생 일대의 사기극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다시 백작의 성, 아시엘이 배정받은 방 안에는 묘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이그니스 교의 신전에서 도망쳐 나온지 2시간여 째- 뚝뚝 떨어져 저마다 자리를 잡고 머리를 싸쥐고 있는 세 명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탓이었다. 드디어 케빈이 덜덜 떨며 입을 열었다.

"망, 망했다..."

그 한 마디에 방의 공기는 더더욱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들은 침울하게 눈을 내리깔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카이스가 어두운 얼굴로 우물우물 말했다.

"유언장이라도 써 둬야 할까요... 두 손 두 발 다 싹싹 빌면 살 수 있을까.."

"아마 안 될거라고 생각해.... 어쩌지? 엄청 화낼 텐데.."

케빈 역시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아시엘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낼 생각에 그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얼떨결에 도망치긴 했지만 어마어마한 뒷후환을 만들고 말았다. 결국 케빈이 오스카를 쏘아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게 다 네놈 때문이잖아! 왜 거기에서 엎어지고 난리냐고! 정신 바짝 차려라 좋아하시네!"

침대에 걸터앉아 끙끙거리던 오스카도 울컥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거기에 타일이 어긋나 있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애초에 왜 셋 다 그냥 튀어버린 거야! 설마했던 카이스 너마저도!"

"이 바보야! 우리가 왜 도망쳤는데! 진짜 뭐가 무서운지 모르겠냐!"

곧장 케빈의 응수가 날아들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아, 아시엘! 험한 꼴 당하면 어쩌지?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을 거라고! 그래봤자 열 여섯 살짜리 꼬맹이잖아!"

"멍청한 놈, 그 녀석이 그럴 놈이냐! 그 전에 우리 목숨부터 걱정해야 한다고! 아까 히스 놈 몰아세우는 거 못 봤냐? 적진에 떠밀어 놓고는 자기 내버리고 튀었는데 그 대마왕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잖아! 상상을 해 보란 말이야!"

오스카의 얼굴이 헤쓱해졌다. 방 안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 어째 스산한 기운이 감도는 기분이었다. 불구덩이에서 간신히 몸을 피했더니 사실 그곳이 교수대였다는 결말인 느낌. 무시무시하게 웃는 아시엘의 얼굴을 떠올린 그들은 다시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때, 품에서 느껴지는 미미한 진동에 카이스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오스카가 의아한 시선을 그에게 보냈다.

"왜 그래?"

"이건 분명..."

카이스는 대답 대신 옷 속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빼 들어올렸다. 가죽 끈에 대롱대롱 매달린 붉은 물방울 모양의 장식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케빈이 입을 쩍 벌리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오스카 역시 숨을 들이켰다. 아시엘의 오른쪽 귀에 달려 있는 통신용 귀걸이의 나머지 한쪽이었다. 카이스는 서둘러 통신을 받았다.

"아시엘? 아시엘이야?"

[아시엘, 아시엘이야? 라고. 그래, 할 말은 그것 뿐이야?]

싸아악-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카이스는 오한을 느꼈다. 오스카와 케빈은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그의 표정에서 대충 상황을 파악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괜찮아? 다친 덴 없어? .....응, 응."

두 사람은 후배가 대화를 이어가는 것을 한 걸음 떨어져서 지켜보았다. 평소에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카이스의 초긴장 상태의 얼굴에 덩달아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아시엘에게 보일 택이 없었지만 카이스는 공손한 자세로 허리까지 굽실거리고 있었다. 간간히 응, 하는 대답만 간신히 하던 그의 얼굴에 일순 핏기가 싹 가셨다. 케빈과 오스카는 뻣뻣하게 굳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

그것을 마지막으로, 카이스는 목걸이를 툭 떨어뜨리듯 내려놓았다. 케빈은 조금 떨리는 목소리를 짜내는 것처럼 겨우 물었다.

"뭐래?"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무사하답니다. 지금은 꽤 안전한 곳에 있는 것 같고. 걱정은 하지 말라더군요. 이렇게 된 이상 내부에서 상황을 살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카이스는 살짝 뜸을 들였다가 선배들에게 친구의 마지막 한 마디를 전했다.

"..... 목 씻고 기다리랍니다."

순간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에 오스카와 케빈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카이스는 식은땀을 비오듯 흘렸다. 아무래도 셋 다 무사하기는 그른듯 했다.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버린 아시엘은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워버렸다. 새삼 괘씸함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가만 두나 봐라, 혼자 투덜거리던 그는 곧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세 좋게 사제를 자처하긴 했지만 정말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파이어 볼을 시전한 건 이런 구석진 곳의 영지민들이 한번도 마법이란 걸 보지 못했을 거란 예측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확신하지 못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스스로도 내가 미쳤나, 하고 혀를 내두를 일이었다.

거의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곤 했지만 그래도 첫번째 날 영주성에 들어갈 때 까지는 눈에 확 띄는 제복에 말까지 타고 당당하게 마을을 활보했으니 누군가가 그를 알아볼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것 역시 운 좋게 무마되었다.

성벽을 지키던 병사가 그를 의심스럽게 보기는 했지만 따로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마법으로 아시엘 쪽에 무게가 실린 지금 괜한 소리를 했다가 질타를 받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시엘은 적어도 그 순간 만큼은 이 영지의 비정상적인 군중 의식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제단 앞의 남자는 아시엘이 예측했던 대로 처음의 그 사기꾼 2인조 중 한 명인듯 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사람들을 헤치고 아시엘에게 다가왔다. 당장이라도 한 대 치고 싶어하는 것 같았지만 이미 사람들은 아시엘에게 선망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남자는 똥 씹은 표정으로 지하 2층으로 아시엘을 데려갈 것을 세이라에게 명했다. 잘 보살피란 말과 함께. 사실 감금이나 다름 없는 셈이었지만 그 결과 아시엘은 2층에 있던 호화로운 객실 중 하나를 떡하니 차자하게 되었다.

"하아.... 이제 어째야 하나."

의도한 건 아니지만 결국 신도가 되어 보는게 어때, 란 루이카엔의 농담대로 되버렸다. 얼떨결에 잠입한 어설픈 첩자 꼴이었지만 어찌됐던 곧 밖의 세 명이 움직일 테니 그 역시 안에서 뭔가를 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생각을 오래 이어가기엔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했다.

아시엘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작지만 화려한 샹들리에가 흐릿한 눈에 새겨졌다.

그러고 보니 세이라는 2층에 오는 걸 허락받은 건가. 함께 아래로 내려오자 마자 바를 약을 가지고 오겠다며 종종걸음을 쳐 어딘가로 사라진 그녀였다. 언제쯤 오려나. 그는 머리를 더듬어 커다랗고 푹신한 베개에 기댔다.

"때 아닌 호사네... 생활관 방보다 훨씬 좋잖아."

하나같이 고급스러운 가구에 은은한 조명, 편안한 침대와 두툼한 카펫까지. 이렇게 된 이상 당장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으니 여유나 즐기기로 했다. 근 이틀동안이나 제대로 자지 못했으니.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졸음이 몰려왔다.

 그 짜증나는 황자님은 뭘 하고 계실까. 며칠이나 잊고 있던 유트리안을 떠올린 아시엘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시끄러운 놈 없어졌다고 춤이라도 추고 있을지도. 새벽 5시, 이미 바깥에서는 날이 밝아오고 있을 시간. 마지막으로 하품을 크게 한 그는 적진 한가운데에서 아주아주 편안하게 잠이 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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