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41. 개와 고양이(3)
아시엘이 나간 후, 다시 둘만이 남은 자리. 페이튼을 시켜 차를 한 잔 더 가져오게 한 파슬렌 공작은 눈가에 부드러운 주름을 만들었다.
"그 꼬마가 상당히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폐하. 일부러 그런 일까지 시키시다니."
"먼저 말을 꺼내신건 장인이십니다. 같이 붙여 놓으면 유트리안에게 좋을 거라고."
라이펜은 우적우적 씹던 과자를 꿀꺽 삼키고 대꾸했다. 약간 부스러기가 묻은 볼을 툭툭 턴 그는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공작에게 빙그레 웃어보였다.
"지금 제가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무슨 의도로 일부러 저 소년을 황자 전하의 곁에 두려고 하시는지 조금 궁금합니다. 제가 제안드렸을 때, 당신의 뜻에 맞지 않았다면 곧바로 거절하셨겠지요."
파슬렌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럴 줄 알았다는듯 킥킥 소리를 낸 라이펜은 장난스럽게 손가락을 팅, 튕겼다.
"물론 내 아들도 중요하지만, 친구의 아들도 무시할 수는 없죠. 그래서 고민했는데 어리석긴 하지만 이 방법이 제일 쉽고 간편한것 같았습니다."
"무슨 뜻인지, 이 늙은이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음.. 간단히 말하자면 두 녀석 다에게 사탕 하나씩을 쥐어주고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 넣는다는 거죠."
그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공작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을 본 라이펜은 마냥 이 상황이 재미있는지 싱글벙글 미소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성질만 더럽지, 존재감이 약해 입지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유트와 뜻하지 않게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 적의 관심을 받고 있는 아시엘.. 둘 다 불안정하기 그지없는 상황이니까 말입니다."
실제로 제국이 두 조각으로 갈라진 상황에서 제대로 태자 책봉도 받지 못한 유트리안은 귀족들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치하자니 혹시라도 나중에 성장하게 되면 대공 측에는 방해가 되고, 만약 잃게 된다면 황제파 측이 곤란해질 터였다. 말하자면 어중간한 곳에 박혀있는 돌과 비슷한 처지였다.
아시엘은 그와 정 반대였다. 아직 풋내기 기사일 뿐이지만 마검사라는 희귀한 인재이기도 하고 지난번 대전회의때 참석한 이후로 여러모로 과한 이목이 쏠리고 있었다. 그와는 관련 없이 대공, 슈베이만의 시선 역시 닿고 닿고 있었다.
"본인들은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요. 유트리안은 제 문제를 해결하기엔 너무 철이 없고, 아시엘은 아직 어리고- 다른 일들 덕분에 그런 곳까지 신경을 쓰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같이 구덩이에 밀어넣고 둘이 알아서 기어나오라, 이것입니까? 그런 상황에서는 서로에게 독이 될 수도 있고 약이 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공작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끼어들자 라이펜은 유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다 죽을지도 모르고 둘다 살지도 모르죠. 어쩌겠습니까, 자기네들 운인걸."
"제 눈에는 단순히 폐하께서 직접 해결하려니 귀찮아서 떠넘긴 것으로 보입니다만. 제가 루이스 경이라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파슬렌이 장난스럽게 하는 말에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문제입니까. 저도 유트를 굉장히 아끼는 아버지인데요. 그녀석들이라면 알아서 잘 하겠지요."
"뭐.. 제가 참견할 일은 아닙니다만 옆에서 구경하는 것은 꽤 재미있겠군요."
공작은 멋들어진 수염을 쓰다듬으며 입꼬리를 부드럽게 휘었다.
"같은 구덩이에 빠진다고 개와 고양이가 협력할지."
"정 안된다면 서로의 꼬리를 잡아 물고라도 탈츨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아시엘 쪽이 더 고생하겠지만 말입니다."
라이펜은 의차에 팔을 걸치고 게으른 숫사자처럼 턱을 괴고 키득거렸다.
"뭐, 도서관 출입증 정도면 싼 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유트의 곁에 있어준다면, 난 아마 녀석을 꽤 오랫동안 부려먹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황자와 세트로 엮인다면 그래도 자리가 조금 안정될 테니까요."
"그건 아시엘 경에게 있어서는 꽤 큰 불행일듯 싶습니다만."
공작 역시 농담조로 툭 내뱉고는 작게 웃으며 거의 다 비어가는 찻잔을 들어올렸다.
"당분간 유트리안 황자 전하의 호위를 맡게 됐어요."
아시엘이 돌아오자마자 한바탕 따지려 방까지 따라들어온 기사들은 그가 툭 내뱉은 한마디에 합죽이가 된듯 입을 다물었다. 아시엘은 금방이라도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릴것 같던 선배들이 단숨에 태도를 바꿔 측은한 시선을 보내오자 어이가 없어졌다.
"너무 그러지 말아요. 안 그래도 서러운데 더 불쌍해지는것 같잖아요."
".. 힘내라. 인생은 기니까 이 시련도 금세 지나갈 거야."
오스카는 눈물을 훔치는 시늉까지 하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쭈그리고 앉아 주섬주섬 단검을 챙기던 아시엘은 눈을 사납게 치떴다.
"솔직하게 말해요. 지금 고소하다고 생각하고 있죠?"
"야, 야. 그럴 리가 있냐? 이건 야설 몇 권이랑 비교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그 황자 전하의 호위라니.. 거기다가 교육까지 시키라고? 나같으면 기사단 때려치우고 말겠다!"
케빈이 흥분하며 다다다 쏟아내는 말에 섞인 이상한 단어를 잡아낸 아시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야설이요?"
"아..아하하하."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어색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그에게 주위의 사나운 시선이 꽂혔다. 그때 묵묵히 있던 카이스가 입을 열어 주위를 환기시켰다.
"그것보다 황자 전하의 호위라면... 너 혼자? 위험하지 않아?"
"맞아요. 황궁 분위기 상 암살자의 습격도 잦은 편이니까요. 괜찮겠어요?"
베르칸까지 걱정스럽게 거들고 나서자 아시엘은 음-하고 고개를 잠시 갸웃했다.
"괜찮지 않아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경비병들도 많으니까요. 다 믿을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 끝낼 문제가 아닌 것 같아."
갑작스러운 루이카엔의 말에 그는 의아하게 눈을 깜빡였다. 오늘도 아델레트의 눈을 피해 집무실을 탈출해 아시엘의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단장은 찜찜하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물론 네 능력도 출중하고 루이스 경이라는 배경도 있지만. 왜 하필 너야? 아직 경험도 얼마 없잖아."
"호위라고 해도 정식 호위기사로 임명된 것도 아니고 그저 같이 다니면서 여러모로 도와주라는 것 뿐이니까요. 아무래도 제 오지랖이 한몫 하고 일거리를 가지고 왔나 봐요..."
아시엘은 갑자기 우울해져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 그냥 전하가 나무 위에서 쩔쩔매고 있을 때 모르는 척하고 지나칠걸 그랬어요."
"하하.."
루이카엔은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아시엘은 삽만 있다면 땅을 파고 들어갈 기세로 울적하게 끙끙거리다 결국 어쩔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이만 가봐야겠어요. 검만 챙겨서 바로 황자님 궁으로 가라고 하셨거든요."
"수고해라. 맛있는거 준비해놓고 기다릴게."
곁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슌이 그렇게 말하자 카이스, 루이카엔, 베르칸과 벨킨을 비롯한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관으로 걸어들어가는 기분이 들었지만 아시엘은 억지로 얼굴근육을 움직여 미소지었다.
"일단.. 다녀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