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60화 (160/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47. 철부지 황자, 바보 기사(2)

"하아..."

빠른 걸음으로 생활관에 돌아온 아시엘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깊은 곳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고작 말 한마디 때문에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나 버린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동시에 그런 무신경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 뱉은 유트리안이 조금은 두려워졌다.

"아으으.. 모르겠다."

결국 아시엘은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다 쿠션을 안고 옆으로 드러누워버렸다. 한참동안 뚱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던 그는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에 고개만 틀어 시선을 위로 향했다. 언제 왔는지 카이스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찍 왔네. 그런데 뭐 하고 있어?"

"....."

아시엘이 대답하지 않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자 카이스는 의아해져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가장 오랫동안 아시엘을 지켜본 그답게 대략적인 상황을 알아차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 별로."

아시엘은 부루퉁한 얼굴로 그렇게 대꾸했다. 하지만 언제나와는 다르게 불만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머리 네 배쯤 되는 커다란 쿠션을 꼭 끌어안고 모로 누워있는 그의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애같아, 카이스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그의 옆에 앉았다.

"왜 그러는데?"

"음..."

아시엘은 몸을 똑바로 눕히고 한참동안 멀뚱멀뚱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러다 그는 문득 입을 열었다.

".... 카이는 메르티스 백작님과 닮았네. 아, 눈이 새카만 건 백작부인이랑 닮은 것 같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형님과 어머니니까 닮은건 당연하지."

카이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시엘은 그런 그의 새빨간 머리칼에 시선을 주었다. 막 일을 끝내고 돌아와 샤워를 했는지 아직까지 물기가 반짝거리며 맻혀 있었다.

메르티스 백작가의 상징인 붉은 머리칼. 페일과 닮은 하얀 피부. 카스란과 비슷한 무뚝뚝한 표정. 그리고 키프스의 영향을 받은 듯한 친절함까지. 그의 외모부터 내면까지 '가족' 의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아시엘은 친구에게서 눈을 떼고 다시 허공에 시선을 주었다.

"있잖아, 카이. 이 금발이랑 빨간 눈은 누구한테서 받았을까?"

"......"

카이스는 순간 말문이 막혀 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시엘도 딱히 무언가를 바란 것은 아닌듯 계속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쩌면 작은 키도 누군가가 줬을지도 모르지. 뭐- 어렸을때 못 먹은 탓도 있겠지만 말이야. 이 요상한 빨간 눈도 근원이 있을 거 아냐?"

그는 언뜻 보면 남 이야기를 하는 듯한 얼굴로 히죽 웃었다. 아시엘을 가만히 바라보던 카이스는 넌지시 입을 열었다.

"궁금해?"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갑자기 왜?"

"누군가가 새삼 확인시켜 줬거든. 내가 천애고아라는 사실을."

아시엘은 킥킥 웃음을 터뜨리고 몸을 돌려 배를 깔고 엎드렸다. 언제나처럼 아무것도 아닌듯, 조금 심한 장난을 당한 뒤에 헛웃음을 삼키는 어른같은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려 있었다.

항상 이런 식이지. 카이스는 손을 들어 그의 금발을 살살 헝클어뜨렸다.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 웃는 친구의 얼굴 뒤에는 딱딱한 뼈가 감춰져 있을 때가 많았다. 가끔은 어리광을 부려 줘도 괜찮을 텐데, 속의 말을 삼키며 카이스는 살짝 입가에 곡선을 드리웠다.

"넌 루이스 교수님이랑 닮았어. 아주 많이."

"에?"

의외의 말에 아시엘은 고개를 반짝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카이스는 흠- 하고 잠시 고민하는듯 턱을 쓰다듬었다.

"음.. 뭐든지 똑 부러지는 점이라거나. 깔끔한걸 좋아하는 것도 그렇고."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아시엘이 픽 웃음을 터뜨렸지만 그는 그만 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카이스는 조금 더 머리를 굴리다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가끔씩 단호한 점도 닮았어. 무슨 일이든 확실하게 끝맺는 것도 그래."

그는 묘한 표정이 되어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아시엘을 내내려다보았다. 뜻이 제대로 전해졌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등받이 뒤에서 연갈색 머리칼의 머리 하나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뭐야, 무슨 얘기 중인데?"

집무실에서 서류들과 싸우다가 아델레트의 감시가 약해진 틈을 타서 탈출한 루이카엔이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두 소년이 에, 하고 얼빠진 얼굴을 하는 것이 재미있었는지 그는 싱글 웃었다.

"대충 듣자 하니 루이스 경이랑 아시엘에 대해서인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두 사람다 화나면 앞뒤 안 가리는게 똑같지. 아시엘은 잘 모르겠지만 루이스 경도 무시무시했다고."

"아니, 막 나가는건 네놈이랑 똑같지."

그의 말에 편한 복장으로 수련을 하러 가던 케빈이 걸음을 멈추고 툭  한마디를 던졌다.

"첫 임무에서 경비대를 박살낸 놈들은 아시엘이랑 너밖에 없어.아델 말대로 아주 판박이야."

"그건 나나 저 녀석이나 천성이야. 어쩔수 없다고."

케빈은 손을 휘휘 내젓는 루이카엔을 곱지 않은 눈으로 한번 쏘아보고는 두꺼운 검을 어깨에 툭 걸쳤다.

"그냥 둘이 형제지간 해버리라고. 말 안듣는 이복동생보다야 이쪽이 훨 낫지."

"그런가? 아버지 자리는 루이스 경이 이미 꿰차고 있으니까.양보할 생각도 전혀 없는것 같고. 아시엘도 이런 유능한 형님이 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

"누가 유능하다는 거야, 누가! 자화자찬도 정도가 있지."

루이카엔이 능글능글하게 대꾸하는 말에 그는 왈칵 신경질을 냈다. 아시엘은 몸을 일으키고 갑작스러운 논쟁을 벌이기 시작하는 단장과 선배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는 문득 지나가는 말처럼 입을 열었다.

"저랑 루이스 아저씨랑 닮았어요?"

"어?"

루이카엔과 케빈은 말싸움을 멈추고 눈을 깜빡였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는듯 했지만 그것도 잠시, 케빈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듯 눈을 부라렸다.

"당연하지. 겉모습을 봐서는 모르겠지만 속을 뒤집어 보면 역시 부자지간이구나, 라고 바로 알아차릴 정도로."

바보야, 라며 그가 퉁명스럽게 말을 끝마치자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주억거린 루이카엔이 웃는 낯으로 뒤를 이었다.

"물보다 피가 진하다지만, 또 그것보다 진한게 바로 정 아니겠어? 가까이 지내다 보면 어느새 닮게 되는거야."

아들. 아들- 아시엘은 한참 동안 그 단어를 속으로 되뇌었다. 새삼스럽게 가슴이 쿵쿵 뛰는것 같았다. 익숙하지는 않지만 전혀 싫지 않은 단어. 그러고 보니 스스로를 루이스의 아들이라 지칭한 적은 거의 없었던것 같았다.

그때, 마침 그들의 뒤에서 새로운 난입자가 불쑥 나타나 루이카엔과 케빈의 뒤통수를 빠악! 후려갈겼다.

"컥!"

"커헉!"

매서운 공격을 날린 장본인- 제르닌은 얻어맞은 머리를 보여잡고 끙끙거리는 루이카엔과 케빈에게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좀 닥쳐. 시끄러워 죽겠다."

"야, 이 자식아! 다짜고짜 때리는게 어딨냐! 손부터 나가는건 진짜 하나같이 똑같다니까."

케빈이 왁왁 날뛰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그는 옆의 소음을 무시해 버리고 대신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뭔가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앉아있는 아시엘에게 시선을 주었다.

"난 오늘 밤 늦게나 들어올 줄 알았는데. 꽤 일찍 돌아왔군."

"하하.. 어쩌다 보니까요."

아시엘은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를 따라 픽 미소지은 루이카엔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친근하게 미소지었다.

"어땠어? 오늘 하루는."

"음- 글쎄요."

아시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성질 더러운 황제에게 불려가 얼토당토 않은 일을 맡고, 덕분에 황제 못지않게 속을 긁어대는 철부지 황자님의 말싸움 상대를 해 주어야 했다. 도서관에 들어가서는 꽤 많은 수확을 얻어냈지만 지금 당장 전혀 손을 쓸 수가 없는게 현실이었고 마지막에는 유트리안의 생각 없는 한 마디에 도망치듯 여기까지 와버렸다.

하지만-

"뭐, 그렇게 나쁘진 않았어요."

그렇게 대답하는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그늘이 걷혀 있었다. 곁에서 편안하게 지켜보던 카이스는 피식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마법 연구를 도와달라는 핑계를 대고 벨킨의 연구실 겸 방에 따라 들어갔다가 성공적으로 구슬을 돌려받은 아시엘은 재빨리 그것들을 서랍에 숨겨두고 샤워를 하러 갔다. 덕분에 마음까지 개운해져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에 들어섰다.

"보아하니 기분은 완전히 풀린 모양이네?"

"아, 선배."

슌이 놀리듯 빙글거리자 아시엘은 헤헤 웃으며 쑥쓰럽게 볼을 긁적였다.

"다 보고 계셨어요?"

"로비 한가운데서 그렇게 소란을 떠는데 당연하지."

슌은 그의 이마에 대고 장난스럽게 손가락을 틱, 튕기고는 몸을 빙글 돌려 자신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난데없이 얻어맞은 아시엘 역시 툴툴거리면서도 의자를 끌어당겨 그와 마주앉아 덜 마른 머리칼을 수건으로 탈탈 털기 시작했다.

"오늘도 공부하다 잘거야?"

"네.. 뭐. 할게 좀 있어서요."

오늘 도서관에서 봤던 것들을 대충이나마 정리해 두고 잘 생각이었다. 슌은 그렇구나- 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끝으로 대화가 잠시 끊어졌다. 생각에 잠긴 듯한 그를 내버려두고 아시엘은 자신의 침대에 아무렇게나 던져놨던 제복 코트를 집어들었다. 그런데, 부시럭- 그의 예민한 귀에 코트의 주머니에서 종이가 마찰하는 소리가 잡혔다.

"응?"

그는 의아해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까슬한 종이 뭉치가 만져졌다. 아아, 그때- 아시엘은 도서관에서 얼결에 주머니에 쑤셔넣었던 종이들을 기억해냈다.

그가 그것을 꺼내려는 찰나, 다시 슌이 특유의 나긋나긋할 음성으로 입술을 뗐다.

"기분이 나아졌다니 다행이네."

아시엘은 주머니에서 손을 떼고 그를 바라보았다. 슌의 시선은 그에게 닿아 있었지만 아시엘은 그가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쩐지 풀린 것같은 슌의 눈동자는 그의 너머에 있는 다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순간에 불과했다. 슌은 다시 씨익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당히 하고 일찍 자. 난 씻고 올 테니까.. 네 덕분에 나까지 수면부족이라고."

"아... 네."

착각이었나, 아시엘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가 귀여웠는지 슌은 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고는 방을 나갔다.

쿵, 문이 부드럽게 닫히고 혼자 남은 아시엘은 그의 손이 닿았던 곳을 매만졌다. 여기저기에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사람은 많았지만 슌으로부터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 것과 마찬가지로 썩 나쁘지 않았다. 어색하긴 했지만 어쨌든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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