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45. 황실 전용 도서관(3)
잠겨있던 서고 안에 있는 책들은 종류별로 나눠지지 않고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었다. 흑마법에 관련된 서적들도 여러권 보였고 골렘과 같이 금지된 마법에 대해 저술해 놓은 듯한 책들도 있었다. 간간히 루이스가 가지고 있던 것들도 눈에 들어와 아시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저씨는 여기에 한번도 안 들어와 보셨나?"
아니면 줄곧 궁 밖에서 지내는 바람에 와볼 수가 없었던 것일까. 그는 음- 하는 소리를 내며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루이스의 10년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니었다. 그가 가진 것들 중에는 이곳에 없는 것들도 많았으니까. 그리고 동시에 그에게 없던 책들 역시 이곳에 있었다.
"어찌됐든 큰 소득이네."
아시엘은 조용히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책들을 죽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흑마법에 관련된 것들 중 처음 보는 서적들만 뽑아 한쪽 구석에 차곡차곡 모아둔 뒤 그 옆에 주저앉았다.그리고는 주머니에서 휴대용 회중시계를 꺼내 책꽂이에 받쳐 잘 세워두고, 본격적으로 책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전하? 죄송하지만 수업에 집중해 주시겠습니까?"
멍하니 앉아있던 유트리안은 옆에 앉은 교사의 조심스러운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미안하군. 잠시 다른 생각을 했다."
"아.. 그러면 수업을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유트리안은 그러라는 의미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시 수업이 이어졌지만 그의 머릿속은 여전히 다른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석, 정말로 얌전히 있는 건가?'
그래도 앞뒤는 아는것 같네, 유트리안은 묘하게 흡족해졌다. 세상에 그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반항의 끝을 달리는 그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라고 유트리안은 생각했다.(정확히는 착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시엘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16살 이랬던가, 어리기도 어리지만 그 또래 소년들과 비교해도 그는 작고 여리여리하게 보였다. 호위기사라고 하지만 누군가를 지키기는 커녕 외려 누군가가 위험에서 지켜줘야 마땅할것 같았다.
'그냥 마검사라고 다짜고짜 기사단에 집어넣은거 아냐?'
마법은 진짜였고- 하지만 검을 배우는 사람이 다 소드마스터가 아니듯, 마검사라고 전부 다 강한 것은 아닐터였다. 이제 겨우 초입일 뿐인 소년을 다른 곳에서 채가기 전에 데려온 것일지도.
아카데미 수석이라는 건, 단순히 공부를 잘했다는 것일 뿐이라고 유트리안은 생각했다. 머리는 좋아 보이니까 성적은 최고였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열심히 속으로 아시엘을 깎아내리고 있었지만 여전히 가슴 한구석이 찜찜한건 없어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수업에 몰두하고 있는 교사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 그런데, 조금 일찍 끝내 주면 고맙겠군."
"그건 안 됩니다. 황제폐하께서 수업시간 만큼은 꼭 지키라는 엄명을 내리셨거든요."
쳇, 유트리안은 작게 혀를 찼다. 설마 두 시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으려고. 애써 그렇게 자신을 달랜 그는 다시 수업에 집중했다.
"......"
아시엘은 숨도 쉬지 않고 책을 읽어내려갔다. 가슴이 쿵쿵 뛰고 있었다. 대부분은 루이스에게서 들은 내용들과 비슷헸지만 더 자세한 내용들이 실려 있었다. 소환진을 그리는 법, 마족과의 계약 후 힘을 쓰는 방법까지. 중요한 알맹이는 이곳에 모여 있었다.
그 중에서 그는 눈에 띄는 구절 하나를 찾아냈다.
'마족들은 각자 하나씩 독특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가문과도 관련이 있다. 타인을 홀리는 서큐버스 종족의 피가 섞인 집안의 마족은 정신계 능력을, 연구자 집안 출신의 마족은 정보 수집에 도움되는 공간계 능력을. 기타 다른 마족들도 마찬가지이다. 그 능력은 고위 마족일수록 힘이 강해진다.'
능력에 대한 것은 루이스에게 대충 들었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가문이라니 처음 보는 이야기였다. 아시엘은 책을 내려놓고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일단 마족 사회의 계급은 오로지 힘으로서 정해진다. 그것이 그들의 전통인듯 했다. 가장 강력한 마족만이 왕이 될 수 있었다. 전대 왕의 아들이라도 약하다면 죽임을 당했고, 왕가와 아무련 관련이 없다 해도 마왕에게 도전해 승리한다면 차기 마왕이 되었다.
그들의 강함에는 특유의 마력 뿐만이 아니라 고유 능력도 존재했다. 그것은 선천적인 것이고, 전투 적합형과 실용형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마족들 마음.
막장이면서도 묘하게 합리적인 사회라고, 아시엘은 생각했다.개인의 능력에 따라 지위가 결정되고 혈통과는 관계 없이 인정받을수 있는 무법자의 세계.
'물론 잔혹한 그 방식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들에게도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차이는 발생할 테지만 그렇다고 천한 출신이라는 이유로 처음부터 배제받는 일은 없을듯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난."
아시엘은 세차게 도리질을 하고 다시 책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빠르게 눈을 움직여 대충 내용을 훑었다. 평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은 시간이 촉박하니 일단 알고 있는 내용은 과감하게 지나치기로 했다.
휙휙 책장을 넘기던 그는 다시 한 부분에서 손을 멈췄다. 책의 앞부분이 마족에 대한 설명이었다면 이곳부터는 계약에 대한 이야기인듯 했다.
아시엘은 흘러내리는 금발을 대충 귀 뒤로 넘기고 꼼꼼히 글씨를 읽기 시작했다.
'어느 마법사와 계약한 마족의 말에 따르면, 인간은 단 한명의 마족과 계약할 수 있지만 일단 계약 후 지상계로 나온 마족은 자신과 계약한 마법사 외의 다른 사람에들게도 마력을 빌려주는 형식으로 임시 계약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정식으로 흑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마족의 힘을 빌린 인간은 원래 자신의 능력치보다 몇 단계 높은 힘을 끌어낼 수 있다. 그것은 무력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학자는 자신이 파고드는 연구에 대해 더 빨리 성취를 얻을 수 있었고 상인은 자신 안에 내재된 감각을 십분 발휘해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 있다.'
"말이 돼?"
아시엘은 저도 모르게 어이없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솔직히 이 정도면 사기였다. 아니, 이미 사기에 가까운 일들이 많이 벌어졌지만 이건 정말 말도 안 돼는 일이었다.
문득 예전 파티장에서 게르만과 스치듯 마주쳤을때 느꼈던 이상한 마력이 떠올랐다. 그것은 캐롤에게 맡겨둔 구슬에서 스며나오던 것과 같은 마력이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아시엘은 다시 아! 하고 자신의 이마를 탁 쳤다.
"벨킨 선배한테서 구슬 돌려받는다는 걸 깜빡했잖아! 으아악! 바보! 멍청이! 얼간이!"
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버둥거렸다. 캐롤 교수를 만나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으니 그럴 겨를이 없었다고는 해도 그걸 이제 와서 떠올린 자신이 한심했다.
한참동안 혼자 몸부림치던 그는 곧 헉헉거리며 움직임을 멈췄다. 결 좋은 금발은 산발이 되어 제멋대로 뻗쳐 있었다.
"뭐.. 급한 건 아니니까 괜찮을 거야. 벨킨 선배도 바빠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을 거고."
사실 상황 자체가 아이러니했다. 구슬들과 갑자기 출몰한 괴물들 덕분에 흑마법에 가장 가까이 갔던 셀레니스 기사단은 그 정체도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반 단원들은 특유의 소탈함으로 구슬에 대한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린듯 했고- 너무 바빠서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루이카엔과 아델레트, 제르닌은 처음에 캐롤에게 구슬을 맡겼다는것만 밑고 역시 기억 저편으로 밀어둔것 같았다.
하긴 조사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다른 곳에다 눈을 돌리기에는 그들은 너무 바빴다.
우연일까, 아니면-
아시엘은 거기에서 생각을 멈췄다. 성급하게 깊이 들어가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다른 책을 집어들었다. 그런데 그때, 툭.
"어?"
아시엘은 책 사이에서 떨어진 낡은 종이뭉치를 주워들었다. 누렇게 변색된 양피지에 손수 글자를 써넣은것 같았다.
"뭐지?"
그는 고개를 갸웃하고 종이를 펼쳤다. 무슨 명단 같이 이름이 죽 적혀있는 옆에 짤막한 문장들이 덧붙여져 있었다. 아시엘은 자세히 그것을 자세히 보려고 책을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는 문득 쎄한 느낌에 고개를 들어 얌전히 세워둔 회중시계에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
그는 기겁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시계바늘은 유트리안이 말한 2시간 반에서 벌써 3분 남짓밖에 남지 않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쳇! 귀찮게 하네, 정말."
아시엘은 거칠게 툭 내뱉고 허둥지둥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책을 한꺼번에 들어 서가의 빈 자리에 한데 꽂고 시계를 챙겼다. 그 와중에, 소년의 손에 들려 있던 종이뭉치도 함께 주머니에 쑤셔넣어졌다.
대충 정리가 끝나자마자 아시엘은 주위를 한번 빙 살폈다. 누군가가 왔었다는 흔적은 어쩔 수 없지만 무엇을 조사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제서야 안심한 그는 곧장 바깥으로 튀어나갔다. 불호령 따위는 전혀 두렵지 않지만 시시콜콜 따지며 시끄럽게 구는 사람은 매우 귀찮아하는 아시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