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68화 (168/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55. 일상 속의 비일상(3)

"루이카엔 경!"

드디어 루이카엔과 벨킨, 그리고 한 병사가 지하 감옥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밖에서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던 대원들이 반색하며 달려왔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안의 죄수들은요?"

"당분간 이 일에 대해서 함구한다. 폐하께는 지금 바로 내가 가서 알릴 테니- 뭐, 어차피 몇 시간이나 지났으니 대강 알고 계시겠지만. 누군가 묻는다면 그냥 살인사건 정도라고 해 둬. 범인 찾는 일은 셀레니스에서 전담한다. 그리고 죄인들은."

루이카엔은 잠시 생각하는듯 말을 끊었다가 덧붙였다.

"다른 감옥에 옮겨놓고 이 감옥은 당분간 폐쇄하도록 해."

"네? ... 아, 예! 그럼 수고하십시오!"

잠깐 멍한 표정을 짓던 그는 곧 퍼뜩 정신을 차리고 경례했다. 루이카엔은 인사 대신 손만 슥 들어보이고는 벨킨과 함께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단장을 묵묵히 따르던 벨킨은 중앙의 정원에 다다라서 입을 열었다.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그래 보여?"

"어."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이카엔은 폭 짧게 한숨을 내쉬고 입가에 쓴 미소를 띄웠다.

"벨킨. 아까 그 마력 이야기, 당분간은 아무한테도 하지 말아줄래?"

"... 단장이 원한다면."

벨킨은 무덤덤하게 답하고는 곧바로 몸을 돌려 다른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생활관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참 답다고 해야 할지. 루이카엔은 픽 웃음을 터뜨리고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물론, 황제의 집무실이었다.

톡, 톡. 펜촉으로 나른하게 서류를 두드리던 라이펜은 팔에 괴고 있던 턱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바깥이 소란스러운것 같은데."

"아무래도 지하 감옥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는것 같습니다."

페이튼이 조용히 대답하는 말에 그는 흐음-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페이튼은 황제의 장난 때문에 이미 엉망이 되어 버린 서류가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저거 다음주까지 결제 해야 하는 겁니다만, 하고 말해볼까 생각했지만 곧 그만뒀다. 어차피 말 한다고 들을 사람이 아니었으니.

"있잖아, 페이튼. 슬슬 올 때 되지 않았어?"

"... 누구 말씀이십니까?"

폐하는 슬슬 일 하실 때도 되지 않으셨습니까,  하는 말을 겨우 억누른 페이튼은 인내심을 한계까지 끌어올리고 되물었다. 하지만 라이펜이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책상 위에 놓인 수정구가 지잉- 울리며 빛을 내기 시작했다.

라이펜이 것 보라는듯 싱긋 웃으며 통신을 받자 구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이카엔 드 카시마엘 경이 뵙기를 청합니다.]

"들여보내."

그는 짧게 답하고 통신을 끊어버렸다. 페이튼은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나 차와 과자를 가지러 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며 루이카엔이 들어왔다.

"여, 오랜만이네. 루이카엔 꼬마."

"최근에는 아시엘 꼬맹이랑 노시느라 폐하께서 저를 잘 호출하지 않으셨으니까요. 그리고 저더러 꼬마라니,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기겁하겠습니다."

황제의 장난 어린 인사에 그는 인사도 하지 않하고 대꾸했다. 라이펜은 킬킬 짓궂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서운해?"

"아뇨. 전혀. 오히려 아시엘한테 보너스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에요. 물론 허락된다면."

루이카엔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시원하게 미소지었다. 라이펜은 묘하게 일그러졌지만 어쨌든 웃는 얼굴로 본론을 꺼냈다.

"감옥의 살인사건 때문에 왔지? 보고나 해."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으니 그냥 처음부터 보고드리죠. 따로 드릴 말씀도 있고."

마지막 대목에서 루이카엔은 목소리를 낮췄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린 라이펜은 어느새 앞에 차와 다과를 가져다놓고 있는 페이튼에게 손짓했다.

"페이튼, 문 잠그고 나가 있어. 내 허락이 있을때까진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밖의 경비병에게 전하고."

"네."

익숙해진 상황에 그는 조용히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달칵, 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자 라이펜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뭐야, 심각하게."

"어제 아시엘이 잡아넣었던 그 자객들이 죽었습니다. 지하 감옥에서요."

"뭐? 아-"

그는 아쉬움 섞인 탄식을 흘리며 마른 세수를 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장난기가 남아있던 준수한 얼굴에 짜증이 실렸다.

"아시엘이 몽땅 생포해준 덕분에 당분간은 조용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쪽에서 직접 처리했나 보군."

"정황상 그렇게생각할 수밖에 없죠. 게다가 상당히 상황이 난처하기도 합니다. 용의자조차 알아낼 수가 없으니까요."

루이카엔 역시 언짢음을 숨기지 않고 인상을 썼다. 그러자 라이펜이 의아하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용의자도 알아낼 수가 없다니?"

".. 시체도 남지 않은 참혹한 꼴이었지만, 어쨌든 죽은 사람은 있는데 어젯밤 보초를 서던 녀석들은 아무도 들여보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습격을 받은 것도 아니고,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고요."

"그게 거짓말일 가능성은?"

"없어요. 안의 죄수들 역시 옆방에서 그 놈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만 들었다 뿐이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황제가 말없이 계속할 것을 재촉하자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잠깐의 침묵 후, 루이카엔은 결심한듯 단호하게 고개를 들었다.

"수상한 마력, 에 대해서 아십니까?"

"......!"

라이펜은 몸을 움찔했다. 그의 황금색 눈에 놀라움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그것을 놓칠 루이카엔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재우쳐 물었다.

"아십니까?"

".. 그렇다면 어쩔 거고, 아니라면 어쩔 거지?"

라이펜은 곧 표정을 풀고 픽 입꼬리를 올렸다. 루이카엔은 그런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폐하 역시 제가 모르는 사실을 알고 계신다는 말이죠. 아시엘과 그것의 관계 역시."

"꼭 취조당하는 기분인데."

라이펜은 특유의 느긋한 표정으로 농담처럼 답했다. 잠시 말을 고르는듯 눈동자를 데굴, 굴리던 그는 곧 하- 하고 깊은 곳에서부터 한숨을 내쉬고 한층 굳은 음성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넌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하지?"

"아까 그 자객들을 처참하게 죽인 살인범의 유일한 흔적이 바로 그 마력이기 때문이에요. 구석의 경비대에서, 괴 몬스터들에게서 발견되었고 파티장에서 수상한 남자가 어느 탐욕스러운 상인에게 넘기려고 시도했던 구슬들이 품고 있던 것과 비슷한."

루이카엔은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그의 맑은 회색 눈동자가 반짝, 예기를 발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은 흐지부지 묻혔죠. 하지만 그것들의 진실을 알아낸 사람이 있다면, 알고도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면."

메르티스 백작가의 죽어버린 숲에서 아시엘이 아무것도 없다, 라고 한 말이 사실이 아니었다면. 루이카엔은 심호흡하듯 차분히 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바로 아시엘이겠죠. 그리고 폐하께서 그 모든 일을 알고 계신다면 저 역시 그걸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흐음, 그건 어째서?"

".. 알아야 하니까요."

그가 힘주어 말하자, 라이펜은 고민하는 것처럼 음 소리를 내며 볼을 긁적였다. 분명 심각한 사안이었지만 그의 모습은 묘하게 여유가 있어 보였다. 잠시후, 라이펜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아, 나도 녀석 혼자서 버둥거리는 꼴 보기가 힘들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이야기해 줄 수는 없어."

"..네?"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루이카엔은 고개를 갸웃하고 되물었다. 라이펜은 은근한 미소를 짓고 몸을 앞으로 기댔다.

"그 건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녀석에게 맡긴 셈이니까. 그쪽은 내 소관이 아니야. 말해주든지 숨기든 그건 아시엘에게 달려 있지."

"......"

"하지만, 그를 다그치는데 필요한 정보 하나는 주도록 하겠어."

"네?"

루이카엔의 놀란 얼굴을 무시하고, 그는 검지손가락을 뿅 하고 세웠다.

"유트리안의 호위를 맡는 조건으로, 녀석이 나한테서 황실 전용 도서관의 출입증을 얻어갔어."

"예에!? 그걸 순순히 주셨어요?"

"아무거나 막 쑤시고 다닐 애는 아니니까. 그냥 줘버렸지!"

루이카엔은 뻔뻔하게 히죽 웃는 라이펜을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저런 무책임함이라니. 기가 막혔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건 그게 아니었다. 그는 겨우겨우 부글거리는 속을 눌러 가라앉혔다.

".. 그걸 어디에 쓴답니까?"

"무언가의 조사. 더 이상은 못 알려줘. 나머지는 아시엘을 협박하든, 달래든 알아서 하라고. 난 다음주에 녀석한테서 직접 결과를 들어봐야지."

라이펜은 킬킬 소리를 내며 의자를 빙글 돌렸다. 그러자 루이카엔이 아, 하고 운을 뗐다.

"그건 곤란하실 걸요? 그 녀석 다음주에 파견이에요."

"아, 그래? 그렇구나- 가 아니라, 파견!?"

덜컹! 라이펜은 기겁해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경악하는 그 모습에 묘하게 통쾌해진 루이카엔은 화사하기 그지없게 활짝 웃었다.

"네. 쪼오금 먼 데로. 다음주엔 못 보실 겁니다. 제가 설마하니 폐하의 속셈을 눈치채지 못할줄 아셨어요?"

"... 이 재수없는 자식."

라이펜은 부들부들 경련하는 입꼬리를 겨우 들어올리고 이를 악물었다. 이번에는 반대로 루이카엔이 유유자적 편안하게 다리를 꼬며 빙글거렸다.

"암살자들의 습격도 대충 예상하셨죠? 크게 안 놀라신걸 보니. 완전히 정치의 개판 안으로 그녀석을 밀어넣어서 루이스 경과 함께 옆에다 꽁꽁 묶어둘 작정이셨던 거지요? 떠나지 못하도록."

"......."

"뭐- 아직 아시엘은 어려서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한것 같았지만 말입니다. 그 녀석이 뿌리치지 못하니, 제가 손을 써야죠."

"쳇. 왜, 뭐! 루이스랑 아시엘 둘 다 붙어있어 준다면 너한테도 나쁠건 없잖아!"

툴툴거리는 황제를 어이없이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나쁠건 없어요. 하지만 황자님이야 원래 그 자리에 계셨으니 그렇다 치고, 겨우 16살 짜리를 그런 식으로 불구덩이에 밀어 넣으려고 하신건 그닥 좋지 않네요. 더군다나 암살자도 제대로 죽여버리지 못하는 녀석을. 단장 씩이나 되서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요."

라이펜은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못마땅하게 쏘아보았다.

"단장이기 전에 내 부하거든, 너도?"

"그럼 임시 보호자라고 해 두죠. 그냥 내버려두면 저나 폐하나 루이스 경께 아작날걸요?"

얼핏 보면 우호적인 분위기였지만 서로 노려보는 두 사람의 눈에서만큼은 불꽃이 튀는 듯했다. 결국 먼저 포기한 쪽은 라이펜이었다. 그는 불만스럽게 턱을 괴고 툴툴거렸다.

"흥. 그 놈은 안 그런것 같으면서 이상한 데서 무르다니까."

"아직 '살인'에는 익숙하지 못한 거겠죠. 몬스터를 베는 것과 사람을 베는 것은 차원이 다르니까요. 뭐...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패는 데는 별로 양심의 가책을 못 느끼는것 같았지만."

"......"

루이카엔의 담담한 말에 라이펜은 잠시 할 말을 잃은듯 멍하니 허공을 보다 겨우 정신을 차렸다.

"어쨌든 앞으로 계속 그러면 곤란할 수도 있어. 경험이 커버해 줄 문제겠지만.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도 상대를 죽이는데 거부감을 느낀다면 낭패가 될지도 몰라."

"카이스도 있으니까 괜찮을 거에요. 흔들릴땐 그 헌신적인 친구가 붙잡아 주겠죠. 그리고- 어느 정도 어설픈게 그 녀석의 매력이니까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던 라이펜은 묘한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가 곧 아무렇지도 않게 기지개를 크게 켰다.

"아으-! 이 지겨운 분쟁이 끝나면 이런 얘기도 필요없게 되겠지. 어린애들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고 말이야. 한심한 꼴이로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루이카엔 역시 쓴웃음을 지었다. 라이펜은 킥킥거리며 하얀 손가락으로 깍지를 끼고 몸을 책상에 기댔다.

"그러니까 제국의 안정을 위해서, 나를 위해, 너도 힘껏 움직여, 루이카엔 드 카시마엘 경."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 전에 꼬맹이 하나부터 물고 늘어져 봐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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