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41화 (141/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28. 흔적(2)

호위병이나 수행원 하나 없이 슈베이만이 향한 곳은 바로 세튼 제국의 황제와 그 식솔들만을 위한 정원이었다. 황성의 한 켠 비밀스러운 곳에 자리잡고 있는 그 곳은 사시사철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도록 전속 마법사와 정원사가 특별히 관리해오고 있었다.

"이런, 먼저 와 계셨습니까."

대공은 대리석 테이블에 앉아 홀로 경치를 감상 중인 황제에게 다가갔다. 라이펜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반대쪽의 의자를 가리켰다.

"저쪽에 앉으시죠, 형님."

슈베이만은 말없이 고개만 꾸벅 숙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하인과 하녀들이 차와 쿠키, 케이크를 내왔다. 그들이 조용히 물러나자 라이펜은 여유롭게 찻잔을 들어올렸다.

"안심하세요. 독 같은 건 전혀 타지 앉았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폐하. 그런 경솔한 일을 함부로 벌이실 분은 아니지 않습니까."

슈베이만 역시 잔을 들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잠시 입 안에 맴도는 향을 음미하던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제국의 남쪽 지방에서 나는 것입니까? 좋군요."

"마음에 들어하실 줄 알았습니다. 뭐라 해도 형님과 저는 입맛이 비슷하니까요."

라이펜의 느긋한 답에 슈베이만은 일순 움직임을 멈췄다. 하지만 곧 그는 픽 웃음을 터뜨리며 잔을 살짝 내려놓았다. 접시와 컵이 마찰하는 달그락, 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도 셀레니스의 기사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제국을 지켜주시는 폐하와 그들에게는 언제나 감사할 따름입니다."

"제 것을 제가 지킬 뿐입니다. 형님께서 그러실 필요는 없지요."

둘 사이에 대화가 끊겼다. 웃는 낯으로 서로를 마주보며 침묵을 지키는 두 사람 사이에는 살랑이는 바람만이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먼저 시선을 뗀 쪽은 라이펜이었다.

"그러는 형님의 기사단은 요즘 움직임이 뜸하더군요. -도대체 무엇을 꾸미고 계신 겁니까?"

"꾸민다니요. 그들 나름대로 바쁘게 일하고 있습니다."

슈베이만은 차를 한 모급 더 삼켰다. 우아하기 그지없는 몸짓이었지만 그의 차갑게 식은 금안은 동생의 예기 서린 금색 눈동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찻잔을 만지작대던 라이펜은 무엇이 우스운지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무엇이 말입니까?"

"수많은 사람을 죽게 하고, 아까운 인재들의 인생을 구렁텅이로 빠뜨린 정치 분쟁의 시작이 단순한 형제 싸움에 불과하다는 것이요."

아아- 알겠다는듯 슈베이만 역시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웃음기 어린 얼굴로 동생을 똑바로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그랬던가. 솔직히 이제는 별 상관 없어졌으니까."

"일가족이 개죽음을 당한 일이었지만 참 허무하군요.- 아니지. 그 덕분에 황제 자리를 포기하려던 제가 원한을 품게 되고 세튼 제국이 둘로 갈라져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으니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이미 슈베이만의 말에서 존칭이며 존대가 다 사라져 있었지만 라이펜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자조적으로 웃으며 덧붙일 뿐이었다.

"여자 하나 때문에 춤을 추다니, 참 웃기는 제국입니다."

"너와 나도 그렇지, 동생아."

이성 잃은 칼끝에 허망하게 죽어간 그들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고 고스란히 이 제국에 남아있었다. 대공은 의자에 편안히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점점 해가 넘어가고 있는지 한쪽 귀퉁이가 주황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죄라면, 새카만 흑발로 일국의 황태자와 제 1황자를 매혹시켰던 것. 그리고 어리석게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하려 했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피해자- 아찔하도록 아름다운 금발을 가지고 있던 여자.

"그녀의 일도, 저는 물론 잊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루이스 경이 데려온 그 꼬마가 어떤 존재인지도 잘 알텐데. 싸고도는 이유를 모르겠군."

슈베이만은 티스푼으로 설탕을 퍼 차에 넣고 천천히 저었다. 라이펜은 과자 하나를 더 입에 넣고 씨익 입가에 특유의 장난스러운 곡선을 그렸다.

"딱히 이유랄 것은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형님에 대한 심술?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믿는 사람들이 믿으니까요. 그것 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참 무르십니다, 폐하. 형으로서 하나 충고해 드리자면, 당신의 그런 허술함이 큰 화를 부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저에게나 폐하에게나 그 아이는 예측할 수 없는 폭탄같은 존재이지 않습니까."

대공은 다시 원래의 말투로 대답했다. 황제는 그런 형을 웃음기 어린 눈으로 응시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저에겐 아직 그를 내칠 이유가 없으니. 뒷일은 루이스와 루이카엔에게 맡겨야지요."

모두가 잠든 밤. 혼자 깨어 로비의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하던 제르닌은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문가에 기대 선 아시엘이 초췌해진 얼굴로 히족 웃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아-"

제르닌이 놀랄 새도 없이 비척비척 안으로 들어온 그는 곧장 소파에 쓰러져 순식간에 잠들어버렸다. 옆에서 색색 숨을 내뱉기 시작한 아시엘을 황당하게 바라보던 제르닌은 곧 맞은편 소파에 주저앉아버리는 케빈과 카이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루이카엔 역시 아시엘의 옆에 자리를 잡고 몸을 던지듯 착석했다.

그 모습을 보고 도저히 다른 말은 나오지 않아, 제르닌은 결국 이렇게 말했다.

"고생했나 보군."

"말도 마. 몸도 마음도 완전 걸레짝이야."

임무 중에는 아무리 몸을 혹사시켜도 멀쩡하다 정작 생활관으로 돌아오면 뻗어버리는 것은 셀레니스 기사들의 공통점이었다. 특히 이 팀의 인원은 그 정도가 조금 더 심했다. 케빈은 금방이라도 정신을 놓을듯 중얼중얼대기 시작했다.

"나가있는 동안 한숨도 못 잤다고.. 앤.. 앤 어디있어, 내 방에 있지?"

"얼른 들어가서 자. 카이스도 먼저 올라가. 아시엘은 내가 방으로 데려다 놓을 테니까."

제르닌은 쯧, 혀를 차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켜 비틀비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카이스 역시 고개를 꾸벅 숙여보이고는 그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버렸다. 제르닌은 이제 아시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잘도 자는군."

"뭐라해도 이 녀석이 제일 고생했으니까. 여기저기 치인다고 정신 없었어."

루이카엔은 킬킬 웃으며 아시엘의 금발을 살살 쓸어 넘겨주었다.

"원래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웃기는 녀석이라니까."

"너랑 닮아서 그렇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별로. 그냥 괴물을 잡았을 뿐이야. 아시엘은 권위 의식에 쩔어있는 암여우한테 시달렸고."

대충 예상했던 대로 확실하게 돌아오지 않은 답에 제르닌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잠시 그의 눈치를 살피던 루이카엔은 곧 픽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그래서, 넌 어떤데? 일부러 둘만 남겨줬는데 짝사랑에 진전이라도 있어?"

"......뭐? 무슨 헛소리...!"

제르닌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다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아시엘이 깨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루이카엔에게 사나운 시선을 보냈다.

"무슨 짓거리야, 이게."

"화내지 마. 하여튼 너나 아델이나 솔직해지는 게 좋다니까."

"......."

제르닌은 무어라 말하려다 다시 입을 닫고, 다시 무뚝뚝하게 돌아온 얼굴로 크게 한숨만 푹 내쉬었다. 루이카엔은 킥킥 작게 웃고는 몸을 일으키고 그의 어깨를 툭 짚었다.

"형님 들어간다? 우리 깜찍한 아시엘도 잘 부탁한다고."

"형님은 무슨."

제르닌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루이카엔은 손을 휘휘 내저은 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버렸다.

결국 잠든 아시엘과 혼자 남겨져버린 제르닌은, 잠시 멍하니 앉아있다 이마를 턱 짚었다.

"솔직은 무슨.."

들을 사람 없는 투덜거림을 짧게 내뱉은 그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북북 헝클어뜨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