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49. 변화의 조짐(1)
"황제 폐하 드십니다!"
남자의 외침이 우렁차게 대전 안에 울려퍼지자 조용조용 이야기를 나누던 귀족들은 서둘러 입을 다물고 허리를 숙였다.
거대한 중앙의 문에서 모습을 드러낸 라이펜은 그런 대신들을 한번 죽 둘러보고는 걸음을 옮겨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황좌로 가 앉았다.
"그런데 오늘은 형님이 보이지 않는군요."
"예, 폐하. 대공 전하께서는 몸이 불편하셔서 참석하지 못한다고 전해 오셨습니다. 저희들에게 대신 사죄의 말씀을 올리라 하셨습니다."
하노빌 백작이 차분하게 고하자 라이펜은 흠- 소리를 내고 턱을 괴었다. 몸이 좋지 않다니, 최상의 핑계거리였다. 슈베이만 대공의 빈자리를 힐끗 바라본 그는 곧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 큰일입니다. 형님께 안부 전해주십시오. 나중에 체력 보강에 좋은 약재를 하인들 편에 보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노빌 백작은 머리를 조아렸다. 그를 따라 대공, 슈베이만을 모시는 다른 귀족들도 다시 한번 깊이 허리를 숙였다. 충성스러운 신하를 둬서 좋겠습니다, 형님. 하지만 별로 부럽지는 않군요. 라이펜은 속으로 조소를 흘렸다.
"자, 그럼 회의를 시작하도록 합시다."
"그 전에 폐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최근 황자 전하가 아시엘 아르셰인 경과 함께 하시는 모습이 자주 보입니다만, 무슨 까닭인지 알고 싶습니다."
대공 쪽의 귀족, 콘로드 자작의 말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라이펜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글쎄요. 아이들끼리는 맞는 것이 있겠지요. 언제부턴가 친구처럼 어울려 다니더니 꽤 친분을 쌓은것 같습니다."
거짓말이었다. 두 사람을 붙여둔지 2주가 넘어섰다. 지난주에 유트리안의 호위병에게 보고 받은 바에 의하면 그들은 아주 '줄기차게' 싸워대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지내나 궁금한 마음에 한 명을 따로 불러들여 물었을때 그가 들려주었던 말들은 굉장히 인상 깊어서, 라이펜은 아직까지도 그것만 떠올리면 웃음이 비집고 나올 지경이었다.
첫날부터 하인들을 죄다 되돌려보내고 일주일동안 강제 휴가를 줬다나 뭐래나. 당연히 유트리안은 펄쩍 뛰고 난리가 났지만 간 큰 아시엘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고 했다. 결국 유트리안은 일주일동안 하인 없이 호위병들만 데리고 다녀야 했다. 마침내 시간이 흘러 유모와 시종들이 돌아온 날 첫 시중을 받은 후 유트리안이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 라고 한 사건은 두고두고 화자되었다.
'상상 이상으로 잘 해주고 있단 말이지.'
라이펜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시엘 본인 역시 유트리안이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 오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터였다. 하지만 도서관 출입증 같이 엄청난 걸 얻어냈으니 그 정도는 당연하다- 라고 라이펜은 생각했다. 어쨌든 황자와 서로 헐뜯으며 티격태격할 수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을 테니.
"폐하?"
"아, 이런. 잠시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첫 안건은 무엇입니까?"
웨슬린 백작의 부름에 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손을 훠이훠이 내저었다. 대충 예상이 맞다면 슬슬 적들이 움직일 때였다. 일부러 대전에서 그 말을 꺼내볼 정도라면 그만큼 신경을 쏟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물론 라이펜은 전혀 움직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여전히 말씀은 잘 하시는군, 폐하는."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하노빌 백작은 그렇게 툭 내뱉았다. 지금 그가 얼마나 기분이 좋지 않은지 알아차린 콘로드 자작은 몸을 긴장시키며 그 뒤를 따랐다.
대공 세력 내에서 하노빌 백작의 입지는 굉장했다. 특유의 책략과 일 처리 능력은 그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그래서 슈베이만 대공 역시 백작을 가까이에 두고 신임하는 모습을 보였다. 덕분에 같은 편에 선 후작들 조차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자작. 폐하의 말씀을 믿나?"
"예? 황자와 아시엘 아르셰인의 일 말씀이시라면.. 저 역시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모종의 이유로 함께 하도록 따로 명을 내리신게 아닐까요?"
자작은 더듬더듬 답했다. 하노빌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아시엘 아르셰인은 루이스 아르셰인을 등에 업고 있어. 그것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하지. 황자에게 힘을 실어 주시려는 게야."
"하지만 그는 일개 기사에 불과합니다.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했다지만 16살짜리 어린애일 뿐인데 그 한 명을 황자에게 붙여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진다는 말씀이십니까?"
"이보게, 자작. 자네 정계에 발을 들인지 얼마나 되었던가?"
콘로드 자작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3년 되었습니다."
"역시. 그렇다면 루이스 아르셰인 경을 직접 만나보지 못했겠군."
"그렇습니다. 도대체 어떤 분이시길래..?"
백작님이 이토록 경계를 하시는 겁니까, 하는 뒷말을 그는 꿀꺽 삼켰다. 하지만 하노빌 백작은 그 뜻을 알아차리고 음- 하는 소리를 냈다.
"그 황제 폐하의 곁에서 10년 이상을 버틴 사람이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거기다 제국 최강의 검사, 소드마스터로 추앙받고 있으니."
"예.. 그건 압니다만. 그것과 아시엘 경의 입지는 무습 상관이 있습니까?"
"루이스 아르셰인 경은 인간관계가 좁기로 소문이 났던 자야.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으니 그렇겠지. 그와 밀접한 관계를 맻은 사람은 폐하와 셀레니스 기사단의 중추 몇몇 뿐이네. 그만큼 그의 권력이 분산되지 않고 그에게만 집중되어 있다는 뜻이지. 정작 본인은 그 권력을 사용한 적이 거의 없는데다 십여년 전에는 모습까지 감춰버렸지만. 그런 중에 그가 아들이라 부르며 애지중지하는 기사가 황궁에 들어온 후에 마검사라는 특이한 인재로서 알게 모르게 눈길을 모으고 있어. 무슨 뜻인지 알겠나?"
백작이 긴 말을 빠르게 쏟아내자 자작은 예.. 하고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차분한 편인 그가 이렇게까지 흥분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인 까닭이었다. 그런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노빌 백작은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 전- 그러니까 메르티스 백작가의 차남, 카이스 루 메르티스와 아시엘 아르셰인이 셀레니스에 합류한 날 루이스 아르셰인이 밤중에 입궁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네. 루카인 아카데미에서 유유자적 세월을 보내며 제국의 상황에는 관심도 없다는듯 행동하던 그가 말일세."
".....! 그렇다면 혹시-"
콘로드 자작이 눈을 커다랗게 뜨자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시엘 아르셰인 때문이겠지. 그 꼬마가 황궁에 있음으로서 루이스 아르셰인 경이 다시금 그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어. 그렇게 된다면 지금 꼬마와 붙어 있는 황자에게 힘이 실릴 거야."
"아.. 그 전에 싹을 잘라두라는 뜻이었군요. 그가 마검사의 능력을 더 키우기 전에."
"그렇지. 마검사라 해도 일단은 막 아카데미를 졸업한 애송이일 뿐이니. 루이스 아르셰인이 미쳐 날뛸 가능성도 있지만 이제 우리에게 그의 무력은 별 문제 될 게 없네. 인간인 이상 그도 '힘' 에는 어쩔수 없을 테니 그가 정치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전에 제거하면 그만이야... 준비는 되었는가?"
자작은 백작이 무엇을 묻는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자신있게 답했다.
"바로 오늘입니다. 이미 시작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아, 결과는 두고 보면 알겠지. 오늘 저녁쯤에 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