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26화 (126/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15. 그리고 또 다시(1)

똑똑. 부엌에서 쿠키와 차를 얻어낸 루이카엔과 카이스는 아시엘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아까와는 다르게 들어오세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간다."

루이카엔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리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뒤이어 들어온 카이스 역시 그와 비슷하게 황당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바닥에 앉아 안경까지 쓰고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 두 사람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아시엘의 주변에는 온갖 책들과 지도들이 펼쳐진 채 늘어서 있었다.

"아, 아시엘. 그건 다 뭐야?"

"어?"

카이스와 루이카엔의 시선이 자신이 잔뜩 흩어놓은 책들에 닿아있다는 것을 깨달은 아시엘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그. 막상 밖으로 나오니까 아무래도 열받아서. 혼자서 화내기도 뭐하니까 옷만 갈아입고 잠깐 나가서 빼돌려왔죠. 카이나 키프스 님한테는 조금 미안하지만."

"....참, 답다고 해야 할지."

루이카엔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쑥쓰럽게 헤헤 웃는 그의 얼굴은 평소대로 맑게 돌아와 있었다. 언제나와 같이 이제 와서 괜찮냐고 물어보기도 이상해진 상황에 카이스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곧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아시엘의 옆으로 다가가 쭈그려앉았다.

"그래서 정확하게 뭘 하고 있었던 건데?"

"그냥, 아까 그 괴물에 대해서 뭐라도 건질 게 없나 하고. 근데 말이야-"

아시엘은 팔을 뻗어 루이카엔의 발치에 있는 제국 지도를 끌어당겼다. 새로 빨간 색연필로 표시해둔 것이 선명하게 눈에 띄였다.

"이거.."

루이카엔은 그것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는 곳들의 지명이 하나같이 낯익은 것들이었다.

"그 몬스터들이 나타난 지역 아냐?"

"맞아요."

아시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음, 하는 소리를 흘리며 소년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정말로 누군가에게 의도된 것처럼 붉은색 동그라미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은- 수도, 헤크란이었다.

"이 지역들에서 헤크란까지의 거리는 모두 같아요. 몬스터가 나올 만한 산이나 숲이 있는것도 아닌데 약속이라도 한듯이 이런 곳에, 동시에 출몰했다는 건 역시-"

"뭔가 목적이 있다는 거겠지."

루이카엔은 손으로 지도의 구겨진 부분을 눌러 평평하게 만들며 중얼거렸다. 수도 근처의 영지 이외에도 혼자 동떨어진 동그라미 하나가 눈에 띄였다. 지금 그들이 있는 메르티스 가의 영지였다.

"..왜 하필 우리 영지일까요?"

카이스는 작게 입을 열었다. 그것은 아시엘과 루이카엔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각자 머리를 굴렸지만 역시 답을 얻지 못하고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것보다 당장의 문제나 생각해 보자고."

"그래요."

루이카엔의 말에 아시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는 메르티스 백작령 전체를 세세하게 그린 지도를 가져왔다. 원래 카스란 백작이 가지고 있던 것이었지만 이제 와서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기가 지금 그 괴물 녀석이 있는 곳이죠."

그는 빨간 색연필로 백작이 해 둔 표시 위에 진하게 가위표를 그렸다. 몰래 빼돌렸다고 했지만 역시 들키지 않을 생각은 전혀 없어보이는 그 뻔뻔한 행태에 루이카엔은 작게 큭,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아시엘은 끙 소리를 내며 턱을 괴었다.

"이상한 점은 이 녀석들이 도대체 어디서 나타났냐는 거에요. 그쪽 인간들의 짓이라고 해도 그런 생물체를 만들어 낼 방법은 없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 리도 없고."

"몬스터가 서식할 수 있는 숲이나 산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 영지에는 숲이 있지만 그 거대한 놈이 나무가 많은 곳에서 살 수 있을 리가 없고."

루이카엔은 그의 말을 받아 뒤를 이으며 아시엘이 표시한 지점에서 조금 위로 떨어져 있는 숲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아까 토벌에 나섰을 때 멀찍이나마 보일 정도로 가까이 있었지만 그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의 괴물이 그곳에서 왔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이 숲은.. 몇 년 전이었나, 갑자기 나무가 다 말라 죽었는데."

"......!"

갑작스럽게 뒤에서 들려온 또다른 목소리에 세 사람은 흠칫 놀라 고개를 그쪽으로 홱 돌렸다. 예상 외의 반응이었는지 음성의 주인- 키프스는 되려 자신이 움찔하며 주춤 물러섰다.

"왜, 왜들 그래?"

"놀랐잖아요! 왜 자기 집에서 기척을 죽이고 다니냐구요."

아시엘은 억울하게 항의했다. 굉장히 예민하지만 한 가지에 집중하면 다른 데는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는 그는 물론이고 단장인 루이카엔이나 카이스 역시 지도에 정신을 파는 바람에 키프스가 다가온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었다. 키프스는 뻘쭘하게 식은땀을 흘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당연히 알아챌 줄 알고.. 놀랐다면 미안해. 그것보다 무슨 얘기 중이었어? 그 지도는 어디서 난 거야?"

"잠깐 빌렸어요."

아시엘이 부루퉁하게 대꾸하자 그는 잠시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빌렸다고?- 곧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고는 펼쳐진 책들을 피해 그들에게 다가가 쭈그려앉았다. 루이카엔은 그가 자리잡기를 기다렸다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것보다 숲이 말라버렸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죽어버렸어요. 이젠 아무것도 살지 않는다던데요."

"언제요?"

아시엘이 눈을 반짝이며 캐묻자 키프스는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음.. 꽤 오래 전 일이야. 카이가 아카데미로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니까. 넌 모르겠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시엘과 루이카엔, 그리고 카이스는 음- 하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오래 전 말라 죽은 숲과 갑자기 나타난 괴물.

"별로 상관은 없어 보이지?"

"-아마도요. 거리가 가까운 게 좀 걸리지만 옛날 일이기도 하고.."

단장의 말에 아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똑똑 하고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시엘, 있냐?"

"아. 케빈 선배! 들어오세요."

곧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케빈이 들어왔다. 그는 발을 내딛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광경에 아까의 루이카엔과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뭐냐? 이건. 그것보다 왜 다들 여기 있는데?"

케빈은 바닥에 펼쳐진 채로 흩어져있는 책들과 아시엘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는 그들을 보며 황당하게 말했다. 하지만 루이카엔은 그의 말을 싹 무시하고 손을 까닥였다.

"뭐해? 안 오고."

".... 나, 참."

케빈은 고개를 우두둑 돌리며 그쪽으로 가 아시엘의 맞은편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제야 오래된 지도 두 개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이거."

"빌렸어요."

아시엘은 아까 했던 말을 똑같이 힘주어 반복했다. 빌렸다, 빌렸다라- 케빈은 잠시 황망하게 중얼거리다 곧 포기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서, 무슨 얘기 하고 있었는데?"

"마침 잘 왔어. 작전회의 분위기였거든."

루이카엔이 툭 내뱉는 말에  키프스가 눈썹을 휘며 재빨리 끼어들었다.

"단체로 바닥에 둘러앉아서.. 말입니까?"

"......."

그들은 입을 다물고 눈을 꿈뻑거렸다. 확실히 황제 직속의 기사들이 벌이는 작전회의라고 하기엔 모양새가 영 아니었다. 제복을 입은 채 의자도 아니고 카펫 위에 주저앉은 네 명의 기사라니. 고급스러운 탁자에 둘러앉아 근엄한 분위기로 토론하는 광경을 상상했던 키프스는 당황스럽기만 했다. 거기다 지도 역시 몰래 빌려온(?) 것이고. 하지만-

"뭐, 어때요."

아시엘은 어깨를 으쓱했다. 루이카엔과 케빈, 그리고 카이스 역시 뭐가 문제냐는듯 키프스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결국 포기하고 한숨을 내쉰 것은 메르티스 백작가의 차남이었다.

".. 아닙니다. 여러분이 셀레니스의 기사라는 것을 잠시 잊어버렸군요."

".....?"

그가 체념조로 그렇게 말하자, 네 사람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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