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62.세번째 파견(3)
오전 9시. 황성을 벗어난 시내. 한 손에는 제법 큰 짐꾸러미를, 나머지 빈 손엔 아이스크림 하나를 쥔 아시엘은 아침부터 내리쬐는 햇볕을 받으며 혼자 나들이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파견이면 또 말 타고 가야하나?"
아니. 가야 하나가 아니라 가야겠지. 아시엘은 걸음을 멈추고 한숨을 폭 내쉬었다. 운 좋게 검도 마법도 둘 다 어느정도 성취를 낼 수 있었지만 어째서 승마만큼은 그 모양인지- 아무나 붙잡고 멱살이라도 잡아 털며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한번 더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왜 그렇게 기운이 없나요? 고민이라도 있어요?"
"아- "
아시엘은 지체 없이 고개를 휙 돌렸다. 선량한 인상의 낯익은 청년- 렌이 생긋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시엘은 반가운 마음에 재빨리 그쪽으로 성큼 다가섰다.
"렌 씨! 오랜만이네요."
"그러게요. 잘 지냈어요? 뭐- 얼굴이 밝은걸 보니 잘 지낸것 같긴 하지만요. 또 파견인가요? 수고하시네요."
렌의 시선이 자신이 든 꾸러미에 닿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아시엘은 겸연쩍게 웃었다.
"그렇죠, 뭐. 렌 씨는 잘 지내셨어요? 이쪽에는 무슨 일이시구요? 여긴 여관이랑은 꽤 멀지 않아요?"
"그럭저럭 잘 지냈어요. 그리고... "
렌은 말을 끊고 소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 어쩐지 기묘한 빛이 섞여있는것 같다고 아시엘이 생각했을때, 그가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엔 아시엘을 보러 왔어요."
"네? 저를요?"
"네. 오늘 이 시간에 이 길목에서 아시엘이 시무룩해져 있을 거라는 걸 알았거든요."
조금 민망해진 아시엘은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어떻게 알았냐, 같은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가 단편적으로나마 미래를 본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대신 아시엘은 다시 평소의 미소를 띄우고 화제를 돌렸다.
"그럼, 저한테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세요?"
"음- 네. 그렇다고 할까요."
렌은 조금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웃는듯 하면서도 어쩐지 곤란한 기색을 숨기려는 듯한 느낌. 그것을 어렵지 않게 읽어낸 아시엘은 의아해져 눈을 깜빡였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음... 저, 이런 말 하면 기분 나빠할지도 모르지만요. 아무래도 신경쓰여서요."
렌은 살짝 뜸을 들이다, 살짝 한숨을 내쉬고 덧붙였다.
"아시엘의 미래를 봤어요."
"네?"
"요즘 위험한 일을 하고 있나요?"
그의 말에 아시엘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렌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역시- 하고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제가 본 건.. 아주 아주 일부분밖에 지나지 않아요. 아니, 봤다라고 하기에도 애매할 정도로. 아시엘, 대답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지만 역시 그만둘 수는 없나요?"
"...... 네."
아시엘은 쓰게 웃었다. 셀레니스 기사단 소속으로서 위험은 임무 중에 늘 상주해 있었다. 하지만 렌이 말하는 그 '위험한 일' 이 파견이나 임무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렌은 그럴 줄 알았다는듯 마찬가지로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 자세히 미래를 보려고 했는데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기만 했거든요. 하지만 몇 가지 충고는 드릴 수 있겠죠..."
"충고요?"
아시엘이 되묻자 렌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저도 모르게 움찔한 아시엘이 그에 맞춰 물러서려 했지만 렌이 갑자기 덥썩, 강한 힘으로 어깨를 붙드는 바람에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가 놀라 작게 숨을 들이켰지만 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밤에 단 둘이서 멀리 나가지 마세요. 어둠을 타고 불운이 당신을 향해 덮쳐올 테니. 주변을 항상 경계해. 알았어요?"
".....네."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그런 말을 꿀꺽 삼키며 아시엘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렌은 조금이나마 안심했는지 어깨를 꽉 쥐고 있던 손을 풀고 살짝 미소지었다. 분위기를 풀어낼 요량으로 아시엘은 장난스럽게 씨익 웃었다.
"그나저나 렌 씨가 이렇게까지 하시다니. 정말 큰일이라도 나려나?"
"이런 말을 듣고도 웃다니, 역시 아시엘 답다고 해야 할까요... 그리고 제 말은 끝나지 않았어요."
"네?"
의외의 답이 돌아오자 아시엘이 멍하게 되물었다. 렌은 부드럽게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말을 이었다.
"지금의 아시엘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나중이 되면 이 말도 곧 쓸모있어질 때가 올 거에요. 지금 그만두지 못한다면, 후에도 포기하지 마세요.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을 포기하진 마세요."
"......"
아시엘은 기분이 이상해지는것 같았다. 어쩌다 엮인 친구로서 종종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직접 미래를 이야기하는 렌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치부하기에는 그가 때까지 보여준 능력이 걸렸다. 그의 예언은 빗나간 적이 없었고,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렌은 입꼬리를 부드럽게 휘었다.
"우리는 스치는 인연이 아니다, 라고 제가 했던 말 기억나나요?"
"네."
아마도, 아카데미를 졸업했던 날 저녁에 렌을 처음 만났을때. 아시엘의 붉은색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렌은 확신시키듯 입가에 곡선을 드리우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때 전 혼잣말을 했을 뿐이지만 아마 아시엘에겐 전해졌겠죠. 그걸 잊지 마세요. 아직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이 뜻을 이해하게 될 날이 올거에요. 마지막은 시작으로 이어지는 법. 그 순간이 되면 전 아시엘의 곁에 있을 거에요. 끝을 맺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아시엘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어떻게 될지 모를 미래에 대해 듣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에요? 목 끝까지 차오른 물음을 억누르며 그는 의무처럼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렌은 고개를 내젓고는 분위기를 바꿔 가볍게 말했다.
"이번 파견에서도 조심하는게 좋겠어요. 제 감이 맞다면 여러모로 큰 봉변을 당하게 될 테니까요."
"...봉변.. 이요?"
어째 방금의 경고보다 더 피부에 와닿는데. 아시엘은 식은땀을 흘렸다. 얼마 전 벨킨이 이번 일을 단칼에 거절하며 했다는 '느낌이 안 좋으니까 가기 싫다' 란 말이 저절로 떠올랐다. 렌의 말이 바로 이어졌다.
"불을 조심하세요. 불 계열 마법도 웬만해선 사용하지 않는게 좋겠어요. 제 말 아시겠죠?"
"아.... 네."
아시엘은 꺼림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렌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그의 어깨를 두어번 툭툭 두드려 주었다. 격려의 의미였다.
"일 열심히 해요. 전 이만 갈 테니까."
"네.."
겨우겨우 대답한 그에게 눈으로 인사한 렌은 그대로 지나치는듯 하다 다시 걸음을 멈추고 아시엘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그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동료들을 믿지 마세요."
이번에야말로, 아시엘은 웃을 수 없었다. 렌이 종종걸음을 쳐 멀어져 갔지만 그는 그 자리에 한참이나 딱딱하게 굳어 못 박힌듯 서있어야 했다.
"여, 다녀왔냐? 꽤 늦었네."
소파에 기대 앉아 아시엘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케빈이 손을 슥 들고 아는척을 해 왔다. 아시엘은 간단하게 고개만 끄덕이고는 짐을 테이블에 턱 내려놓고 그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케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다시 말했다.
"왜 그래? 표정이 안 좋은데."
"...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것보다 카이랑 오스카 선배는요?"
"짐 꾸리러. 곧 출발이니까 너도 준비해."
케빈이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아시엘은 아까 들었던 렌의 경고보다 더 큰 문제가 작금 눈앞에 닥쳐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표정이 차차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것을 본 케빈은 킬킬 웃음을 터뜨렸다.
"너도 참 문제다. 승마 못 하는 기사라니. 루카인 아카데미에 건의라도 넣어야지 안되겠네. 승마도 필수 과목에 포함시키라고."
"놀리지 마세요!"
빽 소리를 지른 아시엘은 머리를 감싸쥐고 신음을 흘렸다. 원래 서툴기도 했지만 아카데미 시절부터 그는 승마를 즐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기사단에 들어온 이후 파견을 다니며 말 때문에 겪은 곤욕들 때문에 이젠 아예 기피 증상까지 생길 지경으로 심각해졌다. 케빈은 끌끌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너 날 잡아서 연습이라도 해 봐. 저번 파견때 분명히 그렇게 말하지 않았냐? 수련이랑 공부는 죽어라 해대면서."
"엄두가 안 나는걸 어떻게 하라구요."
아시엘은 웅크린 채로 우는 소리를 냈다. 연습, 말이 좋아 연습이지 말을 탈 때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그에겐 도전하는 것부터 큰 용기가 필요했다. 케빈은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듯 쳐다보았다.
"아니면 이번 기회에 카이스한테 제대로 배워 보던지. 그 귀신이 나타났다는 영지가 꽤 멀리 있으니까. 가는 중간에 마땅한 마을도 없으니 노숙까지 더해서 1박 2일쯤 잡아야 할걸?"
"그렇게나요?"
아시엘은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그는 푸후- 깊게 한숨을 내쉬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진짜 카이한테 부탁이라도 해야겠네요. 더 이상 말 때문에 민폐 끼칠 수는 없으니까..."
"야, 야. 너무 시무룩해 하지 마. 민폐라고는 한 적 없다고. 그리고 원래 사람이란게 약간 빈틈도 있어야 매력적인 거야."
"그럼 연습 안 해도 돼요?"
"아니, 그건 아니고."
지나치게 단호하게 말한 그를, 아시엘은 곱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얼떨결에 대답해놓고도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케빈은 은근슬쩍 그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때 마침 오스카와 카이스가 짐가방을 챙겨 2층내서 내려오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케빈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출발할 시간이 다 됐음을 직감한 아시엘은 완전히 울상이 되어버렸다. 그들의 이상한 기색을 알아차린 오스카는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모르지. 케빈은 속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카이스의 무심하던 얼굴에도 약간의 초조한 기색이 서렸다. 아시엘은 울고 싶어졌지만 어떻게든 눌러참고 겨우 입꼬리를 헤실, 들어올렸다.
"하하하... 그럼 이제 출발해요. 매도 먼저 맞는게 낫다고들 하니까."
"매?"
아직까지 상황 판단을 못한 오스카는 응? 응? 하며 세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케빈은 한숨을 폭 내쉬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을 뿐이었다.
그가 모든 것을 이해하기 까지는 채 20분이 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