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31. 새로운 관계(3)
"..표정이 왜 그러지?"
아시엘의 얼굴에서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낀 유트리안은 정말로 모르겠다는듯 고개를 갸웃했다. 슬쩍 시선을위로 올려 그의 악의 없는 금색 눈동자를 곁눈질한 아시엘은 곧 하아아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썩을 황제 폐하가 어디서 소문을 주워듣고 장난삼아 아들에게 전해 준 것일 터였다. 거기다 처음 만났을 때 여장을 하고 있었으니 착각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겨우겨우 치밀어오르는 화를 눌러담은 아시엘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황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 번만 말 할 테니까 잘 들어 주세요."
"뭘?"
활활 타오르는것 같은 그의 붉은색 눈동자에 유트리안은 움찔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아시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첫번째, 전 남자입니다. 파티장에서는 사정이 있어서 폐하의 명령으로 여장을 한 것 뿐이에요. 두번째, 루이스 아저씨는 변태가 아니거든요? 우연히 거리에서 떠돌던 절 데려와주신 거지. 그리고 세번째!"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아시엘의 말이 끝에 강세를 주며 끊어지자, 유트리안은 한번 더 몸을 움찔했다.
"처음은 아니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상대에게 그런 언동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친아버지는 아니지만, 일단 그 분은 제 은인이세요. 그런 식의 말씀은 곤란합니다."
드디어 긴 말이 끝나자, 황자는 멍한 눈으로 아시엘을 내려다보았다. 살면서 이런 식으로 책망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아시엘은 여전히 당당하고 도발적인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유트리안은 돌연 기분이 나빠져얼굴을 확 찌푸렸다.
"건방지군. 누구 앞이라고 이렇게 큰 소리를 치는 거지?"
"누구 앞이긴요, 세튼 제국의 제 1황자 되시는 유트리안 디아란 세튼 전하 앞이죠."
유트리안은 다시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건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저 작은 몸 어디에서 이런 박력이 나오는지, 까딱하다간 기싸움에서 밀려버릴 것 같았다.
"그래, 일단 앞에 말은 내가 잘못했다 쳐. 그런데 네가 진짜 남자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누가 믿을 것 같아?"
"이렇게 생긴 남자라 죄송하네요!"
아시엘이 소리를 빽 지르는 것을 마지막으로, 일단 두 사람의 다툼은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숨을 씨근덕거리며 유트리안은 새삼 눈앞의 아시엘을 살폈다. 잔뜩 골이 난 듯 하얀 미간에 주름이 져 있었다. 그제서야 소녀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는 점들이 그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확실히, 조금 실례였던 건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유트리안이었지만 곧 다시 팍 인상을 구겼다. 자존심이 상한 것이었다.
"그건 그렇고, 네놈은 간이 부어서 배 밖으로 튀어나오기라도 했나? 어이가 없군. 장차 너희들의 주인이 될 사람이 바로 나란 걸 잊지는 않았겠지."
"걱정 마세요. 그때 되서 아무리 들들 볶아대셔도 지금 폐하보다 더하기야 하겠어요?"
아시엘은 지지 않고 대꾸했다. 그 역시 슬슬 머리에 열이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전하를 모시게 될 사람으로서 먼저 물어보겠습니다만- 수행원들은 어디에 두신 거에요? 왜 혼자 계시냐고요."
"따돌렸다, 왜! 불만 있냐?"
결국 유트리안은 체통도 뭐고 다 잊어버리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아시엘에게서 돌아온 것은 더 크게 터져나온 호통이었다.
"정신이 있어요? 호위들까지 따돌리면 어쩌란 거에요! 언제 어디에서 암살자가 나타날지도 모르는데."
"나도 알아! 무슨 참견이야?"
"안다면서 그런다는 건, 죽고 싶다는 거죠?"
순간 유트리안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어진 것이었다. 아시엘은 여전히 화가 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전하께서 이렇게 혼자 행동하다가 습격이라도 받으면요? 목숨을 위협받는다는 건 둘째 쳐요. 이때까지 전하를 지키느라 개고생한 사람들은요? 당신의 몸에 생채기 하나라도 나면 곧장 일자리를 잃거나, 무거운 처벌을 받게 될 텐데.
물론 그런 것도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있어요. 하지만 제국이 둘로 갈라져 있는 지금 상황에 전하의 존재 하나로 겨우 잡혀 있는 균형이 휘청거릴지도 몰라요. 그래도 괜찮다는 말씀이세요?"
"...그래도 답답한걸 나보고 어쩌라고! 아무것도 못 해, 혼자서는. 언제 어디서든지 사람들이 따라붙는데 네가 그 기분을 알아?"
"어리광 부리지 마세요!"
아시엘이 거세게 외치자, 그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정말로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는지 아시엘은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사람마다 책임이라는 게 있잖아요. 전하의 첫번째 책임은 훗날 제국을 이끌어 갈 사람으로서 그 자리에 있는 거에요. 어떻게든 목숨을 지키면서! 그리고 우리의 의무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폐하와 전하를 지키는 거에요.
지켜지고 싶지 않다면 스스로를 지킬 힘을 기르면 되잖아요. 그런데 전하의 손은 깨끗해요. 검 한 번 잡아본 적없는 손이에요. 결국 노력도 해 보지 않았다는 것 아니에요?"
"닥쳐!"
유트리안은 버럭 고함을 쳐 그의 말을 막았다. 라이펜을 닮은 듯 닮지 않은 금색 눈동자가 분노에 가득 차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두어 번 심호흡을 한 그는 곧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내뱉았다.
"너, 꺼져. 당장 꺼지라고."
"......."
아시엘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청력을 돋워 주변의 기척을 살폈다. 달리 수상한 기척은 없었고, 멀리서 유트리안을 찾는 시종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리를 따져봤을 때 대략 5분 안에는 하인들이 지금 그들이 여기까지 찾아올 듯 했다.
"안 그러셔도 가야 합니다. 그럼 다음에 뵙죠."
그는 유트리안에게 꾸벅 허리를 숙여보이고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가는 길은 대충 저 시종들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이 철부지 황자님의 소재를 알려줄 김에.
황자는 점점 멀어져가는 아시엘의 등을 사납게 쏘아보았다. 혼자 있다고 길길이 화를 내 놓고는 또 먼저 가버리는 것은 뭔지.
"젠장.."
작게 욕설을 내뱉은 유트리안은 애꿎은 돌맹이를 세게 걷어찼다. 딱, 하는 소리를 내며 나무에 부딪힌 돌은 그대로 툭 바닥에 떨어져버렸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짜증이 치솟았다. 옛날, 그와 비슷한 말로 잔소리를 늘어놓던 소년이 겹쳐 보여서일지도 몰랐다.
"누가 목숨 걸고 지켜달라고 했냐고.."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린 그는 다시 화풀이 삼아 땅의 돌을 걷어찼다.
"다녀왔습니다."
"아. 왔어?"
생활관 문을 밀치고 아시엘이 안으로 들어오자 아델레트의 눈을 피해 살짝 로비에 나와있던 루이카엔이 그를 반겼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무슨 일 있었어?"
"길을 잘 못 들어서 잠깐 유트리안 황자 전하랑 마주쳤어요."
아시엘은 앞머리를 쓸어올리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답지 않게 언성을 높였더니 진이 다 빠지려고 했다. 그의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겨 앉은 루이카엔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알 만 하네. 전하도 한 성깔 하시니 곱게 보내줬을 리는 없고. 너도 그냥 넘어갈 녀석이 아니니까 한 판 한거지?"
"거하게 했어요. 지금 생각하니까 제가 좀 심했던 것 같지만요."
아시엘은 꿍얼거리듯 말했다. 그 모습이 우스웠던지 루이카엔은 쿡쿡 소리를 내며 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고 몸을 일으켰다.
"그럼 가 볼까?"
"어딜요?"
아시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말에 그는 잊었냐는듯 어깨를 으쓱했다.
"대련하자면서. 아델레트랑 제르닌이 없는 지금이 기회잖아."
"..하긴, 그렇네요."
결국 아시엘 역시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대충 예상했던 대로 그의 기분이 어느정도 나아지자 루이카엔은 킥킥 소리를 내며 아직까지 앉아있는 소년에게 손을 뻗었다. 아시엘은 단장을 따라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 울퉁불퉁한 손을 잡고 끙차,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