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40. 개와 고양이(2)
"하아아.."
정말, 진짜로 들어가기 싫다. 황제의 집무실 앞에 선 아시엘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이상하다는듯 바라보던 경비병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아르셰인 경, 들어가지 않으실 겁니까? 안에 고해 드릴까요?"
"아..."
아시엘은 애매하게 웃었다. 들어가야 하는데 들어가기 싫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개길 수도 없는 노릇이니-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경비병이 수정구에 대고 안의 라이펜에게 연락하자 곧바로 들어오라는 답이 돌아왔다. 무거운 문이 열리고 아시엘은 그보다 더 무거운 걸음으로 안에 발을 들였다.
쩗은 복도를 지나 문을 하나 더 열자, 이제는 익숙해진 집무실 소파의 상석에 앉아있는 라이펜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손님용 자리에는 놀랍게도 파슬렌 공작이 느긋하게 차를 들고 있었다.
".. 아시엘 아르셰인이 폐하를 뵙습니다."
"에이, 딱딱하게 굴지마. 사적으로 부른 거니까.뭣보다 안 어울려."
그가 일단 예를 취하자 라이펜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파슬렌 공작은 잔을 내려놓고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오랜만이군, 자네. 그것보다 얼굴에 불만이 가득 차 있는걸로 보이는데?"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님. 그냥 아시엘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리고 집무실에 따로 불려올 때마다 좋은 일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 얼굴이 좋을 리 없죠."
아시엘이 한 단어에 일부러 힘을 줘 하는 말에 라이펜은 뻔뻔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뭘 했다고. 그냥 기사로서 할 일을 시켰을 뿐인데, 뭐."
"그 말, 가슴에 손을 얹고 다시 생각해 보세요."
그가 냉랭하게 대꾸하자 그래도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황제는 하하하, 어색하게 웃음을 터뜨리고 급하게 화제를 바꿨다.
"일단 와서 앉아. 따로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으니까."
"부탁.. 이요?"
아시엘은 살짝 눈썹을 휘고 고개를 갸웃했다. 예감이 좋지 못했지만 그는 일단 라이펜이 가리키는 자리에 얌전히 앉았다. 라이펜은 잠시 뜸을 들이다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등을 소파에 푹 기댔다.
"너한테 특별 임무를 주지."
"네?"
아시엘은 이번에야말로 불안감이 엄습해오는 것을 느꼈다. 저 미소, 저 의기양양한 모습 뒤에는 분명히 무언가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는 이번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너. 유트리안의 호위기사로 임명한다."
"거절합니다."
생글 미소지으며 아시엘이 뱉어낸 망설임 따윈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린 듯한 대꾸에,그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파슬렌 공작이 쿨럭, 기침을 토해냈다. 라이펜 역시 아연하게 그를 바라보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야, 야! 얘기라도 끝까지 들어. 그냥 하라는 게 아니야. 파견이나 장거리 임무는 그대로 가고, 궁에 있을 때만 녀석의 옆에 있어달라고. 겸사겸사 검도 좀 가르쳐 주고."
"폐하도 아시다시피 전 마검사라 검술은 정통법이 아니고 저한테 맞춰진 아류에요. 그런데 검을 가르치라니, 말도 안 돼요. 검이라면 루이카엔 씨나 제르닌 선배, 아니면 카이스 쪽이 낫잖아요."
아시엘은 억울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따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라이펜은 다시 빙글빙글 웃으며 느긋하게 답했다.
"공작님한테 들었어. 너, 유트리안이랑 만났었다며? 한바탕 했다지."
"....윽. 그걸 알면서도 왜 절 부르신 거냐구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황제는 씨익 짖궂은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당연히- 재밌으니까."
"......."
아시엘은 의기양양해 하는 그에게 노골적으로 어이없다는 시선을 보냈다. 잠자코 있던 파슬렌 공작이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킥킥거리기 시작하자 라이펜은 조금 민망해졌는지 흠, 흠 하고 헛기침을 두어 번 내뱉았다.
"농담이니까 그렇게 보지 마."
"그럼 빨리 제대로 말씀해 주시던가요."
"알았어, 알았어."
결국 아시엘이 짜증스럽게 눈살을 찌푸리고 나서야 그는 항복한다는듯 가볍게 두 손을 들어보였다. 라이펜은 잠시 말을 고르며 눈동자를 데루룩 굴리다 입을 열었다.
"솔직히, 유트 녀석은 이변만 생기지 않는다면 다음 황제가 될 불운한 놈이지. 하지만 여러가지 상황 때문에 태자로 책봉하지도 못하고 제왕에게 필요한 것들을 가르치지도 못하고 있어."
여러가지 상황- 대공이 황제 자리를 노리고, 그 영향력 역시 작지 않아 세튼이 사실상 양쪽으로 쪼개져있는 지금의 현실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유트리안을 태자로 책봉하거나 제왕학 교육을 시킨다면 대공파 귀족들이 반발하고 나설 수도 있었다.
물론 대놓고 반대하지는 않을 테지만 아직 이르다, 아직 그가 황제감이 되지 못한다는 갖가지의 이유를 대고 시끄럽게 군다면 당연히 황제파 귀족들 역시 그에 맞서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제국의 정치는 쑥대밭이 될 것이 뻔했다.
"거기다 누굴 닮았는지 고집스럽고 제멋대로지. 덕분에 붙여줬던 스승들도 며칠만에 두손 두발 다 들어버리고. 달에 한번씩은 꼭 암살자의 위협을 받기도 해.. 그것 때문에 더 삐뚤어진 것 같기도 하지만."
"아..."
그의 얼굴에 스쳐지나가는 씁쓸한 미소에 아시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펜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말을 이었다.
"옛날에는 그 녀석의 유일무이한 친구가 암살자한테 죽어버린 일도 있었지. 녀석을 지키려다가. 그 뒤로 유트는 아무도 옆에 두려고 하질 않아. 그것 때문에 무슨 문제가 생길지는 너도 잘 알겠지?"
"뭐.. 인간적인 이유로는 황자 전하가 고독해졌다는 것일 테고, 정치적인 이유로는 세력을 만들지 못한다는 거겠네요."
"정답!"
짝, 손바닥을 맞부딪히며 라이펜은 다시 유쾌하게 웃었다.
"그래서 네가 적임자라는 거야."
"그래서, 라니.. 아무것도 모르겠는데요?"
아시엘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자 황제는 음- 하고 뒷머리를 긁적이다 검지를 척, 세웠다.
"내 최측근이자 제국 최강의 소드마스터로 선망받아 정치적 입지가 단단한 루이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양아들이고 쉽게 사람들과 어울릴수 있는 친화력을 가지고 있지."
"....."
"거기다 강하니까 유트리안을 확실하게 지켜낼 수 있고 죽어버릴 일도 없어.나이도 비슷하겠다, 딱 좋잖아?"
라이펜은 킥 웃음을 터뜨렸다.
"거기다 성질 더러운 그 녀석한테 훈계를 늘어놓을 만큼 간덩이가 크고. 사실 그게 제일 중요하지. 딴 놈들은 귀찮아서라도 안 건들이거든."
아시엘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짧게 물었다.
"거부권은?"
"없어. 이건 명령이야, 비공식적이지만."
단호한 라이펜의 말을 끝으로 집무실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잠시 후, 아시엘은 체념한듯 손으로 이마를 턱 짚었다.
"하아.... 이럴 줄 알았어요. 역시 여긴 올 곳이 못 된다니까."
"어허, 다른 기사들이 들으면 난리가 날 소리로군. 한번만이라도 황제를 만나기를 소망하는 기사들이 얼마나 많은데."
파슬렌 공작은 연신 재미있다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시엘은 부루퉁한 얼굴로 잠시 그를 바라보다, 곧 고개를 바짝 들고 라이펜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제 부탁도 들어주세요."
"뭐?"
의외의 말에 라이펜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아시엘은 불만을 가득 담은 새빨간 눈동자를 데굴 굴리다 씨익 미소지었다.
"황실 전용 도서관 자유 출입권. 이 정도로 퉁쳐 드릴게요."
"....뭐?"
황제는 황당해져 한번 더 되물었다. 공작 역시 예상하지 못한 조건이 튀어나오자 빙글거리는 것을 멈추고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황실 전용 도서관- 그 곳은 귀족들도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 거기에 발을 들일 수 있는 것은 세튼의 성을 가진 이들과 황제나 대공의 허가를 받은 사람들 뿐이었다.
잠시 후,겨우겨우 정신을 추스린 라이펜은 한숨을 내쉬며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왜?"
"지식을 쌓기 위해서, 라고 하죠 뭐."
아시엘의 뻔뻔한 말에 라이펜은 하,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싫다고 하면, 명령을 거부할 건가?"
"그럴 수 없다는 건 폐하께서 더 잘 아실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소년은 일부러 뜸을 들이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하게 말을 이었다.
"억지로 여장시켰던 일이라던가, 대전회의에서의 일이라던가, 그 외 기타등등. 전부 다 루이스 아저씨한테 이를 거에요."
"......"
미소짓는 그 얼굴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웠지만 왜일까, 라이펜과 파슬렌 공작은 순간 그의 뒤에 도사리고 있는 악마를 본 것같은 착각이 들었다.
치사하다, 하고 외치고 싶은 것을 꾹 눌러담은 라이펜은 미간을 주물렀다.
"... 그거면 되냐?"
"물론이죠."
아시엘은 싱글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주먹만한 어린 기사가 황제를 협박하는 장면을 황당하게 지켜보던 파슬렌은 곧 푸하하하- 하고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역시 재미있군! 폐하께서 꼼짝을 못하시다니."
"재미있다니요,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라이펜은 끙, 소리를 내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는 조금 사나워진 눈매로 아시엘에게 시선을 주었다.
"너. 확실하게 사람 만들어 놔, 그 녀석."
"최선을 다 할게요, 폐하."
키득키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