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28화 (128/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17. 그리고 또 다시(3)

한 번 결정된 일들은 루이카엔과 아시엘의 말을 전달받은 키프스의 주도 하에 착착 준비되어 갔다. 그리고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당장이라도 쓸 수 있도록 손질된 엄청난 화살들과 각종 무기들을 바라보며, 케빈은 혀를 내둘렀다.

"장난 아니네, 진짜. 이것들  진짜 추진력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하나만 있어도 그런데 오늘은 같이 있으니까 말이죠."

카이스 역시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들의 옆에서는 동료들이 뭐라고 하든지 아시엘과 루이카엔이 신나게 짝! 하고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었다.

"진짜 최강 콤비네."

"동시에 최악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케빈의 말에 완전히 녹초가 된 키프스가 그렇게 덧붙였다. 이번 일의 가장 큰 희생양은 바로 그였다. 아시엘과 루이카엔 덕분에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명령을 내리고 물품을 공수해 오느라 하루종일 쉴 틈이 없었던 것이었다. 카스란의 곱지 않은 시선은 덤이었다.

"오늘 잘 못 걸려서 고생했네. 그래서 그쪽 형님은 오늘도 전투에 끼어드신대나?"

"아니요. 어제 삔 발목이 안 좋아서 빠진다고 하셨습니다."

키프스는 낡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대꾸했다. 케빈이 양심은 있나 보군, 하고 작게 중얼거렸지만 그에 토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신 아시엘이 가벼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병사님들도 다들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네요. 이 상태면 별 문제는 없겠어요."

"그러게. 인명 피해는 안 나면 좋겠는데 말이지."

루이카엔 역시 뒷목을 주무르면서 덧붙였다. 그의 시선은 점점 해가 떨어지고 있는 붉은색 하늘에 닿아 있었다. 앞으로 몇 시간 후면 출격. 이렇게 본격적인 싸움은 그로서도 오랜만이었다.

"어째 카이스랑 아시엘이 들어오고 나서 큰 일이 많이 생기는 것 같네."

"내 말이. 일을 불러들이는 요정도 아니고. 게다가 가는 곳마다 대형사고란 말이야."

케빈도 동감이라는듯 투덜거리자 아시엘은 불만스럽게 입을 비죽 내밀었다.

"왜 억울한 사람한테 덮어씌우고 그래요. 우연일 뿐이라고요."

"글쎄. 우연이면 좋겠는데 말이지."

"네?"

루이카엔의 말에 그는 의아하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답을 원하는 듯한 소년의 얼굴에 루이카엔은 빙그레 미소지을 뿐 답하지 않았다.

그쪽 높으신 나으리들이 녀석에게 가진 과한 관심과 관련이 없으면 좋을 텐데.

그는 아시엘에게서 시선을 떼며 한숨을 삼키고 쓴웃음을 지었다. 아시엘은 그런 그를 이상하다는듯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루이카엔 씨?"

"-케빈 말대로 진짜 이놈들이 일을 부르는 거라면 엄청 부려먹고 싶어지잖아."

루이카엔은 씨익 장난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허리를 스트레칭 하듯 뒤로 젖혔다. 아시엘은 부루퉁하게 볼을 부풀렸지만 더이상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는지 말머리를 돌렸다.

"그런 것보다, 오늘 밤에도 철야겠네요. 몬스터가 밤에는 둔해진다니까 그쪽이 나을 것 같아서 결정하기는 했는데 말이에요."

"그러게. 진짜 너무 빡세다니까, 우리 기사단."

케빈은 입술을 비죽 내밀고 툴툴거렸다. 그 옆에서 카이스도 격하게 동의한다는듯 고개를 여러번 끄덕였다. 그런 동료들을 바라보며 루이카엔은 킥킥 웃음소리를 냈다.

"나랏돈 얻어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지. 발로 뛰는 수밖에."

".. 아마 아카데미 후배들이 직접 현장 견학을 하고 간다면 전례 없는 대거 자퇴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카이스가 진지한 얼굴로 조용히 하는 말에 그는 웃음을 멈추었다. 아시엘과 케빈 역시 한층 더 우울해졌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불쌍한 공무원들. 키프스는 아무 말 없이 속으로 그들에게 연민을 표했다.

병사들은 출정 준비를 하고, 기사들은 한데 모여 한탄을 하는 와중에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완전히 해가 떨어진 밤이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병사들에게 집합 명령이 내려졌다.

연무장에 무장한 채 모여 정렬한 50여 명의 병사들을 단상 위에서 내려다보며 루이카엔은 작게 혀를 찼다. 낮까지의 패기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전투를 앞둔 지금, 뒤늦게 두려움의 그림자가 슬금슬금 그들을 잠식하고 있었다. 애써 마음을 다잡으려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지만 그래도 창백하게 질린 얼굴들은 감출 수가 없었다.

"아아, 왠일로 일이 잘 진행되나 했더니 역시나로군."

케빈은 곁에 있는 일행들에게만 들리도록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로운 이 시대에, 변두리 영지의 병사들에게 실전 경험이 많을 리가 없었다. 기껏해야 수련을 하고 산 근처에 나타나는 저급 몬스터들을 처리할 뿐이었을 터였다.

"무가로 유명한 메르티스 백작가의 사병들이 이 모양인걸 보아하니 시대가 좋긴 좋나 보네."

그가 덧붙이자 루이카엔은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황도는 초긴장 상황이니 외부적으로 전쟁을 벌일 여유가 없어 라이펜과 슈베이만이 집권한 이후 근처 왕국이나 제국과의 마찰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있는 것이 효과가 있는 듯 했다. 정작 안방이라고 할 수 있는 황가는 서로를 잡아먹으려 으르렁대고 있는 실정이었지만.

"뭐, 어찌됐든 쓸데없는 인명 피해가 없으니까 나쁘진 않지. 속은 전혀 평화롭지 않은데 적어도 겉보기엔 잔잔하잖아. 물론 거울 같은 수면 아래에는 약육강식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지만. 그리고-"

루이카엔은 말끝을 늘리며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언제나 검을 곁에서 떼지 않고 전선에서 살아가는 하얀 사냥개들과 편안한 집을 떠나 자유롭게 떠돌며 스스로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는 한 남자가 결전을 앞둔 지금, 평소와 같이 여유로운 모습으로 흔들림 없이 서 있었다 . 그리고 앞에는 익숙하지 못한 죽음의 위협 앞에 움츠러든 병사들이.

"뭐, 귀한 양을 잃어버릴 수는 없으니까. 그렇지?"

그는 싱긋 웃고는 몸을 빙글 돌려 병사들과 마주보았다. 그들은 임시로 지휘관이 된 그가 무슨 말을 하려나, 하고 조금 기대에 찬 시선으로 루이카엔을 올려다보았다. 루이카엔은 그들을 찬찬히 바라보다 곧 씨익 하고 장난스럽게 입가에 곡선을 띄웠다.

"이봐, 왜 이렇게 얼어 있어. 뭐 죽으러 가는 사람들처럼. 아까까지만 해도 패기가 넘치더니."

"......!"

죽으러 간다, 는 말에 병사들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어째 그들의 얼굴이 한층 더 새하얗게 질린 듯한 느낌에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그러니까, 긴장들 풀라고.제국민들 세금 받아먹고 살면서 몇 번씩 죽는다 생각 하고 일하러 다녔는데 사람이란게 그렇게 잘 죽는 게 아니더라니까? 아직 사지 멀쩡한걸 보면 말이야."

"......"

편안하게 말을 이어가는 루이카엔의 어조에 그들은 점차 어깨에 잔뜩 들어가있던 힘을 뺐다. 하지만 여전히 얼굴에 머물고 있는 불안감은 여전했다. 루이카엔은 목소리에 한층 더 힘을 실어 덧붙였다.

"그리고 오늘 작전 수행 중, 사망자는 단 한 명도 내지 않겠다. 다치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근처 치료사들을 모조리 다 끌어모아서라도 치료해 줄 테니까."

".....!"

선언하는듯한 그의 말에 연무장은 순식간에 쥐 죽은듯 조용해졌다. 루이카엔은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가슴을 툭, 치며 싱긋 웃었다.

"너희들의 목숨은 우리, 셀레니스 기사단이 목숨을 걸고 지킨다. 그러니까 도망치지 말고 싸워. 불만 없지?"

"......."

넓은 연무장에 그의 목소리만이 메아리가 되어 감돌았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루이카엔의 말이 제대로 입력이 되지 않아 병사들은 혼란스러운듯 보였다. 그들 대부분이 20-30 대의 장정들. 젊다면 젊다는 나이였지만 병사로서 교육받으며 목숨을 바치라는 이야기밖에 듣지 못했던 그들은 루이카엔의 말이 믿기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뒤에서 잠자코 서있던 케빈이 손을 슥 들었다.

"불만 없슴돠- 두말 하면 잔소리지."

"......"

키프스는 조금 놀란 듯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지켜보던 아시엘은 씩 웃으며 뒤를 이었다.

"저도요."

"불만 없습니다."

카이스 역시 담담한 목소리로 동참했다. 루이카엔은 들었냐는듯 단호한 얼굴로 병사들을 마주했다.

"-알겠지? 스스로를 믿지 못한다면 우리를 믿어. 알겠나!"

그가 시원스럽게 외치자 그제야 병사들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제각기의 무기를 꽉쥐고, 힘차게 대답했다.

"예!"

어느새 두려움 따위는 잊어버린듯 장정들은 마음을 다잡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루이카엔은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하게 웃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좋아, 바로 이거야. 그럼 바로 출발한다!"

그는 뿌듯한 얼굴로 몸을 빙글 돌려 단상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았다. 하지만 곧 몬스터 하나 잡는데 왠 오버야, 오글거리게- 하고 투덜거리는 케빈의 언짢은 목소리에 루이카엔은 저도 모르게 발을 헛디뎌 비틀거리고 말았다.

어찌됐든 드디어 작전 개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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