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52. 변화의 조짐(4)
황궁은 황자궁에 암살자들이 습격했다는 소식으로 금세 떠들썩해졌다. 침입자들이 유트리안의 몸에 흠집 하나 내지 못한채 맥없이 쓰러졌다는 사실과 황자를 훌륭하게 지켜낸 아시엘 아르셰인 경의 이름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그것은 황제의 집무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암살자, 암살자라.."
라이펜은 미간을 찌푸리고 자신의 책상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톡, 톡 쳤다. 페이튼은 허리를 더욱 깊이 숙이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예, 폐하. 침입자들은 병사로 위장하고 황자궁의 뒤뜰과 외부를 차단하는 담장을 지키던 경비대를 처리한 후에 습격을 가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이들은 무사한가?"
"유트리안 전하께서는 상처 하나 없으시고 아시엘 경 역시 깊은 부상은 아니라고 보고 받았습니다."
"흠-"
라이펜은 손깍지를 끼고 의자에 몸을 깊숙히 기댔다. 슬슬 움직일 거라 생각했지만 이렇게나 딱 맞아 떨어질 줄이야.
"분명 형님께서 지시한 일은 아니겠군. 그라면 이렇게 단순하게 움직이지는 않았을 테니까."
"......."
페이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황제를 보좌할뿐, 정치적인 발언은 허용되지 않은 위치에 있었다. 그렇지만 라이펜은 상관하지 않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직접 움직인 것은 하노빌 백작이나 그 측근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그가 노렸던 바이기도 했으니까. 루아 이클립스의 단장, 에피로스는 지나칠 정도로 곧은 심지를 가져 그런 일을 벌일 만한 인물이 아니었고 그의 측근이자 이클립스의 중추들은 단장이 그렇듯 대공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명령 없이 움직일 리가 없었다.
"암살자들 소속은? 뭐, 다 죽었으면 알아낼 길도 없나."
"아닙니다, 폐하."
"아니라고? 몇 놈이 운 좋게 살아나기라도 했어?"
라이펜이 의아하게 되묻는 말에 페이튼은 잠시 뜸을 들이다 힘겹게 다시 입을 열었다.
"습격해온 다섯명 모두 생포되었습니다."
"....뭐? 생포?"
라이펜이 황망한 목소리로 재차 확인해오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확인해보고 온 차였지만 어이가 없기는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깐 집무실 안에 침묵이 흘렀다. 라이펜이 픽 실소를 흘렸다.
"나 참.. 놈들의 상처는?"
"늑골 골절, 검에 베인 자상, 관통상, 한 명은 오른손이 절단되었고 세 사람은 전기충격으로 인한 화상과 내상. 그래도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중상인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 누가 마검사 아니랄까봐 골고루 해 주셨군."
그는 탄성인지 뭔지 모를 말을 내뱉고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의 입가에는 어느새 뜻모를 미소가 걸려있었다.
"아시엘 경의 말에 따르면, 침입자들의 실력은 일반 병사들보다 위이고 검기를 사용했지만 그리 강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어느 길드의 -A급의 암살자들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만.. 자세한 것은 그들이 깨어나면 알게 되겠지요."
"매일 루이카엔이나 케빈, 제르닌같은 괴물들 상대로 대련을 하니 상대하기 어려웠을 리가 없지."
라이펜은 의자를 빙글 돌려 페이튼을 등졌다. 그의 금안에는 흥미로움이 가득 차있었다.
"역시 어린애는 어쩔수 없네. 뭐.. 별 상관은 없지만 앞으로는 문제가 될지도 모르겠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페이튼이의아하게 물었다. 하지만 루이카엔은 제대로 답하지 않고 킥킥 짓궂은 웃음소리만 냈다.
"죽이지 못한 건지, 죽이지 않은 건지.. 그것보다, 지금쯤 화병으로 넘어갈 놈이 하나 있겠네."
"예?"
"우리의 바보같은 악동들과는 다르게 지독할 정도로 충성스럽고 영리한 사냥개 무리의 대장 말이야. 지금쯤 위장약이라도 삼키고 있지 않을까."
에피로스는 노기를 숨기려 애쓰며 제 2궁, 대공전의 긴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부글거리는 속을 어떻게든 달래보려 했지만 언제나 싸늘하게 식어있던 그 얼굴의 미간은 사정없이 찌푸려져 있었다.
"하노빌 백작!"
콰앙! 문을 거칠게 여는 것과 동시에 에피로스는 거칠게 외쳤다. 그는 자신이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듯 눈썹을 휘는 백작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인 것입니까, 백작. 암살자라니, 저는 듣지도 못했습니다!"
"진정하게, 에피로스 경. 나도 내 실책은 인정하고 있으니."
하노빌 백작은 그를 타일러 보려는듯 나지막히 말했다. 하지만 잔뜩 화가 난 에피로스는 제대로 듣지도 않고 외쳤다.
"적어도 실행에 나서기 전에 저에게 한마디 논의라도 하셨어야지요! 저는 이 일에 대해서 방금, 그것도 하인들의 입에서 전해들었습니다. 심지어 보기 좋게 실패하셨다지요? 보내셨던 자객들은 죽은 것도 아니고 전원 생포되었다 하고 전원 자살조차 하지 못하도록 구금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이 자백이라도 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진정하게. 답지 않게 왜 그러나?"
조용하지만 단호한 백작의 음성에 에피로스는 못마땅하게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눈가가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키는 것은 그로서도 어쩔수 없었다.
"내가 성급했네. 나도 알아. 조금더 신중해야 할 것을 일을 이렇게나 그르치다니.. 상대가 어린애라 방심했던 모양일세, 나나 자작이나."
"어려도 마검사입니다. 게다가 잘못 건드렸다가는 소드마스터가 나설 수도 있습니다. 루이스 아르셰인 뿐만이 아니라 루이카엔 드 카시마엘 까지도요. 주변 사람을 끔찍이 아끼는 녀석이니 말입니다."
에피로스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하노빌 백작의 판단은 마음에 들지 않은 것도 많았지만 대체로는 합리적이고 유용했다. 하지만 이렇게나 멋진 바보짓이라니!
"그리고 애초에 마검사는 사람은 마법과 검을 같이 익혀서 그 약점들을 보완하고 공격력은 더욱 끌어올린 희귀한 경우라 그 움직임을 예측하기가 어렵습니다. 검으로는 근거리 공격, 마법으로는 원거리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해낼 수 있으니 본인이 그리 강하지 않더라도 상대하기가 까다로울 수 밖에요.
암살자들은 습격해서 단칼에 상대를 죽이거나 몸을 숨긴채 암기로 목표를 사살하는 방법만을 연마하니 마검사와의 상성은 최악입니다."
"그렇군. 하지만 어째서 살려뒀을까, 그들을."
"예?"
하노빌 백작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하자 에피로스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자객들 말일세. 만약 그 자리에 루이카엔 경이나 케시비언 경이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것 같나?"
"어떻게라니... 5분 안에 끝나 있겠지요. 주변은 피바다가 되고그들을 상대라면 길드에서 빌린 암살자들 쯤이야 형체도 없이 조각날 것입니다."
역시 그렇지? 하고 확인하듯 되물은 백작은 빙그레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원 생포라.. 아무래도 그 놈은 제 양부에게서 단호함만은 물려받지 못한 모양이군. 자신의 손으로 끝내기를 두려워하다니."
"단순히 뒤를 캐내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르지요. 그것보다, 잡힌 그들은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에피로스가 평소의 침착함을 되찾고 냉정하게 화제를 돌리자 그는 잠시 고민하듯 음- 소리를 내며 수염난 턱을 쓰다듬었다.
"별 수 없지... 그분들께 수고를 부탁드리는 수밖에. 아아, 걱정 말게나. 경과 계약한 녹스 님은 이런 뒤치다꺼리를 싫어하신다는 사실은 나도 잘 아네. 아울 님은 분명 장난삼아 터무니없는 대가를 요구하실 테니 뒤로 미루고. 에스테반 님께 부탁드려야 겠군."
"그 분.. 말씀이십니까?"
에피로스는 조금 꺼림직한 얼굴이 되었다. 에스테반- 그는 아울보다 잔인하고, 갓 태어난 새끼고양이보다 제멋대로였다. 그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 에피로스는 불안했다.
"괜찮네. 비위는 잘 맞춰 드려야겠지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경은 신경쓰지 말게."
내 실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하노빌 백작은 조곤조곤 덧붙였다.
"잘 됐네, 아시엘."
"네?"
문득 들려오는 슌의 목소리에 책상애 앉아 무언가에 몰두하던 아시엘은 고개를 들었다. 이미 밤이 깊은 시간. 잘 준비를 마치고 잠옷 차림으로 젖은 머리에 수건을 감은 슌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을 이었다.
"퍄견 가면 며칠이나마 그 황자님한테서 벗어날수 있잖아."
"아아... 그래도 익숙해졌다고 해야하나, 귀찮긴 해도 나쁘지 않아요. 재미도 있고. 게다가-"
아시엘은 씨익 입가에 곡선을 만들고는 살벌하기 그지없게 덧붙였다.
"적임은 개뿔. 그냥 다들 안 하려고 미뤄둔거 저한테 떠맡긴 거잖아요."
"하하.. 어쩔수 없지. 원래 가기로 했던 벨킨 씨는 죽어도 안 한다고 뻗대고 다른 녀석들도 장난하냐면서 안 간다고 고집을 부리는걸. 실제로 다들 바빠서 남는 손이 너네밖에 없기도 하고."
슌이 달래듯 그렇게 말하며 전날 루이카엔의 부탁을 딱 잘라 거절하던 벨킨을 떠올렸다. 싫어, 안가! 딱 한 마디를 내뱉고는 늑대로 변해 짖어대는 바람에 루이카엔은 일찌감치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시엘은 잔뜩 골이 난 얼굴을 숨기지 않고 짜증스레 펜으로 종이를 꾹꾹 찍었다.
"폐하도 그렇고 루이카엔 씨도 그렇고 적임은 뭐가 적임이야. 젠장, 황자님 호위도 처음부터 없었던게 아니라 다들 못하겠다면서 때려치운 거라면서요? 자식 교육은 아버지 책임인거 몰라? 왜 나한테 그러시는데!"
중얼거림으로 시작한 불평이 결국 마지막에는 빽 소리지르는 것으로 끝나자 슌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소년이 이렇게 골을 내는 이유는 불과 몇 시간 전, 치료를 다 받고 오랜만에 노닥거리며 휴식을 취하려는 그에게 황제의 전언이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수고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이참에 정식으로 보모로 고용해도 괜찮을것 같군.
얄미운 라이펜의 목소리가 들려오는것 같던 그 서신을 곱씹은 아시엘은 새삼 머리를 와악 헝클어뜨리며 신경질을 폭발시켰다.
"누가 보모야, 누가아! 이 망할 황제 폐하 같으니라고!"
"야, 야. 진정해."
그 기세에 밀린 슌은 뒤로 주춤 물러서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도 다음주엔 파견 나가잖아.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고."
"솔직히 그쪽이 훨씬 더 피곤해요. 솔직히 전하 옆에 있으면 하루종일 노닥거리는게 일인데요, 뭐. 전 그냥 보모 취급 때문에 열받았을 뿐이에요."
아시엘은 머리에서 손을 떼고 투덜거렸다. 오늘 신기한 구경 많이 하네- 슌이 중얼거렸다. 물론 속으로만. 이렇게까지 성질을 내는 아시엘은 보기 드문 볼거리였지만 그래도 건드리기는 무서웠다.
"그래도 이젠 더이상 미루면 곤란해져. 막내인 너한테 좀 부탁한다, 응? 두 사람 더 채워야 파견 보낼수 있단 말이야." -아까 파견에 대해 설명해준 루이카엔의 말이었다. 나머지 셋은 서로 떠넘기고 떠넘기다 결국 가위바위보에서 진 케빈과 오스카, 그리고 아시엘이 간다면 필히 따라붙는 카이스로 채워졌다.
"단순한 유령 소동이라면 좋겠지만 그게 아닐 수도 있잖아. 실제로 그 유령을 보고 실신한 사람도 한둘이 아니라고 하니까."
"그렇긴 하죠. 누군가 해결을 하긴 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벨킨 씨는 왜 안간다고 하셨어요?"
슌은 고개를 옆으로 까딱하고는 티테이블 위의 티포트를 집어들며 대꾸했다.
"영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재수가 안 좋다나, 뭐라나. 감이 안 좋다는 거지. 웨어 울프족의 육감은 절대절대 무시할게 못 되니까 혹시나 진짜 귀신인가 싶어서 다들 꺼림직해져서 내뺀 거지."
"하하.. 알 만 하네요."
내 일은 너한테, 네 일도 너한테 떠미는게 특기이자 취미생활인 기사단이었다. 한번 공중에 떠버린 일은 이리저리 방황하다 결국 더이상 미룰 곳이 없는 아시엘에게 상륙해버린 것이다.
"휴.. 뭐 어쩌겠어요. 힘없는 내가 잘못이지."
한숨을 폭 내쉰 그는 다시 종이에 무언가를 열심히 끼적이기 시작했다. 티포트에 물을 채우던 슌은 어이가 없어져 픽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또 공부해? 낮에 그렇게 난리를 쳐 놓고?"
"뭐.. 제때제때 해야죠. 파견 나가면 당분간 제대로 못 할텐데."
"네가 그럼 그렇지."
아시엘은 뭐 어떻냐는듯 어깨만 으쓱했다. 사실 공부라고 하기엔 조금 애매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보지 못한 슌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성냥을 그어 양초에 불을 붙이고 그 위의 받침대에 포트를 올려놓았다. 달그락, 소리에 아시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에게 물었다.
"차 끓어요?"
"오냐. 공부나 해."
"네에-"
사각사각. 대화가 끊긴 날카로운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만 들려왔다. 조용해진 아시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슌은 도대체 뭘 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티포트에서 향긋한 냄새와 함께 보글보글하는 물 끓는 기분 좋은 소리가 공기를 타고 올라왔다. 그는 포트를 데운 촛불을 끄고 잔을 두개 꺼내 쪼르륵, 진하지 않게 우려난 차를 따랐다.
"마시면서 해. 몸을 편안하게 해 주는 차래."
"감사합니다."
그가 잔 하나를 내밀자, 아시엘은 생긋 웃으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슌은 그 틈을 타 책상 위의 것을 훔쳐보려 했지만 교묘하게 팔로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았다.
"슌 선배는요?"
"... 아, 난 잠깐 샤워실에 다시 다녀올게. 옷 두고 온것 같아서."
"그래요?"
아시엘은 고개를 갸웃하며 차를 한 모금 호록, 마셨다. 입안 가득 풍겨오는 향에 그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슌은 픽 웃고 그대로 돌아서 방을 나섰다.
이미 꽤 늦은 시간이었다. 두 사람 외엔 거의 다 잠들었는지 어둠에 잠긴 복도는 고요하기만 했다. 슌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 걸음을 옮겼다. 샤워실이 있는 연무장 쪽이 아니라- 뒷마당 쪽으로.
조심스럽게, 하지만 익숙하게 외부로 통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그는 주변을 찬찬히 살폈다. 있는 것이라고는 제대로 관리조차 되지 않은 엉성한 나무들 뿐. 인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별빛과 달빛조차 숨어버린, 완벽한 암흑.
그런 곳에서 슌은 허공을 향해 부드럽게 손을 뻗었다.
"셰이드. 와라."
그의 속삭임이 끝나자마자 그의 손가락 끝에 검은 연기가 맺혀 점점 부풀어 올랐다. 어느 정도의 크기가 될 때까지 몸집을 키워 가던 그것은 곧 어둠보다 새카만 덩어리의 형상을 취했다가, 한순간에 확 흩어졌다. 연기가 사라진 자리, 그의 손 끝에는 부리에 종이쪽지를 문 까마귀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슌이 그것을 빼내자, 까마귀는 나타났을 때처럼 소리 없이 스륵- 연기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어둠 속에서 불빛도 없이 쪽지의 내용을 확인한 그는 하, 짧게 한숨을 내쉬고 그것을 조각조각 찢어내 공중으로 휙 던졌다. 잘게 찢어진 종이조각들은 잠시 바람을 타고 뒤로 날아가다 곧 검은색의 가루가 되어 재처럼 흩어졌다.
"......"
슌은 잠시 그 자리에 못이 박힌듯 뻣뻣하게 서있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방으로 돌아갈 때도 나갈 때와 똑같이 조용하고 신속했다.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어두컴컴한 로비와 복도를 지나고 계단을 올라 방으로 향했다.
달칵, 슌은 문을 열고 들어와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나간지 십여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시엘은 어느새 책상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그의 옆에 넘어진 찻잔이 내용물을 모조리 쏟아낸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미안."
슌은 작게 사과하고, 잠든 아시엘에게 다가갔다. 보통이라면 특유의 예민한 귀 때문에라도 고개를 반짝 들고 오셨어요, 하고 인사를 건넬 터였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슌은 아시엘이 앉아 있는 의자를 조심스럽게 뒤로 빼내 그를 안아들어 침대에 눕혔다. 마치 의지가 없는 인형처럼, 아시엘은 곤히 눈을 감고 규칙적으로 색색 숨소리를 냈다.
".....미안. 미안해."
슌은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배게를 편안하게 받쳐 주고 이불까지 꼼꼼히 덮어준 후 돌아선 그는 책들과 각종 종이들이 널려 있는 아시엘의 책상을 대강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툭. 책 사이에 끼어 있던 종이뭉치가 발치에 떨어지는 바람에 그는 몸을 숙여 그것을 주워들었다.
굉장히 오래된 양피지였다. 고대 마법서라도 되는 건가, 슌은 무심코 그것을 펼쳐 대충 눈으로 훑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딱딱하게 얼어붙어버렸다.
"......!"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아시엘을 돌아보았다. 소년은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눈을 굳게 감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오랜만에 보는 편안한 얼굴이었다. 잠이 들었을 때의 그는 꽤 자주 악몽을 꾸고는 했으니까.
슌은 다시 시선을 돌려 양피지를 읽었다. 인간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독특한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는 몇 세기 전의 흑마법 연구서. 그는 책상 위를 바라보았다. 이 종이에 적힌 것과 똑같은 내용이 배껴진 공책이 펼쳐져 있었다.
죽여야 해, 슌은 무의식중에 그렇게 생각했다.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의가 무너지게 된다, 라고.
하지만- 그는 또다시 아시엘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반짝이는 커다란 눈동자는 눈꺼풀 아래에 가려져 있었다. 무방비의 상태. 기회라면 지금이었다.
그는 손을 들었다. 손을 들고, 천천히 아시엘을 목을 향해 팔을 뻗었다. 하지만- 슌은 멈칫했다.
"......큭."
아시엘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슌의 손 역시 더이상 다가가지 못했다. 그는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결국 식은땀으로 순식간에 축축해진 이마를 짚었다.
그때. 똑똑, 무언가가 창문을 날카로운 것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와 슌은 고개를 들었다. 방금 내보낸 셰이드-까마귀가 부리로 유리를 두드리며 그 새빨간 눈을 빛내고 있었다.
슌은 그제야 까마귀가 자신의 급격한 감정의 요동을 읽고 다시 되돌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둠의 정령인 그는 메신저이자 하나의 감시자였다.
까마귀의 붉은 눈이 문제를 확인하려는듯 방 안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슌은 멍청하게 셰이드를 응시했다. 이걸 보고해야 해, 그 분께.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정작 입에서 나온 것은 다른 말이었다.
"-문제 없어. 돌아가. 차가 쏟아져서 놀란것 뿐이니까."
셰이드는 알았다는듯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다시 스륵, 하고 연기가 되어 화했다. 그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슌은 비틀거리며 자신의 침대로 가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