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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36화 (136/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24. 하얀 사냥개(5)

그가 방 안쪽으로 더 들어가자, 바깥의 삭막한 복도에서는 맡을 수 없었던 달콤하고 좋은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외부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던 화려한 장식들과 조각들, 온갖 사치품들이 그림자 속에 잠겨 있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루이카엔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낮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방은 어두웠다. 두터운 커튼이 창문을 가려 밖에서 들어오려는 햇볕을 차단하고 있었다. 내부를 밝히고 있는 것은, 방 한 가운데에 있는 고급 원목 테이블 위에 놓인 화려한 은촛대의 불 뿐이었다.

"괴물을 무사히 퇴치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더 이상 피해가 커지기 전에 막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어차피 저희의 일일 뿐입니다, 부인."

그가 그렇게 대답하자, 페일은 입가에 곡선을 드리우고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어두운 가운데에 은은한 빛에 비춰진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다. 탐스러운 머리칼과 새하얀 피부에 딱 붙는 드레스 아래로 도드라진 몸매까지. 장성한 아들이 셋이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을 정도였다.

"상당히 겸손한 분이시군요, 루이카엔. 드. 카시마엘 경."

"......"

루이카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페일은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장난치듯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다, 살풋 걸음을 옮겨 루이카엔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굽 높은 구두가 부드러운 카펫을 밟았다.

"카시마엘 후작가의 장남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무예가 그 누구보다도 더 출중하신 분이시라는 것 역시."

"......."

"어제는 제가 흥분해서 실례를 범했던것 같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세요."

페일은 또 한 걸음을 옮겼다. 루이카엔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그래서 사죄도 드릴 겸, 감사의 인사도 드릴 겸."

"......"

"제 방으로 와 주십사 한 거에요."

그녀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그에게 다가섰다. 어느새 바로 앞까지 가까이 온 그녀를 내려다보며 루이카엔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시군요."

"그래요. 따로 드리고 싶은 말도.. 있으니까요."

페일은 조금 더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방에 들어올 때부터 나던 좋은 향수 냄새가 더욱 진하게 풍겨왔다. 그녀는 여유롭게 손을 들어올려 루이카엔의 앞섶을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루이카엔은 그런 그녀를 무심한 회색빛 눈동자로 바라보다 곧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따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라... 굉장히 궁금해지는군요."

페일은 소리 없이 웃으며 그를 살짝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루이카엔은 그녀를 뿌리치지 않고 순순히 따라 움직였다. 그녀와 그 사이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이렇게 보니까.. 셀레니스의 단장님은 굉장히 미남이시네요.여성들이 많이 따르겠어요."

"과찬이십니다, 부인."

루이카엔은 작게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페일은 미소짓고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가볍게 잡아 몸을 숙이게 만들었다. 두 사람의 얼굴의 간격이 좁아졌다.

"... 그렇게 말씀하시는 부인도 굉장히 아름다우시군요. 미의 종족이라는 엘프라고 해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루이카엔은 아무런 표정이 보이지 않는 얼굴로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페일은 그런가요? 하고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유혹하듯 속삭였다.

".. 역시 카시마엘 가의 피를 이으신 분. 보는 눈이 다르시네요."

"그렇습니까?"

루이카엔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입가에는 부드러운 곡선이 서렸다. 페일은 키득거리며 그의 몸에서 손을 떼고 빙글 돌아섰다. 검은색의 긴 드레스 자락이 카펫에 끌리자 사락, 하고 천과 천이 스치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루이카엔은 움직이지 않고 그녀를 눈으로 좇았다. 페일은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다시 테이블 쪽으로 가 그 위에 올려져 있던 작은 상자 하나를 들고 그에게로 가져갔다.

"이건 무엇인지."

"제 작은 선물이에요."

루이카엔은 그녀가 내미는 상자를 받았다. 비싼 나무에 일일히 손으로 새긴 듯한 조각들로 장식된, 화려한 물건이었다. 그는 잠시 페일을 응시하다, 곧 한 걸음 뒤로 물러서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는 곧장 작게 탄성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작게 터뜨렸다.

"아..."

"이게 어떤 물건인지, 충분히 아실 거라 생각해요."

페일은 미소지었다. 상자 안에서는 은은한 초록색의 빛이 환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동그랗게 세공된, 스스로 빛을 내는 보석. 야광주였다. 어떤 원리로 빛을 내는지도 제대도 알려지지 않은데다 채굴 과정이 어렵고, 그 빛깔이 신비해 질이 떨어지는것도 한 평민 가정의 한 달 생활비를 훌쩍 넘어가는 가격의 보석이었다. 그런 물건이 고운 쿠션에 싸여 고급스러운 케이스 안에 얌전히 들어가 있었다.

"받아주세요. 완벽한 구형으로 세공된, 최상급의 보석이에요."

"그렇군요."

"대신- 제 부탁 한 가지만 들어주시겠어요?"

페일은 루이카엔 쪽으로 한 걸음 가까이 갔다. 셀레니스의 단장은 바로 가까이에 다가온 그녀의 얼굴을 약간의 웃음기가 담긴 눈으로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아이들. 어머니 된 입장으로, 도저히 보고만 있기가 괴로워서요."

페일은 하얗고 가느다란 팔을 들어 루이카엔의 어깨를 감쌌다. 그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그녀가 하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당신이 떼어놓아 주시겠어요? 카이스를 집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아니면 그 꼬마를 내치던가."

"..... 부인. 부인이 원하시는 건, 그것입니까?"

루이카엔은 입가에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더없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은 그는 한쪽 손으로 페일의 손목을 가볍게 잡고, 나머지 손으로 야광주를 상자에서 조심스럽게 꺼내 눈앞으로 가져갔다.

"..부인. 당신은 카이스에게 들은 것처럼 아름답고, 매혹적이면서-"

그는 페일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고약한 악취가 나는 사람이로군요."

".....!"

순간 섬뜩해지는 느낌에 페일은 재빨리 그의 손에서 팔을 빼내려 몸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강한 악력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루이카엔의 손에 쥐어진 야광주가 쩌쩍, 소리를 내며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곧 쨍그랑! 하고 깨져버렸다.

그 뒤의 일은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났다. 루이카엔은 페일의 손목을 붙잡은 채 그녀를 힘으로 밀어붙였다. 쾅! 벽과 강하게 부딪힌 그녀가 채 제정신을 차리기도 전, 그는 페일에게 얼굴을 바싹 가까이 가져갔다.

"죄송하지만 부인, 저는 저런 차가운 빛을 내는 물건은 전혀 탐이 나지 않습니다."

"....! 당신!"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역겨우니까."

당황과 분노가 섞인 얼굴로 그녀가 외치자, 루이카엔은 싸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의 회색 눈동자는 그 언제도 볼 수 없었던 냉소로 가득 차 있었다.

"아아, 무슨 수를 쓸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천박한 방식일 줄은 예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너무 곧이곧대로라, 웃기다 못해 눈물이 날 지경이군요."

페일은 그에게서 벗어나려 이를 악물고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손목을 잡은 루이카엔의 힘이 더욱 강해져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벽에 등을 붙이고 독기 서린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나에게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해? 기껏 호의를 베풀어 줬더니 주제도 모르고!"

"아하, 그렇다면. 저를 어쩌실 작정이신지."

루이카엔은 빙그레 웃으며 더욱 그녀에게 가까이 붙어섰다. 벽과 그 사이에 갇힌 꼴이 된 페일은 입꼬리를 올려 차갑게 미소지으며 외쳤다.

"내가 대공의 편에 선다면? 메르티스 가는 그렇게 만만한 가문이 아니야. 우리 가문이 황제에게서 등을 돌린 이유가 당신 때문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당신은 과연 그 단장이라는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까?"

"......"

"지금의 황제는 나약해. 우리 세력이 대공 전하 쪽으로 돌아선다면 큰 타격을 입겠지?"

루이카엔이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이겼다고 생각했는지 더욱 큰 소리로 악을 썼다. 잠시 침묵하던 단장은 곧 픽 싸늘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이 당신의 최선입니까?"

"..뭐라고?"

눈썹을 찌푸리며, 페일은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딱딱한 벽에 막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루이카엔은 완전히 그녀에게 몸을 밀착시켜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한낱 백색의 사냥개일 뿐이라. 주인이 없을 때 너무 움직임이 많은 사냥감을 보면 저도 모르게 물어뜯을지도 모릅니다."

".....!"

"그리고 협박의 방식이 잘못되었습니다."

페일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루이카엔은 숨막힐 정도로 조곤조곤하게 말을 이어갔다.

"나에게 저 돌을 쥐어준 건 실수였어. 댁네 아들의 바보같을 정도로 정직하고 우직한 고집이 나한테 옮아 버렸으니까. 그리고 내가 미인계에 넘어갈 거라고 생각한 것도 큰 오산이야.

당신이 엘프만큼 아름답다고 해도 이쪽은 그보다 눈부시고 매력적인 녀석 때문에 눈이 한참이나 높아져 버렸거든."

페일은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느껴지는 것은 일종의 위협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몸이 가늘게 떨리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루이카엔은 그 애처로운 모습을 내려다보며 냉소를 지었다.

"단장이니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 엄청난 착각이야. 난 부하를 둔 적 없어. 내 옆에 있는 녀석들은 지랄맞은 황제한테 같이 시달리는 불쌍한 동지일 뿐이다."

어느새 그는 존대까지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페일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강하게 붙잡혀 점점 아려오는 손목만을 작게 바르르 떠는 것밖에는. 루이카엔은 그녀를 무표정한 얼굴로 응시하다 손아귀의 힘을 풀어주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스륵, 툭. 다리가 풀렸는지 페일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뭐, 대공 전하의 쪽에 서든지 말든지는 알아서 하시죠. 단, 한 가지는 명심하세요. 일단 적으로 간주되는 순간 저희는 곧장 응징을 가할 것입니다."

"아....."

"그게 저희 쪽 기사의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그 정도로 성격이 좋지 못하시니까. 그분이 명하시면 저희는 수행합니다. 그것이 기사도에 어긋나는 일일지라도."

페일은 넋을 잃은듯 떨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루이카엔은 픽 비웃음을 터뜨리고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들은 사냥개니까. 자신의 신분이나 지위, 기사단의 명예같이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이미 진흙탕에 처박아놓은지 오래입니다."

그는 몇 걸음 더 뒤로 물러서 주저앉은 페일을 조롱하는 것처럼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가 폈다.

"그런 쓸데없는 데 목 매고 살기에는 기껏 주어진 인생이 아깝지 않습니까? 이 세상은 생각보다 아름답고, 재미있는 것들이 많거든요."

그리고 루이카엔은 그대로 몸을 빙글 돌려 문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바삭, 파사삭. 깨진 야광주 조각이 그의 발에 밟혀 가루가 되었다.

끼익-쾅! 그가 문을 다소 거칠게 닫고 나가버렸지만 페일은 그대로 석상이 되어버린듯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방 안에 끔찍한 침묵이 감돌기 시작한지 몇 분 후. 그녀는 머리를 감싸쥐고 분에 찬 소리를 질렀다.

"아아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두꺼운 나무문 사이로 새어나갔다. 루이카엔은 걸음을 멈추고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넣고 유유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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